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35)화 (35/107)

35. 유일한 사랑, 유일한 희망

그는 몸을 보호할 그 어떠한 갑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하얀색이었던 옷이 새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피가, 피가…….”

로아는 피를 보고도 어쩔 줄 몰랐다. 제 치맛자락을 찢어 지혈해보려 했지만 피가 나는 부위를 다 막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안 돼, 안 돼.”

그녀의 손이 점점 다급해졌다. 치솟듯 뿜어져 나오는 피가 어느새 바닥까지 새빨갛게 적시고 있었다. 에이젠은 허둥거리는 로아의 손목을 잡았다. 벌써부터 그의 온기가 희미했다.

“로아.”

에이젠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야 로아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 입술을 달싹거렸다. 목소리가 나오기 전 에이젠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안 돼.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제발, 에이젠, 제발.”

로아는 에이젠의 뺨을 감싸 잡았다. 늘 든든하기만 하던 그의 나약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로아는 그보다 더욱 괴로운 얼굴로 에이젠을 껴안았다.

“트로네 대공이 쓰러졌다. 어서 부인을 포획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간은 멈춘 것처럼 주변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롯이 서로를 향한 간절한 눈길뿐이었다.

에이젠은 손을 뻗어 로아의 뺨을 만졌다.

“로, 아, 나의, 나만의 레이디, 로아.”

미쳐 돌아간 그의 눈은 어느새 온화하게 돌아왔다.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던 다정한 남편의 모습 그대로. 가장 사랑하는 에이젠의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로아는 절규했다.

“에이젠, 제발 죽지 마. 안 돼, 이러지 마…….”

자신의 뺨을 만지는 그의 손을 감싸 잡았다. 제 온기에 비해 에이젠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느껴지는 감촉이 낯설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랑해.”

마지막이 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게 마지막이어선 안 됐으니까. 그러나 간곡히 퍼지는 그의 목소리에 로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와 함께 행복하고 싶었어.”

에이젠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로아는 퉁퉁 부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부릅떴다. 본능이 그렇게 시켰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막이 될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라고. 그의 말을 제대로 들으라고.

“조금, 힘들 것 같긴 한데…….”

사랑스럽던 미소는 점차 씁쓸하게 변해갔다.

“안 돼, 에이젠. 안 돼.”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녀를 괴롭혔다. 로아의 격한 부정에도 에이젠은 할 말을 이어갔다.

“너만은 행복해.”

툭툭 떨어진 로아의 눈물은 줄기가 되어 에이젠의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랑해.”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쥔 채로 제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끝에 입술을 맞추었다.

“내 유일한 사랑, 내 유일한 희망.”

손끝에 닿은 감촉은 거칠었고 차가웠다. 충격에 사고회로가 멈춘 것처럼 로아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를 보내야 하는 마지막이란 걸 인지하기엔 너무 갑작스럽게 닥쳐버린 상황이었다.

“로…….”

에이젠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려 했다. 그러나 로아는 뒷덜미가 콱 붙잡히는 느낌과 함께 에이젠에게서 멀어졌다.

“아…….”

바짝 다가온 자들이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았다.

“부인은 저희와 함께 가시죠.”

로아는 제 두 팔을 붙잡은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눈으로는 쓰러진 에이젠을 좇았다. 그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자신이 빠지자 차디찬 땅바닥에 그냥 쓰러진 채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멀어져가는 로아만을 응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밑으론 다량의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거 놔, 에이젠! 에이젠을 놓아줘!”

뒤늦게 몸을 비틀어대며 반항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절망적인 광경에 힘이 다 빠져버린 후였다.

에이젠은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로아를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입에 담은 이름은 ‘로아’였다.

“싫어, 이러지 마. 에이젠, 에이젠!”

로아는 에이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끝은 에이젠에게 닿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밀어낸 것처럼 에이젠은 저로부터 멀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에이젠이 이렇게 되어야만 했지. 그는 제국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악착같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런 에이젠이 왜 희생당해야 하는 거야.

에이젠이 도망가라고 등을 떠밀었을 때. 그때 갔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까. 마음이 나약한 제가 에이젠을 뜯어말린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걸까.

에이젠은 전쟁에서 제국을 승리로 이끌 정도로 전투력이 좋은 수장이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방심했던 순간이, 바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그 짧은 틈이었다.

끼어들지 말걸. 아니 처음부터 도망가라 했을 때 망설이지 말고 갈걸.

그럼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그런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게 비단 오늘만일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결혼하면 남편 될 사람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이 결혼을 원인으로 죽음에까지 이를 운명으로 보입니다.’

포춘텔러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전공을 세운 그가 제국에서 몰려날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건 어찌 됐든 저 때문이었다. 그가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결혼을 강행한 저 때문.

황태자 유다르가 노린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때 유다르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유다르가 에이젠을 시기하고 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젠도 능력을 인정받고 높은 자리에 올랐을 테지.

아, 내 잘못이다. 에이젠이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야.

로아는 해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짐짝처럼 들린 몸이 밀폐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마차에 갇혔다. 그리고 지체 없이 마차는 전진하듯 움직였다. 한동안 멍하게 있던 로아는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패닉에 빠졌다.

“흐아아아악!”

자신이 내는 목소리에 제 고막이 터져 나갈 정도로 비명을 질러댔다.

에이젠과 저는 서로 사랑했다. 버티기 힘든 긴 시간 서로를 그리워하며 기다린 죄밖에 없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운명이란 게 대체 뭐길래 이리도 잔혹하단 말인가.

로아는 흔들거리는 마차 안에서 멀미를 느꼈다. 토악질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찼으나 어질거리는 정신을 버티지 못하고 놓아버렸다. 무거워진 몸뚱이가 양옆으로 휘청거렸다. 눈동자는 정면이 아닌 마차의 천장 쪽으로 향했다. 시야가 휙 돌아감과 동시에 로아는 의식을 잃었다.

바닥에 털썩 쓰러졌을 때, 로아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바닥과 몸이 마찰하던 순간 마차 바닥을 뚫고 더 깊숙한 곳으로 빠져들었다. 그곳의 시간은 깊은 심해에 들어온 것처럼 느릿하게 흘러갔다. 마차 안보다 더욱 새카만 이곳은 무의식 속 같았다.

특별한 게 보이거나 느껴지진 않았다. 로아는 그저 이곳이 뭔지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던 중 ‘댕, 댕-’ 하는 익숙한 종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로아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댕, 댕-

분명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두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번쩍 뜨인 눈앞으로 강렬한 햇살이 한가득 쏟아졌다. 그 빛줄기가 너무 따가워 눈을 곧바로 뜨기도 힘들 정도였다.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로아는 마치 장님이 처음 눈을 뜬 것처럼 제 주변의 광경을 생소한 시선으로 훑어봤다.

“어…….”

왠지 익숙한 곳이었다. 푸르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리 사람의 손을 많이 타지 않은 듯한 자연풍경식 정원.

자연풍경식 정원이라면 헤이든 제국에 단 세 곳뿐이다.

클라리온 백작 저, 트로네 대공 저, 그리고 황실의 후원.

혹시 정신을 잃은 사이 벌써 황실에 돌아와버린 것인가. 로아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어딘지 이상했다. 황실이라기엔 주변에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왔으면 또다시 귀빈실에 갇혔겠지, 이렇게 무방비하게 후원 한가운데에 내버려뒀을 리 없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로아는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가 우뚝 멈춰 섰다. 시야에 걸린 치맛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검은색 하녀복을 입고 있었는데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드레스로 바뀌어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에이젠은 어떻게 된 건지. 이곳은 어디인지.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여러 가지를 떠올리느라 머리가 깨질 것처럼 괴로웠다. 손가락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던 중 왠지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닿았다.

“아가씨, 아가씨!”

뒤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얼른 몸을 돌렸다. 로아는 저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는 여자의 얼굴을 한 번에 알아봤다. 믿을 수 없는 듯 그녀의 눈동자자 미세하게 떨렸다.

황실 후원에서도 트로네 대공 저에서도 자신을 ‘아가씨’라 칭하는 사용인은 없었다.

“헉, 헉, 아가씨, 한참 찾았어요.”

여자는 달려오느라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기 위해 상체를 굽혔다. 로아는 힘들어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쥬디?”

결혼을 하기 전, 본가에 살았을 때 자신을 보필하던 하녀 쥬디였다.

그렇다면 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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