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40)화 (40/107)

40. 무엇이 궁금하여

루베른 영지로 떠나기 전. 로아는 이른 새벽 눈을 떠 나갈 채비를 했다.

“쥬디. 소매는 짧은 걸로 준비해줘.”

“네.”

“이것도 소재가 너무 두껍잖아. 더 얇은 걸로.”

“이것보다 더요? 아직 아침이라 쌀쌀하실 텐데요.”

쥬디는 이곳의 기후만을 생각해 적당한 드레스를 골라왔다. 그러나 로아는 루베른 영지가 얼마나 더운 곳인지 알았다. 같은 땅덩어리라 이곳과 차이 나면 얼마나 나나 싶었지만, 도착하자마자 땀을 뻘뻘 흘리며 후회했던 기억이 났다. 기온이 높은 걸 떠나서 인근에 바다가 있는 지형이라 습하기까지 했다.

“루베른 영지는 최남단에 위치한 곳이라 무척 더울 거야. 양산도 이것보다 더 큰 걸로 부탁해.”

“알겠습니다.”

로아의 단호한 지시에도 아직 루베른 영지의 기후를 겪어보지 못한 쥬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마차에서 내린 로아는 뜨거운 루베른 영지의 햇살을 두 번째로 맞았다. 한 번 겪은 적 있어 최대한 통풍이 잘되는 옷을 골라왔는데도 강렬한 햇살은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로아, 어서 와!”

예상대로 벨라니스는 환하게 웃으며 로아를 맞이했다. 그의 남편 루베른 백작도 함께였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베른 백작 부인.”

로아는 유일하게 그때와 같은 인사를 건네며 어색함을 풀려 했다.

“로아 네가 그렇게 부르니 어색하잖아. 우리끼린 편하게 불러도 된다니까.”

낯간지러운 장난에 벨라니스의 반응 역시 똑같았다.

시간이 되돌아온 걸 아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저뿐이다.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시간이 되돌아온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때와 같은 말을 하면 모두가 예상되는 반응을 했다. 반대로 다른 말을 하면 미래가 조금씩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에이젠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었다.

“우리 영지에서만 특별히 재배되는 차를 준비해드릴게요, 레이디.”

벨라니스가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 때마다 흥미를 갖지 못했다. 한 번 겪어본 적 있는 시간, 피부로 느껴본 적 있는 루베른 영지의 기후, 마셔본 적 있는 독특한 맛의 허브티.

로아는 왜 다시 시간이 되돌아왔는지, 어떤 원리가 작용한 건지 골똘히 생각했다.

벨라니스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로아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로아. 이 그늘막 신기하지 않아?”

혹시라도 기분이 울적한 건 아닐까. 벨라니스는 로아를 웃게 해주고 싶어 애를 썼다.

“응. 그러네. 엄청 크다.”

그러나 로아는 테라스 테이블의 큰 그늘막도 본 적 있는 것이었다.

“이거보다 더 커질 수도 있어. 보여줄게.”

벨라니스가 그늘막이 변형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겪었던 대로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이 시간에서 벨라니스가 그늘막이 움직이는 걸 보여주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뭐지? 왜 벨라니스가 과거엔 안 하던 일을?

로아는 의아한 눈으로 벨라니스의 움직임을 주목했다. 벨라니스가 급하게 일어난 바람에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휙 넘어갔다.

“어, 여길 누르는 거였나?”

이것저것 만져보던 벨라니스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다 쓰러진 의자의 다리를 밟고 휘청거렸다.

“아!”

“벨라니스!”

잽싸게 일어난 로아가 벨라니스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녀의 팔과 허리를 잡아주었다. 넘어질 뻔했던 벨라니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로아 덕에 벨라니스는 겨우 테이블을 짚었지만, 그 반동으로 로아가 철퍼덕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미, 미안해. 로아, 괜찮아?”

벨라니스는 제 뒤로 넘어진 로아를 일으키려 했다. 겨우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난 로아가 잔뜩 화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조심해야지. 홑몸도 아니면서!”

“……어?”

임신한 벨라니스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놀라 과하게 몸을 던져버렸다. 그러나 벨라니스는 의아한 듯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저도 모르게 성을 내버렸으나 로아는 뒤늦게 말실수한 것을 깨달았다. 아직 벨라니스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밝히지 않은 시점인 것을.

“아, 아니. 이맘때쯤이면 아이를 가졌겠다 싶어서……, 해본 말인데 진짜 임신했어?”

머쓱하게 웃으며 일어난 로아가 치맛자락을 탈탈 털었다.

“응. 알아맞혀서 깜짝 놀랐어. 다칠 뻔했는데 덕분에 무사했어. 고마워.”

로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벨라니스가 왜 과거에 안 하던 행동을 할 걸까. 로아는 이곳에 방문했던 그 날을 차근차근 떠올려봤다.

그땐 벨라니스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심조심 걷는 벨라니스의 걸음걸이를 보고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그러나 오늘의 로아는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걸음걸이를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벨라니스와의 대화에 집중하지 않고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가지 결론이 났다. 벨라니스가 그때와 다르게 행동한 원인은 바로 저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때와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해야, 벨라니스도 똑같이 할 것이다. 이 시간의 결과를 결정짓는 건 결국 제 몫이었다.

그래, 이 세계에서 바꿔야 할 것은 에이젠을 살리는 것뿐이다.

괜히 다른 상황의 변수를 만들면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려놓아야만 원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나도 만져봐도 돼?”

한 순간도 오차를 만들어선 안 됐다. 의자를 당겨 앉은 로아는 최대한 그때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려 했다.

“그럼.”

손을 뻗어 벨라니스의 배를 만졌다. 예상했던 대로 알맞은 타이밍에 태동이 느껴졌다.

“방금 움직인 거지?”

“엄마와 가장 친한 친구인 걸 알아본 걸까? 널 환영해주나 봐.”

로아는 그다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소백작님일까? 아니면 레이디?’

성별이 무엇일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로아는 이 아기의 성별이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조용히 손길을 거두었다.

벨라니스는 또다시 어두워진 로아의 안색이 걱정스러웠다.

“로아 너도 머지않았어.”

벨라니스는 로아를 위로하듯 팔을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벨라니스의 목소리 톤이 전과 미세하게 달랐다. 그땐 루베른 영지에 방문하기 전부터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벨라니스는 로아를 배려하기 위해 먼저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 모양이었다.

“맞다. 어제 산책 나갔다가 들었는데 성내에 미래를 점 쳐주는 점성술집이 하나 생겼다나 봐.”

그래도 나름대로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로아가 이곳에 온 최종 목적지. 자신의 노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 그 포춘텔러에게서 확답을 듣고 싶었다.

“보러 가자.”

“응?”

벨라니스는 곧바로 제안을 받아들이는 로아에 얼떨떨해졌다. 로아의 취향이 어떨지 몰라 조심스레 물었는데 마치 예상한 듯 간결한 대답이 나와서였다.

의아함을 품은 벨라니스에 로아는 또 한 번 아차 싶었다. 자연스럽게 흐름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자꾸만 상대방이 의구심을 품을 만큼 부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점성술에 관심 많았거든. 우리 영지엔 볼 만한 데가 없어서.”

로아는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다.

“원래 관심이 있었구나. 다행이다.”

끼워 맞춘 대답에도 벨라니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저택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성내로 나갈 준비를 했다.

“난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 잘 태어날지 이런 게 물어보고 싶어.”

벨라니스는 벌써부터 들뜬 모습이었다. 드레스룸으로 들어선 로아는 다른 것보다도 챙이 넓은 모자들 위주로 봤다. 전엔 이 중에서 아무거나 골랐었다. 그러나 오늘은 신분과 얼굴을 톡톡히 가릴 수 있는 챙이 가장 큰 것으로 골랐다.

“로아는 뭐가 궁금해?”

벨라니스의 해맑은 물음에도 로아는 함께 웃어주지 못했다. 아무래도 불길한 기분 때문이었다.

악담을 퍼붓던 점성술집을 다시 찾아가야 하는 기분이란…….

아무래도 달갑지는 않았다.

“그건……, 가면서 생각해볼래.”

***

점성술집이 있다는 곳 위치에 마차를 멈춰 세웠다. 바깥으로 내어놓은 입간판도 하나 없는 곳이라 처음 방문한 사람은 이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로아는 위치를 정확히 기억했기에 확신에 찬 걸음으로 점성술집을 찾아냈다.

“와, 사람 많다.”

마찬가지로 천막 안쪽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신기한 얼굴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벨라니스와 달리 로아는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곧 그녀들의 순번이 돌아왔다. 포춘텔러가 있는 더 깊숙한 쪽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한 번 불길한 점사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묵직한 기운에 짓눌린 기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로아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훨씬 긴장한 채로 들어섰다.

“무엇이 궁금하여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챙이 넓은 모자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로아는 살짝 고개를 들어 포춘텔러를 흘겼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벨라니스가 아닌 제 쪽으로 향해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 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왜 날 보고 있지?

그때는 포춘텔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터라 몰랐다. 단순히 손님을 바라보는 시선일지도 모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쾌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