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리웠습니다, 레이디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분명 황실을 벗어나 좌표도 모를 풀숲으로 피신했었다. 언덕 하나를 건너야만 수도를 벗어날 수 있었는데 결국 거길 지나지도 못했다. 다시 황실로 끌려갔어야 했다.
“쥬디가 여길 어떻게 온 거야? 나는 어떻게 된 거고?”
“무슨 소리 하세요.”
여긴 아무리 봐도 황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왜 느닷없이 쥬디가 제 앞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꿈이라도 꾸신 거예요?”
“꿈?”
꿈이라고? 그렇게 생생한 꿈이 있을 수 있다고?
매일같이 잠에 들었고, 꿈을 꾼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현실 같은 꿈은 꿔본 적 없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아무리 선명했던 꿈이라도 점점 흐려지기 마련이었다.
아니, 분명 꿈이 아니었다.
로아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너무 깊은 생각을 하려 하니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일었다.
쥬디는 안색이 어두운 로아를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곤 어딘가로 이끌었다.
“대공 각하께서 벌써 도착하셨다구요.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으니 어서 서둘러요.”
쥬디의 말에 로아는 화들짝 놀랐다.
대공 각하가 도착했다니? 에이젠은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칼에 맞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혹시 에이젠이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걸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후원에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에이젠을 걱정하던 로아는 들어선 저택을 마치 남의 집처럼 생소하게 둘러봤다.
“여긴…….”
자신이 깨어났던 정원부터 저택까지 너무도 익숙한 곳이었다.
클라리온 백작 저.
그제야 자신이 본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어떻게 여길?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거지? 수도에서 본가까지의 거리는 마차로도 하루는 꼬박 걸릴 거리일 텐데.
복잡해진 뇌가 결론을 내리기 전, 정문을 통해 다시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그곳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사용인들과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로아, 너 어디서 뭐 하느라…….”
셰인데릭이 로아에게 어서 자리를 찾아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로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헤매다가 가장 끝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성안으로 들어선 손님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보고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정갈한 제복에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 입구에 도착한 남자는 단번에 말에서 뛰어내렸다.
짙은 흑발에 매료될 것 같은 붉은 눈동자. 로아는 점점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꼭 허상을 보는 것 같아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에이젠?”
믿기 힘들게도, 에이젠이 제 앞에 있었다. 칼을 맞았던 육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 보였다. 로아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넨 에이젠은 가주인 클라리온 백작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셔서 우리 영지부터 찾아주시다니, 클라리온가의 영광입니다.”
로아는 에이젠이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전쟁을 마치고’라는 서두가 거슬렸다. 전쟁이 끝난 지는 몇 달이나 지났는데 언급을 하는 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로아의 시선은 자연스레 에이젠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상태였다. 가족들과의 인사를 마친 그가 드디어 제 앞에 멈춰 섰다.
“그리웠습니다. 레이디 클라리온.”
에이젠이 로아의 앞에 섰다. 짧게 건네는 인사말에도 로아는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손을 건네지 않았다.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린 그가 로아의 손을 가져갔다. 제 손을 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생경했다. 곧 고개 숙인 에이젠이 로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로아는 에이젠이 쓰러지던 순간, 마지막으로 제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던 때를 떠올렸다. 거친 질감과 차가웠던 온도.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에이젠은 너무도 건강해 보였다. 칼이 꽂혔던 때를 직접 목격해서인지, 그의 손 위에 자리한 상처는 거슬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거기에 손등에 닿는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에이젠…….”
에이젠을 부르는 로아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고개를 든 에이젠이 로아와 눈을 맞추었다. 로아는 이미 두 뺨을 눈물로 적신 채였다. 당황한 에이젠이 로아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이 로아에게 닿기도 전. 로아가 먼저 두 팔을 뻗어 에이젠을 향해 돌진했다.
“으흑, 흐……, 에이젠.”
울음을 터뜨린 로아가 에이젠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각 잡혀있던 그의 셔츠를 눈물로 적셨다.
“흐으윽, 으아아앙.”
격한 감정의 변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에이젠이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준 건 기적이었다. 지난 악몽이 꿈이라면 천만다행이었고, 지금이 꿈이라면 평생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뭐가 꿈이고 뭐가 현실인지 구별하지 못해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게 꿈이라도 좋았다. 지금 당장은 그의 온기를 느끼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로아, 지금 실례되게 무슨……!”
셰인데릭이 로아를 떼어놓으려 다가왔다. 그러나 에이젠이 손을 뻗어 셰인데릭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다.
“레이디와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에이젠의 한 마디에 입구에 있던 클라리온 백작 가족들과 사용인들이 전부 물러났다. 소수의 기사와 하녀들만 남긴 채였다. 로아는 에이젠의 품에 안겨 아직도 울고 있었다.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을 목구멍 뒤로 기어이 삼켰지만, 억지로 참느라 호흡이 힘들 지경이었다. 에이젠은 아직도 들썩거리는 로아의 어깨를 마주 안았다. 등을 토닥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로아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위로가 서툰 에이젠은 일단 로아를 떨어뜨렸다. 품에서 빠져나온 로아는 여전히 손끝으로 그의 옷자락을 쥐고 놓지 않으려 했다. 혹시라도 허상이라면 사라져버릴까 두려워서였다.
“함께 정원이라도 거닐까요. 그럼 진정이 되려나.”
로아는 퉁퉁 부어버린 눈을 뜨기도 힘들어했다. 와중에도 다정하게 묻는 에이젠의 제안에 착실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음을 흘린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마주 잡은 채 정원으로 이끌었다.
로아는 자유로운 다른 쪽 손으로 젖은 뺨을 훔쳤다. 고개를 살짝 들자 맞잡은 그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몇 걸음 걷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로아가 멈추자 에이젠도 그녀를 따라 멈췄다.
“에이젠.”
에이젠이 뒤를 돌아봤다. 로아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아무리 봐도 에이젠이 맞았다.
“에이젠이 맞는 거지?”
그래도 믿지 못해 반복해서 물었다. 허리를 숙인 에이젠이 로아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래, 나잖아.”
굵은 선의 이목구비를 가졌으면서 이렇게나 예쁘게 웃을 수 있는 남자, 에이젠 트로네. 로아는 어떻게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건지 유추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제한된 시간일지도 모르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게 훨씬 현명할지도 모른다.
“안아줘.”
맥락 없는 요구였다. 그러나 에이젠은 흔쾌히 로아의 앞에 바투 다가섰다.
“레이디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영광이라면 얼마든.”
에이젠은 여리여리한 로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로아는 그의 품에 안겨 가까이서 느껴지는 숨결과 맥박을 느꼈다. 그제야 불안했던 기운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오늘은 손꼽아 기다렸어. 너무 설레는 탓에 어젯밤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
로아는 에이젠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말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언제쯤인가 들어본 적 있는 한 마디였다.
그 말을 듣고서야 로아는 어질러졌던 기억의 퍼즐 조각을 단번에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전쟁을 마치고 귀환한 에이젠이 처음으로 클라리온 영지를 방문하던 날. 오늘의 만남은 두 사람이 2년 만에 재회를 하는 바로 그날이었다.
‘선잠을 자는 동안 악몽을 꾸었어.’
‘꿈속에 에이젠이 나왔는데, 내가 에이젠을 밀쳐내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이었어.’
로아가 눈을 떴던 정원도 기억이 났다. 에이젠을 기다리는 동안 은목서꽃에서 영감을 얻은 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정원을 거닐다가 기온과 습도가 적당해 나무에 기대어 아무렇게나 낮잠을 잤다. 그리고 그 선잠을 자는 동안 악몽을 꾼 적 있다. 그땐 어떤 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깨어나고서도 불쾌한 여운이 남았었다.
그럼 나는 정말 긴 꿈을 꾼 것인가.
아니, 꿈이 아니다. 왜냐면 이 순간의 뒷장면들도 전부 기억했다.
‘에이젠이 오기 며칠 전부터 내가 직접 물을 준 화단이야.’
두 사람은 함께 차를 마시고 화단에 물을 주고 풀밭에 아무렇게나 누워 함께 낮잠을 자는 등 평화롭고 잔잔한 일상을 함께 보냈다.
‘이제 익숙해져야 할 거야. 레이디 클라리온이 아닌……, 트로네 대공 부인으로.’
이후엔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에이젠은 아버지인 클라리온 백작에게 혼사를 요청했다. 문 앞에서 쩔쩔매며 기다리던 자신은 에이젠이 허락을 구했다는 말을 듣고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렇다. 지금까지 로아가 겪었던 건 꿈이 아닌 현실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현실이다.
모든 걸 이해한 로아는 눈동자를 들어 올려 다시 에이젠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시간이 되돌아왔다. 다시 한번 그를 살릴 기회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