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42)화 (42/107)

42. 아쉬워?

클라리온 성으로 돌아오는 동안 로아는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없다면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단명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그런 점사가 나올 수가 있지? 로아는 되뇔수록 이상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맺어지면 남자가 단명하고, 맺어지지 못하면 여자가 단명한다.

이런 식의 점괘는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있는가.

점사를 들을 당시에는 얼떨떨했지만, 이제 와 실감이 됐다.

정말 자신은 단명하게 될 것인가?

만일 그렇다 해도 로아는 자신의 판단을 뒤집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조금 두려울 뿐이었다. 곧 저에게도 비극적인 운명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가씨. 성에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한 걸음 내디딘 로아는 자신을 마중 나와준 가족들을 마주했다.

“루베른 백작 부인은 잘 만나고 왔니?”

클라리온 백작이 온화한 미소로 로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로아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선물이 도착했던데.”

선물이라니…….

로아는 잠시 어리둥절해했다가 과거의 이날을 떠올렸다.

“응접실에 가보렴.”

벨라니스를 만나고 클라리온 성으로 돌아온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에이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땐 청혼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이 결혼을 앞두었을 때였다. 분명히 청혼을 거절했기에 그가 이렇게 불쑥 찾아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로아는 두 손으로 긴 치맛자락을 잡고 응접실을 향해 뛰었다.

하녀들이 그녀의 뒤를 잽싸게 쫓았지만 가로지를 순 없었다. 응접실 앞에 멈춰선 로아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안엔 정말로 에이젠이 점잖이 앉아 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크도 없이 문부터 열렸다. 그 열린 문 뒤론 헐레벌떡 뛰어온 로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에이젠은 경우 없는 상황에도 반달 모양으로 두 눈을 휘어뜨리며 웃어 보였다.

“로아.”

기다렸단 듯 그의 입꼬리가 부드러이 호선을 그렸다.

“에이젠?”

로아는 그를 마주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에이젠이 도대체 왜? 확실히 거절했는데 어째서 그때와 같은 흐름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야?”

로아는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용건부터 물었다. 그러나 다급한 로아의 물음과 달리 에이젠의 대답은 느긋했다.

“방문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와서 미안해. 이동하던 루트 중에 즉흥적으로 들러봤어.”

로아의 앞으로 걸어온 그가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로아가 너무 보고 싶었거든.”

로아의 손을 잡아 제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등 위로 저의 입술을 가벼이 짓눌렀다. 로아는 저의 손등에 내려앉은 그의 입술을 보고도 불편한 미간을 펴지 못했다.

“친구잖아.”

친구로 지내자는 게 이런 말이었을까. 언제든 만나고 싶을 때 만나자는? 아니, 그래선 안 됐다. 그의 얼굴을 보면 당연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저에게 미련 가득한 눈으로, 간절히 떨리는 목소리로 수도 없이 구애하면 넘어가고 말 것이다.

이런 게 그가 말한 ‘친구’라면 이 관계조차 유지해선 안 됐다.

“에이젠, 이러지 마.”

로아는 그에게 잡혔던 손을 단호히 빼버렸다.

“우리 결혼할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연인같이 구는 건 좀……, 그렇잖아.”

에이젠은 로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지 않았다. 꼭 말 못 할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저를 밀어내는 로아의 완강한 거절에도 에이젠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부담 느꼈다면 미안해.”

사과의 말을 전한 그는 로아의 옆을 지나쳐갔다. 그의 눈을 피하던 로아는 시야에서 사라진 에이젠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쳐 지나간 그를 따라 몸을 휙 돌렸다.

“돌아갈게.”

“뭐?”

에이젠은 생각보다 쉽게 포기했다. 휙휙 변하는 그의 태도에 놀란 건 오히려 로아였다.

“잠깐, 에이젠.”

응접실 밖으로 나가려던 그의 팔을 붙잡았다. 에이젠은 로아에게 당겨지는 대로 뒤를 돌았다. 저를 붙잡은 그녀의 작은 두 손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이 서서히 움직였다. 로아의 손가락, 손목, 팔목을 따라 올라가 마지막엔 불안하게 파들거리는 표정에까지 다다랐다.

로아는 저도 모르게 에이젠을 붙잡아버렸다. 그 뒤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교차하는 모순적인 감정이 괴로웠다. 그를 밀어내야 하는 걸 머리론 알고 있었으면서, 몸은 쉽게 머리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좀…….”

에이젠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푹 숙이고 있던 로아의 눈을 마주 보려 했다. 시야에 걸린 그의 얼굴에 로아도 서서히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어떡할까, 그럼.”

시선이 맞물리자 로아는 얼른 그를 붙잡았던 두 손을 거두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붉은 눈동자, 날카롭게 떨어지는 콧대와 턱선, 그 밑으로 힘줄이 곧게 선 목덜미. 잠깐 닿았을 뿐인데도 느껴졌던 단단한 팔, 매력적인 흑발까지.

로아가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잠시 그녀의 이성을 잃게 할 정도였다.

“내가 여기 더 있다 가도 돼?”

그래서 그를 잡고 있을 수 없었다.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박동의 전율이 손가락 끝까지 전해져 그가 제 마음을 알게 될까 봐.

뒤늦게 정신 차린 로아는 인지하지 못한 새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왔으니까 차라도 마시자.”

여전히 그와 함께하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그래, 친구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어차피 결혼할 것도 아니니까. 이 뒤부턴 명확하게 선을 그으면 돼. 나만 정신 차리고 넘어가면 돼.

로아는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중정에 차를 준비해놓겠습니다.”

하녀들이 자리를 준비하러 나갔다. 둘만 남겨지자 널따란 공간에 어색한 공기가 가득 메워졌다. 로아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앞으론 이렇게 불쑥 찾아오고 그러지 마.”

열이 오른 것처럼 두 뺨이 불그스름해졌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를 보며 설핏 웃음을 흘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로아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헝클듯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알겠어.”

중저음의 목소리는 퍽이나 다정했다. 홧홧거리는 게 거울을 보지 않아도 붉어졌을 제 얼굴이 예상됐다. 로아는 수줍은 모습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러나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것까지 철저하게 가리지 못했다.

하녀들이 중정 테라스에 두 사람을 위한 티타임을 준비해두었다. 마주 앉을 때까지 로아의 뺨은 가라앉지 않았다. 매끄럽게 떨어진 목덜미 라인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드레스 안쪽으로 숨겨두었지만 붉은 빛깔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아마 루비 펜던트일 것이다. 그것을 본 에이젠이 피식거렸다.

로아는 그가 왜 웃는지 알지 못했다. 평소엔 무표정일 때가 더 많은 그가 피식거리며 웃어대는 건 참으로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넋 놓고 바라보고 싶다가도 방심한 틈에 제 마음을 들켜버릴까 겁이 났다.

“언제 출발해야 해?”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화젯거리를 던졌다.

“내일 아침이 되면 바로 가야 해.”

알고 있었다. 그는 곤히 자는 저를 일부러 깨우지 않고 먼저 나가버렸었으니까.

“그리 오래 머물진 못하는구나.”

에이젠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렸다. 턱을 괴고는 로아를 좀 더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로아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허리를 꼿꼿이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아쉬워?”

빙긋 웃는 그는 여전히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분명 청혼을 거절했고, 그의 마음을 밀어내고 있는데도 그는 조금도 기죽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이 관계에 우위를 차지한 것처럼 마치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아니.”

그 때문에 되레 약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이젠은 로아가 시선을 피한 사이 날카로워진 눈매로 그녀의 모든 것을 훑었다. 회피하듯 사라진 그녀의 시선이 어디에 닿을지 몰라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도, 초조한 듯 양손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도.

“루베른 성에 다녀왔다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자신이 어떤 흑심을 품고 그녀를 살피는지 알지 못하게 했다.

“응. 친구가 거기 있어서.”

“어땠어. 가본 적 없는 곳이라 궁금해서.”

과거에 에이젠과 루베른 영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겐 똑같이 대해도 에이젠에게만큼은 다르게 대하는 만큼 상황이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로아는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최남단 지역이라 기후가 여기랑 완전 달라. 하늘이 엄청 맑고, 거기서만 재배되는 과일이나 차도 많았고…….”

로아는 루베른 영지에서 보냈던 일과들을 떠올렸다. 회상하듯 하늘을 보며 말하던 로아의 시선이 어느 순간 툭 떨어졌다. 에이젠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또?”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땐 하늘을 보지만 무언가 꿍꿍이를 꾸며낼 땐 땅을 바라본다. 사소한 동작이나 제스처로도 상대방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특화된 그에겐 로아의 심리가 투명하게 보였다.

“성내엔 나가 봤어?”

가볍게 던져본 질문에 로아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굳혀버렸다.

“……아니.”

낮게 가라앉은 제 목소리에 놀란 로아가 재빨리 억지웃음을 지었다.

“뭐, 별거 안 했어. 어딜 돌아다니기엔 너무 후덥지근해서. 그냥 저택 안에서만 놀았어. 신기한 포도 같은 게 있었는데…….”

에이젠의 시선은 급하게 종알거리는 로아의 입술로 떨어졌다.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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