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머지않은 시일 내에
로아는 긴장한 내색을 지워냈다. 아무리 챙이 넓은 모자로 가린다 한들, 그녀는 두 사람이 귀족인 것을 한 번에 꿰뚫어 본 점쟁이였다.
큼- 하는 헛기침 소리를 낸 벨라니스가 먼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아이를 가진 지 여섯 달 정도가 되었어요. 이 아이의 성별은 무엇일지,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가 궁금해요.”
벨라니스는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거리며 먼저 질문했다.
“성별이라……, 아이가 태어나면 저의 점성술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는 질문이군요.”
양손으로 수정 구슬을 문지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따위를 중얼거린 포춘텔러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로아는 점성술을 보는 듯한 포춘텔러보다 더 빨리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결과는 아마도 아들.
“아빠를 닮아 아주 용감하고 멋진 남자아이입니다.”
그리고 포춘텔러에게서 예상 가능한 대답을 들었다.
“와, 정말요?”
벨라니스가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로아는 벨라니스에 비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포춘텔러의 시선은 흘기듯 떨어지더니 로아를 향했다. 또 눈이 마주칠 뻔했다. 로아가 얼른 고개를 숙여 제 얼굴을 가렸다.
“친구분은 무엇이 궁금하여 따라오셨습니까?”
방심하면 안 됐다. 뭐든 쉽게 내다보는 사람이기에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도 알아차릴지 모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에게만큼은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것조차 들킬지 모른다.
로아는 입을 열기 전 몇 번이고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했다. 최대한 잡념을 없애는 게 이 포춘텔러에게서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지그시 눈을 감은 로아는 이때 포춘텔러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앞두었는데 행복하게 부부 관계를 원만히 유지할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NO.
‘본래 부부란, 이 기운이 서로에게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자분의 기운이 너무 강해요. 남편이 펼쳐야 할 기운까지 전부 억누를 정도로 강합니다.’
‘이 결혼을 원인으로 죽음에까지 이를 운명으로 보입니다.’
‘남편 될 분을 정말 사랑하신다면, 그리고 제국을 위하고 싶으시다면 이 결혼을 하지 않으시길 권고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결혼 후 남편 에이젠은 죽었다. 제 눈앞에서 아주 무참히, 참혹하게. 아찔한 기억까지 함께 떠오른 로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치채셨다시피 저는 귀족입니다. 그런데 혼사에는 영 관심이 없습니다.”
벨라니스는 로아의 서두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제가 혼사를 이루지 않고도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가 궁금하네요.”
미래는 바뀔 것이다. 그와 결혼하지 않을 거니까. 그는 죽지 않을 것이고, 로아는 그가 없는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이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포춘텔러는 이번에도 수정 구슬을 문지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당신의 운명을 점쳐보았습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어떤 결과가 되든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감내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포춘텔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로아는 그 불안한 기운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죽을 거라는 점사를 받았을 때도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왜지, 왜? 그의 청혼을 거절했으니 그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인데.
그러나 포춘텔러는 이번에도 극단적인 결과를 내어놓았다.
“당신은 혼자서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운명입니다.”
점사를 들은 로아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박동이 점점 증폭되어 고막 바로 옆에서 저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이미 혼기는 지난 거 같군요. 안타깝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없다면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단명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면 그 남자가 죽는다더니, 그와 결혼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단다. 로아는 생각지도 못한 점사에 혼이 나가버렸다.
“귀족의 자제분께서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애석한 운명을 믿는다면 결혼을 하는 게 좋겠군요.”
챙이 넓은 모자로 철저히 얼굴을 가렸건만 이제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건 말건 포춘텔러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에 넘치도록 당신을 사랑해줄 그런 남자, 당신과 멀지 않은 곳에 있잖아요?”
미스터리하게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포춘텔러 역시 로아를 피하지 않고 제대로 바라봤다.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를 보자 로아는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점사를 봐주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마치 모든 운명줄을 제 손에 쥐고 장난치는 절대자인 것처럼 남의 불행한 점사에 씩 미소 지었다.
이 포춘텔러의 점사가 안 맞을 리 없었다. 미래에서 온 로아는 모든 걸 직접 겪었기 때문에 알았다. 벨라니스의 아이도 아들이었고, 저와 결혼한 에이젠도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는다는 점사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허탈한 듯 넋을 놓은 로아를 대신해 벨라니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주 무례한 여자로구나. 아무리 점사라도 이건 악담이나 다름없지! 어서 나가자!”
로아보다 더 성을 낸 벨라니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점성술집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올라타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로아.”
그 정적을 먼저 깨뜨린 건 벨라니스였다.
“네가 불편해할까 봐 묻지 않았었는데 점사 결과를 듣고 나니 나도 좀 걱정이 돼서.”
포춘텔러에게 들었던 말이 실감이 되지 않아서인지 로아는 별다른 타격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에이젠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제 이름을 불러가며 죽어가는 모습을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저번에 말했던 에이젠 경……, 아니, 트로네 대공님과의 혼사는 왜 거절한 거야?”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 실례될까 묻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 속 벨라니스는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청혼을 거절한 사실을 자신보다 포춘텔러에게 먼저 말하다니. 아무리 이번 생은 에이젠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지만 주변을 너무 둘러보지 못했다.
“좋아했잖아. 전장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 같다면서 기뻐했잖아. 난 당연히 네가 트로네 대공님의 청혼을 받아들일 줄 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벨라니스.”
좀 더 앞선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 게 한이었다. 그가 전장에서 막 돌아왔을 때 너무 기뻐서 여기저기 소식을 퍼뜨린 게 이렇게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로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벨라니스를 위로했다. 단명할 운명은 본인인데, 어째서 무던한 저보다 친구인 벨라니스가 더 유난을 떠는지. 새삼스럽게 좋은 친구를 곁에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아.”
작심한 듯 단호한 로아의 목소리에 벨라니스는 더는 물을 수 없었다.
“트로네 대공님은 잘 이해하셨어?”
로아가 간절히 올리는 그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의외로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로아 네 생각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는 저의 행복이 우선이라며, 자신이 감히 저의 행복을 빼앗을 순 없다며 신사답게 물러났다. 로아는 그런 에이젠을 더더욱 죽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응. 사이 좋은 건 변하지 않았어. 친구로 지내기로 했거든.”
그게 비록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
“주인님.”
리예드가 에이젠의 집무실 문 앞에서 노크를 했다. 안쪽에서 사용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조사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창밖을 보고 있던 에이젠이 의자를 돌려 리예드를 바라봤다. 그가 몇 장의 종이에 정리해온 서류 파일을 넘겼다.
“클라리온 영지와 주변 지역까지 기사를 탐문했습니다. 친분을 유지하는 다른 가문들, 성내 상인들, 클라리온 백작 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까지도 인터뷰하였습니다.”
신빙성 있는 자료를 위해 철저히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레이디 클라리온께선 주인님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셨다 합니다. 친한 친구인 루베른 백작 부인께서 정혼자를 주선해주려 했으나 이 또한 거절하셨다고도 합니다. 매일 매일 주인님의 소식을 기다리느라 우울증이 심해져 의사를 찾아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에이젠은 뒷조사를 하면 로아가 따로 만나고 있는 다른 남자가 있거나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리예드가 가져온 자료는 정반대였다.
“주인님이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평소엔 사용인들에게 매우 온화하신데, 주인님 방문 일정이 잡힌 뒤론 가사일에도 직접 거들 정도로 상관하셨다 합니다. 성내 양장점을 전부 뒤져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로만 여러 벌 공수해오고, 식재료도 귀한 것으로만 직접 골랐다고 하십니다.”
만나기 직전까지 저를 그리워했다면서 도대체 왜? 심도 있는 조사 결과 그녀가 저를 밀어낸 이유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서류 파일을 내려놓은 에이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이 시간에 어딜…….”
“클라리온 영지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