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39)화 (39/107)

39. 내 매력이 부족한가

늦은 새벽이었다. 에이젠이 트로네 성의 정문을 통과했다. 그가 귀가하기로 정해진 일정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부랴부랴 일어난 소수의 사용인들이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

차갑고 고요한 공기가 그의 서늘한 살갗을 스쳤다. 낮고 묵직하게 떨어진 한숨은 드넓은 공간을 전부 지배할 것처럼 중압감 있었다.

“주인님, 다녀오셨습니까.”

집사 리예드가 에이젠을 맞이했다. 집으로 들어선 에이젠은 답답한 제복부터 흩뜨렸다. 가장 먼저 목을 옥죄는 것 같은 타이를 풀어냈다.

“그, 주인님께서 말씀해주신 일정보다 이르게 도착하셔서 사용인들이 준비를…….”

“됐어.”

리예드는 한 제국의 대공이 돌아온 것치고 휑한 집 안에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일부러 조용히 있고 싶어 이 시간에 귀가했다.

“얼른 목욕 준비부터 하겠습니다.”

하녀들이 얼른 욕실로 들어섰다.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가 향한 곳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위치한 테라스였다. 굳게 닫혔던 문을 열고 나왔다. 바깥의 찬 공기가 뇌 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들어왔다. 테이블 앞에 의자를 두고 앉은 그가 먼 산을 응시하듯 시야를 넓혔다.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은 차마 물러나지도 주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에이젠의 표정은 해탈한 듯 풀려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단단한 팔뚝엔 강인한 핏줄이 꼿꼿이 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가 으득거리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내려쳐 부숴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제 성질을 못 이겨 저번처럼 또 검을 꺼내들어 사용인들을 위협할지도 몰랐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에이젠이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계단의 난간을 따라 올라간 그의 시선이 어느 곳에서 멈춰 섰다. 뒤에 있던 하녀들이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헉’ 하는 소리를 내버렸다.

“리예드.”

에이젠은 곧바로 리예드를 불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한곳에 머무른 채였다. 벽 한쪽을 다 메울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초상화. 마를레나 트로네 부인의 초상화였다.

“부르셨습니까.”

아래층에 있던 리예드가 올라왔다. 에이젠은 리예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여전히 초상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리예드 역시 뒤늦게 그의 시선 끝에 닿는 초상화로 눈을 돌렸다.

“저걸 아직도 내 집에 걸어놓는 이유가?”

“아…….”

마를레나를 내쫓았던 날. 에이젠은 집 안 구석구석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마를레나의 목에 칼을 꽂아 넣고 싶었으나 참느라고 각성한 저 자신을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었다.

마를레나를 내쫓고도 그녀의 흔적이 이 집 안에 남아 있다는 게 몹시 불편했다.

“별다른 지시가 없으셔서 일단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불편하시다면 내일 안으로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

허리를 반쯤 접은 리예드가 사과를 전했다. 긴장한 듯한 그의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데 집에서도 편히 쉴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에이젠은 당장이라도 눈에 보이고 손에 짚이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사용인 중 거슬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에이젠은 로아를 떠올리며 미쳐 날뛸 것 같은 제 성질을 잠재웠다. 이런 상황에서 로아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친절하고 아량 넓은 여인이니만큼 따뜻한 마음으로 모두를 포용했을 것이다. 잔악하게 구는 제 모습을 그녀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에이젠은 다시 고개를 돌려 먼 산으로 시선을 두었다.

“클라리온가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리예드는 화제를 돌리고 싶어 에이젠의 안부를 물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떠올리면 치올랐던 화도 좀 가라앉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청혼을 거절당한 그에게 역효과로 작용했다.

“결혼식을 슬슬 준비하겠습니다. 일정을 말씀해주시면 늦지 않도록 준비를…….”

“거절당했다.”

“……예?”

당연히 혼사가 이루어졌을 거란 안일한 생각은 빗나갔다. 되레 당황한 리예드가 식은땀을 흘렸다. 전공을 세우고 대공 직위로 오른 그가, 제국에서 가장 높은 명예를 따고 많은 재물을 얻은 그가. 한낱 백작 영애에게 청혼을 거절당하리라곤 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이젠은 로아에게 거절당한 것만 떠올리면 한숨이 푹푹 나왔다. 먼 산만 향하던 그의 시선이 창밖의 정원으로 툭 떨어졌다.

지옥 같은 기억만 존재하는 이곳을 가장 먼저 뒤엎으려 했다. 가장 도망치고 싶은 장소였지만, 그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6년 전, 카일론이 꾸려놓은 자연풍경식 정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아는 이 정원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와 처음 만났던 곳 또한 이곳이었기에 에이젠은 섣불리 거처를 옮기지 못했다.

로아가 청혼만 받아준다면 그녀만을 위한 신혼집을 꾸리려 했다. 내부야 얼마든지 뜯어고치면 다른 집처럼 바꿀 수 있으니까. 그러나 꿈같이 부풀었던 계획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솔직히 이렇게 되리라고 조금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명예와 심장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면서 우아하게 데려올 생각에 들떠 있었다.

“리예드.”

착잡한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리예드를 불렀다.

“내 어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나.”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리예드는 고민해볼 겨를도 없이 에이젠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부족하다니, 주인님께 그런 게 있을 리 없습니다.”

본인이 생각해도 그랬다. 분명 로아는 ‘멋진 기사님’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처음 기사를 서임받고 그녀를 찾아갔을 때도 얼굴을 붉히며 제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그걸 부끄러워서 그랬다는 건 제 착각이었던 건지.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 날 거절했을까.”

으득, 이번에도 그가 턱에 힘을 주어 이가 갈리는 소리를 냈다.

“그 이유가 미치도록 궁금하단 말이지.”

단순한 기사님을 넘어서 드높은 업적을 세워버린 게 잘못이었을까. 적절한 선을 지켰어야 했던 건가.

그러나 이는 스스로 원한 게 아니었다.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제국의 인정을 받는 위치에 올라선 후였다. 그녀를 얻기 위해 미쳐 날뛰어버린 게 결국은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 셈이었다.

“그, 글쎄요. 주인님께선 부족한 게 절대 없으십니다.”

리예드는 신경이 날카로운 에이젠이 두려웠다. 또 언제 사용인들을 향해 칼부림을 저지를지 모를 정도로 그는 위태로웠다.

“현재 제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장군이시기도 하고, 부와 명예, 권력까지 지니셨으니…….”

청혼이 받아들여지고 혼사가 결정되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착잡한 건 리예드를 비롯한 트로네가의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로아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던 거야.”

그러나 리예드의 아부에도 에이젠은 착 가라앉은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달빛이 유난히도 휘영청 빛을 내는 새벽이었다. 고개 숙인 에이젠은 유리 테이블에 비친 제 얼굴을 내려다봤다.

“내 매력이 부족한가.”

그는 제 얼굴을 유심히 보며 한 손으로 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래, 그 눈. 그 여자의 소름 끼치는 눈을 꼭 닮은 네 눈을 볼 때마다 불길함을 견딜 수 없었다.’

유리 테이블에 비친 제 눈동자를 응시했다.

마를레나는 제 눈이 불길하다며 싫어했다. 붉은빛이 감도는 것은 헤이든 제국에서는 흔치 않은 유전자였다. 처음 트로네 대공가로 들어오기 전 친모와 함께 길거리를 나돌 때만 해도 그랬다. 또래의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은 그의 붉은 눈동자가 무섭다며 알게 모르게 피하곤 했다. 간혹 용감한 녀석들로부터 이유 없이 돌팔매질을 맞기도 했다.

혹시 이 눈동자 때문인가. 로아도 속으론 그들처럼 이 눈을 무섭다 생각했을까. 상대방을 잘 배려하는 착한 심성을 가진 그녀라면 그렇게 생각하고도 겉으로 티 내지 않았을 것이다.

“리예드.”

에이젠은 뒤쪽에 서 있는 리예드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리예드가 바로 앞까지 왔을 때 에이젠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응시했다.

“네가 봐도 내 눈동자가 불길해 보이나.”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두 눈동자는 섬찟하기 그지없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정하는 말을 하면서도 리예드는 고개를 푹 숙여 그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내 눈을 잘 마주치지도 않는 걸 보니 거짓말인가 봐, 리예드.”

에이젠이 입매를 비스듬히 틀어 올려 피식거렸다. 그러다 일순 웃음기를 지워냈다.

“아냐. 로아는 그렇지 않았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무서워해도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에이젠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언젠간 제국에 없어선 안 될 귀한 인재가 될 날이 분명 올 거야. 그땐 트로네 대공님도 마를레나 부인도 에이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걸?’

‘나도 에이젠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었어. 이렇게 멋진 기사님이 되어 내 호위기사가 되고 싶다고 나타날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모든 사람이 저의 눈동자만 보고 불길하다 여겼을 때, 유일하게 제 눈을 들여다봐준 아이였다.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고, 그보다 더 따뜻한 말로 버림받은 제 영혼을 위로해주던 여자. 그런 로아가 다른 사람들처럼 고작 그딴 이유로 저를 밀어냈을 리 없었다.

‘아무래도 에이젠과 결혼할 순 없을 거 같아.’

분명 더 고차원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로아가 저를 밀어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

“내가 없는 동안 클라리온 백작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해서 보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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