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37)화 (37/107)

37.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로아는 에이젠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전부 널 위해서였어. 너 하나만을 위해서. 살아 돌아와서 너와 결혼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모든 걸 알고서 다시 본 에이젠의 눈빛은 달라 보였다. 다정하다고만 생각했던 그의 미소는 좀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자신은 에이젠의 최종 목적지였다. 자신의 젊음과 노력을 기꺼이 바친 그에게 얻어지는 최고의 보상.

그러나 에이젠에게 로아는 독배인 줄 모르고 삼켜버린 존재였다.

로아는 여러 가지 감정이 얽혀들었다. 그를 다시 만나 기뻤다. 그러나 똑같은 결과가 되지 않으려면 과정 어딘가를 살짝 비틀어야 했다.

‘이 결혼을 원인으로 죽음에까지 이를 운명으로 보입니다.’

에이젠이 죽게 된 게 저와의 결혼 때문이라면, 그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로아.”

흔들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로아는 에이젠의 부름에야 정신을 차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온 에이젠이 로아에게 손을 뻗었다.

“컨디션이 나빠 보여.”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로아는 멍하게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내 일정 때문에 무리하게 나와준 거라면…….”

“아, 아니야.”

로아는 에이젠의 손길을 피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에이젠의 시선은 로아의 얼굴에서 그녀의 발끝으로 떨어졌다. 저를 피한 로아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일순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

아직 머릿속이 다 정리되지 않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곤란해하는 로아를 보고도 에이젠은 미소를 띠었다.

“우리 산책은 다음에 하고 중정에 가서 이야기나 할까?”

무얼 하든 사랑스럽다는 눈이었다. 그만큼 저와 만나는 걸 기다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로아는 그런 에이젠을 함께 똑같은 온도로 바라봐주곤 했다. 그러나 생각이 많아진 지금은 부담이 되어 돌아왔다. 에이젠과 함께 중정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로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두 사람이 테라스에 위치한 야외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이젠은 주변 정원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이네. 여기서 너한테 목걸이를 선물했었는데.”

로아는 에이젠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에이젠이 로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나 로아는 그가 저를 빤히 보는 시선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에이젠이 팔을 뻗어 로아의 목덜미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가 코앞까지 다가오고서야 화들짝 놀란 로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가지고 있네.”

목덜미에 닿을 뻔했던 그의 손은 루비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그녀의 목에 걸려 화사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 응.”

로아의 신경을 돌린 후에야 에이젠은 손을 떼어냈다. 로아는 그의 온기가 남은 펜던트를 손으로 감쌌다.

“로아, 우리 혼사에 관한 거 말인데.”

로아의 집중력을 되찾아온 에이젠은 본론을 꺼냈다.

로아는 ‘혼사’라는 단어만 듣고도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기운을 느껴야 했다. 오늘 밤,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마친 그는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받으러 갈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흘러가기 전에 결혼을 막기 위한 최적의 타이밍은 바로 지금이었다.

“저, 에이젠.”

에이젠의 본론이 나오기 전, 로아는 황급히 그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나도 혼사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내내 로아의 안색이 좋지 않아서인지, 에이젠은 불안한 직감을 느꼈다.

“먼저 얘기해.”

로아에게 선 발언권을 내어주면서도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가 불편함을 느끼는 걸 어렴풋이 알았지만 로아는 두 눈 꼭 감고 할 말을 해야 했다.

“우리 2년 전에 결혼을 약속하긴 했지만, 에이젠이 출정해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어.”

서두만 듣고도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았다. 에이젠은 입꼬리에서 웃음기를 지워냈다. 다정해 보이던 눈빛도 어느새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에이젠과 결혼할 순 없을 거 같아.”

한 음절씩 뗄 때마다 제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가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았다. 용기 내 꺼낸 말에도 긴장이 되어서인지 손에 땀을 쥐게 되었다. 할 말을 다 끝마치고서야 눈동자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저에게 내리꽂는 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왜?”

그리고 더 차디차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냐는 질문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로아에겐 생각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와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도 너무 섣불리 내린 판단인데, 둘러댈 변명까지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

로아의 침묵에 에이젠이 먼저 이유를 추측해냈다.

“다른 결혼할 남자라도 있나.”

어쩌면 그를 완벽하게 포기시키기 위해 가장 적합한 변명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괜히 어설픈 거짓말을 했다가 발각될 확률이 가장 높기도 했다.

“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에이젠은 로아에게 길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당황한 로아의 동공이 더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다 번뜩 떠오른 게 있었다.

“아무래도 에이젠은 전력이 높은 기사이니까…….”

로아가 서두를 꺼내자 몰아붙이던 에이젠은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결혼하고 나서도 출정하는 일이 또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방금 지어낸 것치곤 꽤 설득력 있는 핑계였다. 로아는 이것을 이유로 에이젠을 밀어내기로 했다.

“2년간 에이젠을 기다리면서 많이 힘들었거든.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또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잖아. 그때가 되면 내가 버티지 못하는 건 아닌지 뭐 그런…….”

그럴싸하게 둘러대긴 했지만 에이젠에게선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2년이나 기다려놓고 이제 와서 이러면 아무래도 이상해 보이려나. 말로는 밀어내면서 불안함에 덜덜 떠는 모습이 전혀 안 맞다고 생각하려나. 수많은 잡념이 로아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웃기지도 않은 핑계였다.

애초에 그가 기사가 된 건 저 때문이라고 했다. 어릴 적 그에게 멋진 기사님이 되면 잘 어울리겠다 말했던 게 자신이었다. 그리고 에이젠은 그 위로에 힘을 얻고 출가하여 루크티아 기사단에 입단했다. 로아에게 남자로 인정받기 위해 기사의 서약도 바치려 했다. 출정 나간 전쟁에서도 전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자신이 바랐던 가장 이상적인, 아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한 남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언제 출정해야 될지 모르는 기사님이라 싫다니.

다시 되짚어 보니 최악의 변명 같기도 했다.

“그래?”

그러나 에이젠은 의외로 쉽게 물러났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어?”

집요하게 따라붙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는 에이젠의 모습에 더 어리둥절해진 건 로아 쪽이었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에게 눈을 맞추며 다정히 말했다.

“내가 너의 행복을 방해한다면 기꺼이 물러나줄 수 있어.”

그가 전쟁에 출정하기 전, 로아에게 처음으로 혼사를 제안했을 때도 같은 말을 했었다.

‘무엇보다 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니까. 내가 그걸 해칠 자격은 절대 없지.’

에이젠은 그런 남자였다.

자신이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을 억지로 가지려 하지 않는다. 강한 권력을 쥐고 세차게 끌어내릴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그게 비록 그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에이젠을 밀어내고서야, 로아는 그에게 한 번 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 이해해줘서 고마워, 에이젠.”

거절을 하고도 더 아쉬운 표정을 짓는 쪽은 로아였다. 민망한 손이 습관적으로 목걸이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로아는 그제야 이 목걸이가 에이젠에게 받은 선물인 걸 인지했다.

“참, 이거 돌려줄게.”

손을 목 뒤로 가져간 로아가 목걸이 끈을 풀어내려 했다.

“아니.”

그러나 에이젠이 그런 로아의 팔을 잡아 저지했다.

“그것만은 간직해줘.”

에이젠이 막아서자 로아는 두 손을 내려놓았다. 맞부딪친 시선에서 불안함이 전해졌다. 평온한 줄 알았던 에이젠의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네게 나를 떠올릴 매개체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해.”

“에이젠…….”

그래,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제 그를 거절하면 더는 연이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목걸이까지 없으면, 더는 그를 떠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로아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곤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고서야 에이젠 역시 마음을 놓은 듯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날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고마워.”

로아는 눈꼬리까지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휘어뜨리며 감사함을 전했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로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이젠에게 집중했다. 결혼을 제외한, 자신이 그에게 도움 될 만한 거라면 어떤 것이든 해주고 싶었다.

“뭔데?”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에이젠이 로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로아는 커다란 몸집으로부터 드리워진 그림자에 살짝 위압감을 느껴 뒤로 물러났다.

“가끔은 로아 널 보러 와도 될까.”

로아는 예상치 못한 부탁에 입을 떡 벌렸다.

“친한 친구 정도로는 지냈으면 좋겠는데.”

청혼을 거절했으니 다신 연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정혼자가 아닌 친구로서의 연이라도 이어가려 하다니.

에이젠은 로아의 생각처럼 쉽게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