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45)화 (45/107)

45. 자고 가

며칠 후, 에이젠은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로아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로아와 서신을 주고받자고 약속을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먼저 연락이 올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에이젠, 잘 지내니?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우리 성에 방문했을 때 말이야. 그날 황실에서 내 앞으로 온 서신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에이젠이 떠나면서 그 서신이 사라졌어.

괜한 의심 한 거라면 정말 미안하지만, 혹시 그 서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까? 황실에서 온 것이라 내용을 어겼다간 우리 가문이 위험해질지도 몰라.

부디 알고 있다면 도움을 줬으면 좋겠어. 그럼 잘 지내.」

용케도 알아차렸네. 서신을 빼가면 따로 확인해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로아는 꽤 철저하게 수신기록까지 확인한 모양이었다.

서신의 내용 자체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다급함과 간절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글씨를 보자 자꾸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에이젠은 로아의 편지를 고이 접어 내려놓았다. 곧바로 종이를 꺼내 그녀에게 보낼 답장을 써내려갔다.

「로아. 먼저 연락해주다니 기쁜데?

그 서신이라면 나에게 있어. 내 일정상 클라리온 영지 쪽으로 갈 일도, 시간도 없는데 어떡할까. 시간 괜찮다면 로아 네가 직접 우리 저택에 방문해서 가져가는 게 가장 효율적인 것 같네.

방문하게 되면 미리 답장 줘.」

에이젠은 딱 용건만을 간결히 적었다. 어쩌다 그 서신이 자신의 손에 있는 건지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하지 않았다.

에이젠에게 가장 최고의 방법은 로아가 이 서신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간절히 찾길 원한다면 돌려줄 의향은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굳이 이유가 궁금하다면 한 번 더 서신을 보내 물으면 됐다. 그러나 로아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서신이 오가는 시간을 단축해 방문하는 게 나을 테니.

비겁하지만 이런 핑계로라도 그녀를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

로아는 황실에서 보낸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반드시 가져와야 했다. 에이젠과 일정을 조율한 후 곧바로 트로네 성을 향해 출발했다.

“로아, 어서 와.”

집에선 날이 선 듯 날카롭고 무기력에 가깝던 에이젠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로아를 맞이했다. 사용인들은 180도 변한 제 주인의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로아가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직접 사용인들에게 일을 지시할 정도로 그는 적극적으로 이날을 준비했다.

사용인들은 그의 새카만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청혼하려던 백작 영애에게 거절당하고 황실 무도회에 정혼자를 구하러 간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아마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 모종의 계략을 피우고 있는 듯했다. 로아를 제외한 이 저택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알아차렸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은 바로 로아였다. 도대체 계급도 그리 높지 않은 백작 영애가 어떤 매력으로 저 얼음덩이 같은 남자를 사르르 녹이게 만드는지.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을 갖고 칼부림을 밥 먹듯이 하는 남자를 어찌 웃게 만드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났길래 그를 거절하기까지 하는지.

로아는 저에게로 쏠리는 트로네가의 사용인들의 시선을 느꼈다. 익숙한 얼굴도 몇 보였다. 과거 그와 결혼했을 당시, 그들은 로아를 좋아했고 잘 따랐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진 지금, 그들의 원망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아야 했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애써 주변 시선을 무시한 채 에이젠의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 성에 로아가 방문하는 건 6년 전 그날 이후론 처음이지?”

“응. 그러네.”

두 사람은 심지어 서로에게 존칭도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오랜 벗처럼 말을 편하게 나누었다. 전공을 세운 한 제국의 대공작과 백작 영애가 이래도 되는 건가. 에이젠의 뒤에 있던 사용인들이 입을 떡 벌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손님이 왔으니 가주가 직접 대접을 해야지.”

에이젠이 로아를 안으로 들이려 했다. 그러나 로아는 딱딱하게 굳은 채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돌아선 에이젠이 다시 휙 돌아 움직이지 않는 로아를 바라봤다.

“에이젠.”

압도된 분위기 속 겨우 꺼낸 로아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황실에서 온 내 서신은?”

에이젠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찾는 건 서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그를 만나러 온 게 아닌, 제 물건을 되찾아 가려 왔다는 것을 명확하게 전했다.

환하게 웃고 있던 에이젠의 입매가 툭 떨어졌다. 웃음기가 빠져나간 그의 얼굴에서 붉은 눈동자는 유독 섬뜩하게 보였다.

사용인들은 그의 분위기가 일순 바뀐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두려움에 덜덜 떨어야 했다.

“갈 때 줄게.”

그러나 에이젠은 아직까진 침착한 상태였다. 가라앉은 분위기도 한순간이었다. 다시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허리를 숙인 그가 로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거 받으면 가버릴 거잖아.”

얄궂은 미소는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유난히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그 모습이 더욱 위협적이었다. 목에 칼을 겨누며 베어버리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던 때보다 훨씬.

“아, 아냐. 그래도 먼 길 왔는데 에이젠이랑 식사 정도는 하고 가야지.”

로아 역시 마지못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식사만?”

그러나 에이젠의 요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고 가.”

겉보기에는 평온한 대화 같아 보여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곳은 에이젠 트로네가 마음껏 날뛸 수 있는 그의 공간이었다. 로아가 자신의 사람들로 가득한 제 성에서 그를 밀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용인들은 로아가 완강한 태도로 나올까 두려웠다. 그의 감정이 분노에 가득 차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바빠?”

무조건 상대방을 밀어내는 게 아닌, 안위가 걱정되어 그렇다는 듯한 말투. 아주 현명한 화법이었다.

굳은 얼굴로 로아를 바라보던 에이젠이 빙긋 미소 지었다.

“한가하진 않지만 그래도 로아가 왔으니 특별히 시간을 내야지.”

로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간 그는 손을 뻗었다. 햇살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 손끝에 닿으면 그 감촉은 보기보다 부드러웠다. 에이젠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시간, 함께 보낼 수 없을 테니까.”

애절한 그의 작정한 꼼수였다. 상대방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로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이번이 진짜 마지막. 이 이후로는 정말 그와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받아가기 위해서 오늘만큼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의 뜻을 수용한 로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에게서 떨어진 에이젠이 저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로아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로아는 화려하게 꾸며진 인테리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6년 전 이곳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저택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네. 정말 호화로운 곳이라 기억에 남았거든.”

6년이나 지났지만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때는 클래식하면서 앤티크한 가구나 소품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지금은 컬러감도 질감도 훨씬 화려했고 반짝거렸다.

“리모델링을 한 게 그리 오래된 건 아냐. 가주가 되기 전까진 몇 년이나 같은 분위기를 고집했지.”

그들의 흔적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로아가 좋아하는 정원까지 손댈 수는 없었지만 실내 건축만큼은 대공사가 이뤄질 만큼 싹 다 뜯어고쳤다.

“에이젠은 의외로 화려한 걸 좋아하는구나.”

로아는 크리스탈 소재로 된 인테리어 소품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에이젠에게 이런 취향은 없었다. 다만, 로아를 위해 가장 반짝거리고 가장 화려한 것들로만 모아 집을 꾸몄다. 언젠가 그녀가 이 집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 전엔 소품 하나하나까지 내 취향이 아니었어.”

“그럼 그 전 느낌은 선대 대공님의 취향이었나 봐? 부자지간이 이렇게까지 취향이 반대일 수 있구나.”

로아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에이젠은 웃어줄 수 없었다.

“아니.”

단호한 그의 대답에 로아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마를레나 부인의 취향?”

이 저택에서 가장 언급해선 안 될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로아는 그녀의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입에 담았다.

에이젠보다 더 놀란 건 사용인들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마를레나 부인은 어디 계셔?”

로아는 질문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사용인들이 로아를 바라보며 손사래를 마구 쳤다. 로아는 그 의미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스스로 저택에서 나가셨어요.’

과거 그와 결혼했을 때, 제인에게 마를레나의 근황을 묻자 들었던 대답이었다. 그러나 에이젠이 반역자로 몰린 후, 사용인들은 정반대되는 증언을 했던 걸 기억했다.

스스로 저택에서 나간 게 아닌 에이젠이 직접 쫓아버렸다고.

“안 계셔.”

짧은 대답에 로아의 시선은 사용인들로부터 에이젠에게로 옮겨왔다. 혹시 무언가 실례되는 질문을 해버린 걸까.

마를레나 부인 언급에 사용인들이 치를 떠는 건, 혹시 그녀가 죽었다든지 그런 걸까. 하지만 선대 트로네 대공 부인이 사망했다면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 어디 외출이라도 하신 모양이네. 내가 방문하기로 한 건 알고 계셔?”

로아는 일부러 더 마를레나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에이젠에게 직접 듣고 싶어서였다.

“안 와.”

그러나 에이젠은 이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듯 돌아섰다.

“네가 있는 동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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