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43)화 (43/107)

43. 변수

해가 기울어질 무렵에야 두 사람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발해야 하는 거지?”

“아마 새벽에 나갈 거야.”

로아는 에이젠과 응접실 앞까지 동행했다. 하녀들은 이미 그가 편하게 잠자리를 이룰 수 있도록 정리를 마친 채였다. 방을 둘러본 로아가 다시 에이젠의 앞으로 왔다.

“지금 자도 조금밖에 못 자겠는걸. 어서 잘 준비하는 게…….”

“로아.”

에이젠은 로아의 인사말을 잘라내고 중간에 끼어들었다.

“응?”

고개를 든 로아가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시선이 맞물리고도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로아를 내려다봤다. 분위기가 기묘하게 흘러갔다. 그 붉은 눈동자의 빛을 한몸에 받고 있자니 주변 공기가 후덥지근해진 것 같기도 했다. 몸 둘 바를 모르면서도 로아는 에이젠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던 그가 먼저 한 걸음 내디뎠다. 뒤로 물러나면 피하는 것처럼 보일까 로아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긴장돼 목이 빳빳해지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로아를 향해 뻗은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리칼로 향했다. 축 늘어진 긴 머리칼을 예민한 손끝으로 건드리더니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애써 숨기려 했던 그녀의 표정이 다 드러났다. 말로는 무언가 아끼고 있어도 빨개진 귀까지 숨기진 못했다.

에이젠은 허리를 숙여 드러난 로아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로아는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예민한 부위에 입술이 닿을 줄 알았건만 딱 그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에이젠은 입을 열었다.

“내일 새벽에 배웅해줬으면 하는데.”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은밀하게 고막으로 흘러들어왔다.

“아…….”

숨 막힐 것 같은 순간에 로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도 모르게 떡 벌어졌을 입이 흉할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왜 이번에도 에이젠이 전과 다르게 행동하는 걸까.

전에 그는 잠든 로아를 깨우지 않고 인사도 없이 먼저 가버렸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서 직접 배웅해달라는 부탁을 하다니.

여전히 에이젠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방심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부 알고 있는 이 시간 속, 유일한 변수가 바로 에이젠이었다.

“알겠어. 일찍 깨워달라고 미리 말해둬야겠네.”

로아는 황급히 고개를 비틀었다.

“그럼 잘 자, 에이젠.”

저녁 인사를 마친 로아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에이젠은 사색에 잠겼다.

똑똑.

로아가 나간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달칵, 열린 문틈 뒤에 서 있던 사람은 로아의 하녀 쥬디였다. 용건이 생각난 에이젠이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마침 잘 왔어. 여기서 급하게 저택으로 서신 하나 보내려고 하는데.”

에이젠의 시선은 쥬디가 들고 있던 트레이로 툭 떨어졌다. 수북이 쌓인 서신과 빳빳한 새 종이, 그리고 만년필이 있었다.

“여기 있는 것 사용하시면 됩니다. 다 쓰시고 저한테 주시면 부쳐드리겠습니다.”

에이젠이 종이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는 트레이 한편에 있던 서신 뭉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장 위에 있던 서신의 실링왁스가 눈에 익은 것이었다.

“그건?”

턱짓으로 가리켜 물었다.

“이건 아가씨 앞으로 온 서신들입니다. 아가씨는 항상 방에서 서신을 읽고 답신까지 쓰셔서 나오시면 드리려고 했습니다.”

쥬디는 로아가 이곳에서 나간 걸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로아가 이 방에 있다고 착각해 그녀에게 가져가야 할 것들을 이리로 가져왔다. 에이젠은 쥬디의 트레이를 통째로 받아들었다.

“로아는 지금 잠들었어. 나한테 주면 내가 전달해주지.”

쥬디는 인사를 꾸벅 남긴 채 문을 닫고 나갔다.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에이젠은 가장 거슬렸던 봉투를 집었다. 황금빛 실링왁스는 제국에서 황실만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

다음 날 이른 새벽. 로아는 잠든 지 세 시간 만에 몸을 일으켰다. 사용인이 저를 깨우러 들어오기도 전이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환복한 로아가 계단을 내려왔다.

“일찍 일어났네, 로아.”

아직 다른 가족들이나 그가 데려온 사용인들도 나오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에이젠 역시 로아처럼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있었다.

“아직 여유 있는데 새벽 숲이라도 산책 다녀올래?”

에이젠이 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둘만이 보내는 시간. 가장 치명적인 시간이었다. 밀어내야 할 걸 알면서도 로아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이게 정말 마지막. 마지막으로 그와 오붓하게 걷는 시간 정도는 스스로에게 허용해주고 싶었다. 과거엔, 전날에 에이젠과 함께 숲을 걸었는데 이번엔 시간이 달라졌다.

쨍한 대낮이 아닌 고요하고 습한 새벽. 서로와 함께할 밝은 미래를 기대하던 그때와 달리 이젠 감정적 이별을 앞둔 두 남녀였다.

바깥으로 나오자 으슬으슬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로아는 숄 카디건을 끌어당겨 앞섶을 여몄다.

“추워?”

에이젠은 로아에게 답을 듣기도 전에 겉옷을 벗었다.

“아, 아냐. 괜찮…….”

로아는 에이젠의 호의에 양손을 마구 휘저으며 거절했다. 뒤로 물러나던 로아는 푹 꺼지는 낙엽의 어딘가를 잘못 디뎠다.

“앗!”

에이젠이 벗은 겉옷이 공중에서 펄럭거렸다. 부드러운 안감이 재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휘감듯 감쌌다. 그의 옷에 둘러진 채로 에이젠이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뒤로 넘어질 뻔한 것을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다칠 뻔했어.”

에이젠은 겉옷으로 로아를 감싼 채 제 앞으로 바투 당겼다. 마치 그의 품 안에 안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앞에 그의 얼굴이 있었고, 손에 짚이는 것은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었다. 어깨 뒤로도 그의 체취가 묻어난 옷이 있었다.

“조심해.”

차가운 이슬이 발목에 닿았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랐다. 그러나 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그의 다정한 음성과 따뜻한 숨결이 모든 걸 잠재웠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냥 이대로 그에게 계속 안겨있고만 싶었다.

“고마워.”

로아는 이번에도 에이젠을 밀어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달리 어금니를 꽉 깨문 채였다.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한 그의 품에 안겨 모든 걸 털어놓아 버리고 싶었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잠시 들었다.

“로아.”

에이젠은 밀어내는 로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손목에서 저리는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 그러쥐었다. 로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정말 내가 싫어?”

잡힌 손목에서 힘이 점차 빠져나갔다. 통증은 덜어졌지만 느슨해지는 그의 손이 떨어져 버릴까 두려웠다. 아직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게 설령 고통을 동반해야만 하더라도.

“싫다고 한 적 없어.”

소심하게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의 청혼을 거절했을 뿐. 차마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그럼 무슨 일 있어?”

에이젠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로아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위태로워 보여.”

아, 너무 티가 난 모양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를 밀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부부의 연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를 멀리서 응원해주는 친구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욕심인 줄 알면서도 그를 향한 연모의 마음을 한순간에 짓밟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점들이 그에게 수상해 보일 만한 미끼를 던져준 셈이었다.

난 진심으로 널 밀어내는 게 아니야.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어.

로아는 입을 제외한 모든 걸로 그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너의 친구로서, 마음고생하는 일 있다면 들어주고 싶어.”

에이젠은 그러쥐었던 로아의 손목 위에 입을 맞추었다. 빨갛게 부어올랐던 것이 마법처럼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난 네가 행복하기만 바라.”

잠시 망설인 로아는 이번에도 먼저 손목을 빼버렸다. 흔들리는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가슴엔 서늘한 칼이 꽂힌 채로, 식어가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저를 향하던 붉은 눈동자.

겨우 다시 만난 이 남자를 다시 그때의 비극으로 내몰 수 없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근데 정말 아무 일도 없어.”

로아는 에이젠의 눈을 피해 시선을 툭 떨어뜨렸다.

“잠깐.”

에이젠의 팔뚝엔 주욱 길게 긁힌 상처가 있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방금 긁힌 듯 선명한 핏방울이 맺혀 올라왔다.

“상처 났어, 에이젠.”

로아가 에이젠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접어두었던 소매를 펼쳐 상처를 가렸다.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에이젠의 상처에 예민해진 로아가 뿌리치는 그의 손길을 다시 붙잡았다. 그러나 다정했던 에이젠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신경을 왜 써. 네 말대로 우린 결혼할 연인 사이도 아닌데.”

상처 입은 눈이었다. 몇 번이고 모호하게 굴어놓고 결국은 또 밀어내 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로아 너도…….”

더는 이런 사소한 것에 호들갑부리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널 자꾸만 욕심낼 터이니.

그러나 에이젠은 뒷말을 다 이을 수 없었다.

“로아.”

푸른 눈동자 인근에 맺힌 투명한 것이 하얀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왜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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