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34)화 (34/107)

34. 고통 없이 사라지게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 중 절반은 오필리안의 뒤를 따랐다. 에이젠은 오필리안이 자신을 지원하러 온 것에 의아함을 느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저를 걱정해 차마 먼저 피신하지 못한 로아를 먼저 보내기 위한 최적의 타이밍인 것만은 알았다.

“지원군이 왔어. 이제 안심하고 가.”

“에이젠…….”

로아는 두 손으로 글썽이던 눈가를 닦아냈다. 그러더니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그의 옆에 있어봤자 그를 방해할 뿐이었다.

“다시 만나.”

로아는 뒤로 물러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세 걸음 정도 물러섰을 때 휙 뒤로 돌았다.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앞을 향해 달렸다. 언덕배기를 올라가는 와중에도 로아는 앞을 제외한 어느 곳으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로아 트로네를 붙잡아라!”

포진되어 있던 기사들 중 몇몇이 도망치는 로아를 쫓았다. 그중에는 수장 펙토르도 있었다.

“윽!”

사람의 다리가 말의 속도를 이길 순 없었다. 자신감 넘치게 달린 것치고는 너무 빨리 붙잡히고 말았다.

붙잡히고서야 돌아봤을 땐 로아의 시야에서 에이젠을 찾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풀숲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다르를 따르는 황실 기사단 일부와 오필리안이 이끌고 온 기사단원들이 서로 충돌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거 놓으시오! 난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펙토르는 로아의 멱살을 다소 격하게 잡아챘다.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해 몸이 튕기듯 일으켜졌다.

“부인, 반항하지 마시오. 태자 저하의 명이니 순순히 따르는 것이 그대에게 좋을 것입니다.”

펙토르가 로아를 꽉 붙들고 있는 사이 그녀를 이동시킬 마차가 다가왔다. 로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마차를 보자 덜컥 겁을 먹었다. 저 마차에 올라탔다간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지옥 같았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저를 구하기 위해 반역 혐의를 무릅쓰고 탈출한 에이젠, 귀빈실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준 카일론, 그리고 두 사람을 도와주러 온 루크티아 기사단과 오필리안 황자까지. 그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놓으라니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로아는 펙토르를 향해 머리를 들이박았다.

“아아악!”

펙토르는 갑자기 이마 위로 쏟아진 충격에 비명을 질렀다. 로아를 꽉 붙들고 있던 손은 충격이 가해진 코 쪽으로 가져갔다. 로아는 자유를 되찾은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튀었다.

“뭐 해! 당장 붙잡지 않고!”

젖먹던 힘까지 긁어모아 달려봤지만 이번에도 멀리 가진 못했다. 주변을 둘러쌌던 기사들에게 쉽사리 붙잡힌 로아는 땅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몸을 다 일으키지도 못한 상태로 마차 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로아 트로네는 내가 제압할 테니 너희는 지원을 가라.”

“알겠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로아를 놓은 채 육탄전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펙토르는 힘이 다 빠져버린 로아를 인형처럼 가벼이 일으켜 세웠다. 로아는 펙토르와 눈을 맞추고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날이 선 눈빛을 쏘아댔다. 그러나 펙토르의 눈에 로아는 앙칼진 아기 고양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태자 저하께서 그대를 매우 아끼는 것 같아 봐주려 했건만.”

펙토르의 큼지막한 두 손바닥이 로아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감쌌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미간과 눈에 한가득 힘을 주고 있던 로아는 갑자기 조여드는 압박감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윽!”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 제 숨통을 누르듯 조였다.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떼어내 보려 했지만 남자의 막강한 힘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발버둥 치던 두 발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고개 숙인 펙토르가 로아의 귓가에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잠시 기절해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마음을 편히 내려놓으시지요.”

“으으윽…….”

목을 틀어막아 낮은 신음을 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 에이젠이 도와주러 와줄지도 모르는데……. 로아는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태자 저하께 그대를 생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명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어쩔 수 없는 과정인 거죠. 너그러이 양해해주시오, 부인.”

아득해진 시야가 새하얗게 변해갔다. 서서히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점점 약해져 가는 의식 속 누군가의 외침이 그녀의 고막을 찌를 것처럼 울려 퍼졌다.

“단장님, 태세를 갖추십시오!”

탁, 탁, 탁, 탁.

펙토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커져가는 걸 들었다. 펙토르가 그 정체를 인지하려 고개를 돌린 것보다 소리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로아의 목을 옥죄던 손에 힘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드리워진 그림자에 시야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사이에 날카로운 칼날은 제 살을 파고들어 날렵하게 빠져나간 후였다.

“으아아아악!”

펙토르는 로아를 팽개치듯 놓아버렸다.

“캑, 캑, 크흑…….”

뒤로 넘어진 로아는 잃을 뻔한 정신을 되찾았다. 주변을 인지하려 두 눈을 부릅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다량의 피를 흘리며 쓰러진 펙토르였다. 놀란 토끼눈을 뜬 것도 잠시 제 시야를 가로막은 건 바로 에이젠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에이젠은 그녀가 알던 남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는 무언가에 미쳐 돌아간 사람처럼 희번덕했다. 로아의 생사를 확인한 에이젠은 곧장 몸을 일으켜 쓰러진 펙토르에게 다가갔다.

로아의 시선 또한 에이젠을 따라 펙토르에게 향했다. 그는 분명 로아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몸을 돌린 것뿐인데, 에이젠은 정확하게 펙토르의 가슴을 베었다.

로아는 처음 보는 에이젠의 살상의 순간에 겁을 먹었다. 덜덜거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사람을 해하는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봐서는 안 되는 걸 알았다. 에이젠은 자신의 잔인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알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에이젠 트로네가 펙토르 경을 베었다…….”

에이젠이 펙토르를 베어버린 광경은 주변에서 육탄전을 벌이던 황실 관계자들 전원이 목격했다.

“오필리안 황자님께서도 더 이상 그를 막아줄 수 없을 것이다.”

“반역이다, 이건 명백한 반역이야!”

수군거리던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로아는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괴로워 두 손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귀는 막았을지언정 눈은 아직도 에이젠에게로 향해 있었다.

“젠장. 갑자기 왜 호위기사를!”

에이젠을 지원하기 위해 와준 오필리안 역시 더는 손을 쓸 수 없게 돼버렸다.

그러나 에이젠은 주변의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삶을 바쳐 사랑하고 아껴온 하나뿐인 여자 로아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성은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끊어진 지 오래였다.

“손댈 것이 따로 있지, 죽어 마땅한 자식 같으니라고.”

에이젠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펙토르의 가슴을 지그시 짓밟았다.

“커헉, 큭!”

더는 고통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펙토르가 거친 숨만 들이켰다. 에이젠은 날을 세운 검을 펙토르의 목에 겨누었다.

“고통 없이 사라지게 해주마.”

뒤가 어찌 됐든 이자는 죽여야만 했다. 에이젠의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그렇게 명령하고 있었다. 에이젠의 말과 행동은 어느 것 하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검자루를 꽉 쥐고 허공을 향해 높이 치켜들었을 때, 로아는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에이젠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에이젠, 안 돼!”

그가 펙토르의 목에 칼을 꽂아 넣기 직전. 달려온 로아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만류했다.

“로아…….”

에이젠은 갑자기 뛰어든 로아에 당황했다. 검을 쥔 그의 손목이 툭 떨어졌다. 로아를 어서 멀리로 밀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에이젠이 방심한 아주 짧은 틈, 펙토르는 마지막 기력을 끌어모아 제 검을 쥐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등 뒤로 꽂히려는 날카로운 빛깔을 보고 말았다.

에이젠은 재빨리 로아의 허리를 감싸 몸을 빙글 돌렸다. 로아는 갑자기 저를 안아든 에이젠이 함께 도망치려는 건가, 하는 착각을 했다. 그러나 희망 어린 착각 또한 길게 가지 않았다.

“큿…….”

돌아서자마자 귀에 꽂히는 그의 낮은 신음 때문이었다.

“……에이젠?”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에이젠은 한동안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상하게 그가 가만히 있는데도 주변에서 달려들지 않았다. 곧 무거운 그의 몸이 로아 쪽으로 기울어졌다. 로아는 에이젠의 몸을 지탱해보려다 결국 그 힘에 밀려 털썩 주저앉았다.

“로아…….”

이 난장이 나는 동안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던 에이젠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로아는 함께 주저앉고서야 그의 등 뒤에 꽂힌 칼을 발견했다.

로아는 그 모습을 보고도 한참을 생각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환각은 아닌지 두 눈을 의심했다.

“에이젠, 거짓말이지? 이거 아니지?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이상하게 느릿해지고 온순해진 에이젠의 반응에 점차 현실을 인지해갔다. 그녀의 내면은 발칵 뒤집힐 것처럼 각성했는데도 겉으로는 아무 표현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와닿은 너무 큰 충격이 그녀의 모든 감각세포를 고장 내버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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