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38)화 (38/107)

38. 효력을 잃은 점사

에이젠의 두 손이 로아의 손을 감싸 잡았다.

“물론 로아 네가 결혼을 하게 되고 멀리 떠나게 된다면 그럴 수 없겠지만 그전까지만이라도.”

로아는 그 손길을 쉽사리 뿌리칠 수 없었다. 에이젠은 덤덤한 척했지만 그 속에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그의 온기를 더 확실하게 느끼기 위해 두 손을 맞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쓸데없는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상대방을 괴롭게 하는 일이 있을까.

로아는 에이젠에게 잡혔던 두 손을 슬며시 빼냈다.

“당연하지. 언제든 놀러와도 좋아.”

하지만 완고하게 그를 밀어내지는 못했다. 결혼만 하지 않으면 됐다. 그와 연을 완전히 끊을 필요는 없겠지. 이 정도면 잘 타협했다고 생각했다.

불안해 보이던 에이젠은 로아의 허락에 낯빛을 밝혔다. 그는 참 볼수록 진국인 남자였다.

저와 결혼하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바치고 고통과 역경을 견뎌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청혼을 거절하는 로아에게 원망의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허락한 것에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로아는 그런 에이젠을 보며 더욱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바뀐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를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기적처럼 에이젠을 살릴 수 있는 신이 내린 기회. 로아는 저를 지키려다 참혹하게 죽어간 에이젠을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

“그럼 무탈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로아와 이야기를 마친 에이젠은 곧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가족들이 만찬을 대접하겠다고 했으나 급한 일정이 생겼다는 핑계로 일찍이 출발했다. 클라리온 백작에게 혼사 허락을 구할 일도 없으니 당연한 흐름이었다.

로아는 에이젠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성문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로아는 그제야 실감했다. 에이젠과 자신은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씁쓸한 발걸음을 뗐다. 잘한 선택이다. 이걸로 에이젠이 다치지 않을 미래가 될 테니까. 칭송받는 대공으로서 제국에서 훨씬 근사한 여자를 하사해줄 것이다. 황녀와 짝을 맺게 된다면 유다르도 에이젠에게 터무니없는 죄를 씌우려 하지 못할 것이다.

“로아.”

가장 늦게 저택으로 돌아온 로아는 카일론과 마주쳤다.

“트로네 대공님의 청혼을 거절했다면서. 사실이야?”

카일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는 로아가 얼마나 긴 시간을 외롭게 보냈는지 알았다. 그러니 당연히 에이젠을 거절한 걸 의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으응. 그렇게 됐어.”

“2년이나 기다렸으면서 도대체 왜?”

“그냥, 앞으로도 기다릴 일이 많아질 것 같기도 하고…….”

무책임한 핑계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당장 시간이 흘러가는 와중에 이보다 더 현명한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대공님께서 많이 아쉬워하셨어.”

황실을 방문했던 에이젠이 그곳에서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카일론이었다. 전쟁을 끝마치고 그가 가장 먼저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이 로아였기 때문이다. 셰인데릭의 말에 따르면 로아가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혼사도 미루고 있다고 들었다.

긴 기다림 끝에 두 사람이 드디어 맺어지는가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아의 청혼 거절은 다소 느닷없이 느껴졌다.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워서 울기까지 했으면서 왜 그랬어?”

거기다 에이젠을 처음 재회했을 때만 해도 그런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카일론을 비롯한 클라리온가의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로아의 선택에 의아함을 가졌다.

로아는 입이 열 개라도 둘러댈 말이 없었다. 미래를 보고 왔다고 하면 그 누가 믿어주겠는가. 어쩌면 2년 동안 독수공방하느라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린 거 아니냐는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로아가 입을 꾹 다물어버리자 카일론은 더욱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대공님은 더 힘드셨을 거야. 성황리에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쁘셨을 텐데 왜…….”

카일론은 안타까운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로아 역시 사정이 있는 듯 괴로운 표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가장 마음이 아픈 건 당사자일 것이다.

“대공님이라면 나보다 더 좋은 분과 연이 닿을 수 있으실 거야.”

로아는 카일론을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웃으며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난 그 옆을 온전히 버틸 그릇이 될 자신이 없었어.”

자신으로 인해 사랑하는 남자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에이젠이 없는 삶은 당연히 힘들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해도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피곤한데 먼저 올라가서 쉬어도 될까?”

로아는 가족들에게 굿 나잇 인사를 전한 후 발걸음을 돌렸다. 가족들 모두 긴 시간 동안 우울해하던 로아가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당연히 에이젠 대공과 혼사가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청혼을 거절한 로아를 다그칠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슬프고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 목욕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욕실로 들어선 로아는 쥬디의 도움으로 목욕을 시작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쌓였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뭉친 근심거리까지 밀려 나가지는 않았다.

참 기이하고도 믿을 수 없는 하루였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시간이 실존하는 걸까. 다시 잠에 들고 눈을 뜨면 그때로 되돌아가는 건 아닐까.

로아는 턱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탕 속으로 담갔다.

그러고 보니 본래 시간의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에이젠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하지 않겠지. 어쩌면 함께 반역자로 몰려 자신 또한 엄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격하게 저항하다가 위대하신 황태자의 뺨을 내리쳐 사형에 처했을지도. 그나저나 에이젠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죽어버린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로아는 여전히 자신보다 에이젠을 걱정했다.

“아가씨, 수건은 이곳에 놓아두겠습니다.”

욕실로 들어온 쥬디가 새로 가져온 수건을 욕조 근처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어디선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쥬디는 수도가 새고 있는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흑…….”

이번엔 흐느껴 우는 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쥬디가 얼른 로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고개를 숙인 로아의 눈물이 물속으로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쥬디가 다가오자 로아는 무릎을 세워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 속으로 머리를 박고 우는 얼굴을 감추었다.

“흐흑, 흑, 흐읍…….”

아예 울음이 터져버렸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지 않아 답답했다. 로아는 안면근육을 흉하게 일그러뜨렸다. 흐느낌으로 시작한 소리는 이내 엉엉, 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 자상하고 융통성 있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녀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만큼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트로네 대공 저에서 에이젠을 처음 마주했던 날, 사연 있어 보이는 에이젠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힘이 되어주고 싶었고, 실제로 그는 로아의 격려 덕에 훌륭한 기사로 자라나 주었다.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긴 시간 상대방을 그리며 버텨왔으니까.

분명 선한 마음에서 시작된 관계인데 왜 우리가 이런 지옥 같은 시간에 갇혀야만 했을까.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도대체 우리가 왜.

“아가씨. 울지 마세요.”

쥬디는 로아의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목욕을 마쳐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나고도 욕실에선 로아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며칠 뒤, 로아는 벨라니스로부터 온 서신을 받았다. 로아는 과거의 이 날을 기억했다.

「안녕, 로아. 잘 지내고 있니? 무사히 전쟁이 끝나고 전공을 세운 병사들이 황실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네가 기다리는 사람의 특별한 소식은 없었으니 그중에 너의 정혼자도 있겠지? 혹시 좋은 소식 있다면 나에게 가장 먼저 알려줬으면 좋겠어. 그럼 답장 기다리고 있을게!」

에이젠의 청혼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벨라니스에게 가장 먼저 결혼 소식을 알리는 답장을 썼다. 그리고 벨라니스가 살고 있는 루베른 영지에 방문했었다.

에이젠의 청혼을 거절한 지금은 벨라니스에게 무슨 내용의 편지를 써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끄적거리던 로아는 무언가 번뜩 떠올렸다.

「벨라니스. 우리가 안 만난 지 얼마나 됐지? 요즘 하는 것도 없이 적적한데 루베른 성으로 초대해줄 수 있니? 루베른 백작님께도 인사드리고 네가 사는 남쪽 영지도 이곳과 얼마나 다른지 구경해보고 싶어.」

루베른 영지에 방문해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곧 결혼할 예정인데, 행복한 신혼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 같은 관계만 잘 유지했으면 좋겠는데.’

‘이 결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불길한 점사였지만 운명을 정확하게 맞추었던 포춘텔러. 그녀를 다시 만나야 했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그때의 질문도 유효하지 않았다. 결혼만 하지 않으면 에이젠이 무사할 수 있는 건지. 같은 포춘텔러에게서 확답을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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