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비극의 갈림길
왜 우냐는 말이 나오고서야 뜨거워진 눈시울을 느꼈다. 당황한 로아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아니, 아니. 난…….”
목소리에도 물기가 가득 묻어났다. 자신이 내는 목소리가 낯설어 목을 부여잡았다.
“그냥 에이젠이 걱정돼서…….”
말과 행동이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이란 걸 알았다. 감정을 숨긴다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에이젠은 울먹거리는 로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로아.”
그리고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내가 없어도 정말 행복해?”
에이젠이 로아의 눈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로아는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눈을 마주 보면 저도 모르게 솔직한 심정을 훌훌 털어놓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울먹거리는 흉해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있어?”
대답 없는 로아를 향해 재차 물었다. 고집스럽게도 로아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없는 마음을 굳이 꺼내 그를 상처 입히고 싶지도 않았고, 헛된 희망을 심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한 발 양보한 에이젠이 로아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그러더니 다시 성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싫어한 적 없다고 했지.”
로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올려다봤다.
“그럼 날 사랑해?”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냐 묻는 말이었다. 그가 로아의 상황을 어느 정도는 눈치챈 듯했다.
로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직 사랑한다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다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다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귓가엔 트라우마처럼 포춘텔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타깝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없다면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단명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포춘텔러의 예언은 항상 맞았다. 벨라니스의 아이도 아들로 태어났고, 부부가 된 후 에이젠은 죽었다.
‘귀족의 자제분께서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애석한 운명을 믿는다면 결혼을 하는 게 좋겠군요.’
아마도 에이젠과 결혼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거란 예언 또한 맞을 것이다. 에이젠이 떠나면 로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에 넘치도록 당신을 사랑해줄 그런 남자, 당신과 멀지 않은 곳에 있잖아요?’
수많은 갈등이 그녀를 괴롭혔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를 붙잡아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참혹히 죽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싫었다.
행복한 선택지란 없는 비극의 갈림길에서 로아는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미안해.”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에 넘치도록 나를 사랑해줄 그런 남자. 에이젠 트로네.
그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았다.
섬세하게도 그는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가 제 잘못이 아니란 걸 빨리 알아차렸다. 그리고 저를 괴롭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오로지 저만을 생각해주는 멋진 남자.
제 한 목숨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는 끔찍한 일은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에이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로아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에이젠이 그녀를 일으키려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뻗은 그의 손길은 허공에서 멈춰 섰다.
“내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야.”
몇 번이나 가슴에 비수를 꽂아넣는 완고한 거절. 잔인하게도 가슴을 후벼파는 확인사살에 에이젠은 더 이상 로아를 보챌 수 없었다.
***
에이젠을 보내고 돌아온 로아는 터덜터덜 안쪽으로 들어섰다. 잔뜩 울어버린 탓에 두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아가씨.”
방으로 올라가려던 로아는 계단 중턱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가씨 앞으로 온 서신들입니다.”
쥬디가 서신이 쌓인 트레이를 들고 로아를 따라 올라왔다.
“어제 아가씨가 응접실에 계신 줄 알고 트로네 대공님께 전달드렸는데 깜빡 잊으신 건지 그대로 두고 가셨더라고요.”
“알겠어. 내려가봐.”
로아는 제 몫으로 온 서신들을 가지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에이젠을 보낸 다음 날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받은 기억이 났다. 로아는 책상 위에 받은 서신을 내려놓고 황실에서 온 것을 가장 먼저 찾았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되돌아온 후, 에이젠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녀의 기억대로 흘러갔다. 와야 할 서신이 안 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방을 박차고 나온 로아가 황급히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쥬디.”
“네?”
잡무를 하던 쥬디는 저를 부르는 로아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걸어왔다.
“서신, 방금 준 게 다야?”
무언가 중요한 게 빠진 것처럼 로아는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네. 그게 전부입니다.”
쥬디는 자신의 대답에 자신이 없는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에이젠의 손을 한번 거쳤다 한들, 설마 그가 서신을 가져갔겠나 싶었다.
“수신할 때 기록한 거 있지? 그거 좀 가져다줘.”
쥬디는 곧 로아가 요청한 수신기록 책자를 가져왔다. 최근 날짜를 들춰본 로아는 황실에서 보낸 서신을 받았다고 기록한 흔적을 찾아냈다.
“에이젠한테 전달했다고 그랬지?”
“……예.”
일전에도 에이젠은 멋대로 황실에서 보낸 무도회 초대장을 뜯어봤다. 그래도 완전히 가져가진 않고 분명히 두고 갔었다. 그런데 왜 이번엔 그걸 통째로 가져간 건지.
로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게 없으면 안 됐다. 이 시간 속에서 에이젠과 결혼하지 않는 것, 그 외에는 어떠한 변수도 없어야 했다.
***
‘미안해, 에이젠…….’
미안하다, 미안하다라…….
에이젠은 울면서까지 저를 밀어내는 로아를 머릿속에서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이 타이밍에 로아에게 범상치 않은 관심을 보이던 유다르가 황실 무도회를 열었다.
‘아니, 트로네 공, 정혼자가 있었소?’
‘레이디 클라리온은 그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전장에 나갔던 트로네 공을 줄곧 기다린 것이오?’
‘허, 그런 순정적인 여인이 있단 말이지.’
‘후원에 있는 나무 중에 향이 아주 좋은 나무가 있더군. 그 나무의 이름이 궁금했소.’
에이젠은 손아귀 안에서 구겨진 초대장을 내려다보다 품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밤새 달린 그가 트로네 성으로 돌아왔다.
“클라리온 가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리예드가 입구에서 그의 귀가를 맞아주었다.
“리예드.”
에이젠은 리예드를 보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그는 로아와 대화 도중 그녀가 루베른 영지에서 있었던 일을 숨기는 것까지 알아냈다.
클라리온 영지에서 떠나기 전, 그는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에게 서신부터 보냈다. 루베른 백작 가를 비롯한 루베른 영지의 관계자들에게 로아가 방문했던 날에 대해 상세히 조사해 두라고.
“루베른 백작 가 쪽이랑 통신은 해봤나.”
“예. 루베른의 몇몇 사용인들이 인터뷰에 흔쾌히 청해주었습니다.”
리예드는 사용인들이 조사 결과를 정리해둔 서류를 가져와 그의 앞에서 읊기 시작했다.
“루베른 백작 부인과 성내에 나간 적 있다고 하십니다.”
성내에 나갔다라. 에이젠은 분명히 로아에게 성내에 나갔느냐 물었다. 로아는 나가지 않고 루베른 백작 저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고 대답했다. 불안해 보이던 대답은 그의 예상대로 거짓이었다.
“점술을 잘 봐주기로 유명한 집이 있는데 그곳에 들른 모양입니다.”
“점술?”
의외의 단어였다. 의구심을 품은 에이젠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로아가 미신 따위에 관심이 있었던가. 자신이 알지 못했던 로아의 모습에 착잡해졌다.
“무슨 점술을 본 거지.”
“그것까진 사용인들도 모른다 합니다. 동행했던 이들도 바깥에서 기다렸을 뿐, 점사를 볼 땐 레이디 클라리온과 루베른 백작 부인 단둘만 다녀왔다고 전했습니다.”
그 점술집에서 있었던 일은 그가 추측하는 ‘외부적인 요인’에 가장 유력했다. 점술집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해 보였다. 겉옷을 벗던 에이젠은 품에 욱여넣었던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떨어뜨렸다. 에이젠 시선 또한 초대장을 따라 밑으로 툭 떨어졌다.
“아, 그리고 황실에서 무도회를 연다고 하더군.”
“예. 공문은 왔었습니다. 태자 저하께서 정혼자를 찾기 위해 백작 계급 이상 영애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합니다.”
그의 발이 볼품없어진 황금 실링왁스 위로 올라갔다. 안 그래도 구겨진 초대장이 지그시 밟혀 더욱 더럽혀졌다.
“주인님의 참석이 의무는 아니니…….”
“참석하고 싶어.”
리예드는 생각지 못한 에이젠의 적극성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정혼자가 없어졌잖나.”
싱긋 웃는 그의 미소가 이상하리만치 서늘했다. 한 여자만을 갈구하던 그가 다른 정혼자를 찾겠다니. 리예드는 그가 황실 무도회에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황실에 서신을 보내라.”
리예드는 들고 있던 서류의 뒷면을 펼쳐 그가 하려는 말을 받아적을 준비를 했다.
“나도 정혼자를 하사받고 싶으니 무도회에 초대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