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때 죽었어야 할
단둘만의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로아는 전에 없던 불편함을 느꼈다. 그의 공간이라는 것 때문에. 혹은 그의 계략으로 이곳에 오게 됐기 때문에. 그가 저를 해할 일은 없겠지만 무슨 꿍꿍이인지 속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음식은 입에 맞아?”
“응.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에이젠은 음식보다 로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로아는 그의 눈빛을 의식하고도 애써 모른 척 식사에만 집중했다.
마음 같아선 당연히 함께 감정을 교류하고 싶었다. 그가 저를 마음껏 바라보는 것처럼, 저도 그를 원 없이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로아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쥔 채 끓어오르는 욕심을 가라앉혔다.
트로네 가의 다이닝룸은 특이한 구조였다. 한쪽 벽면 전체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아름다운 정원의 뷰가 한눈에 들어왔다. 적정하게 쏟아지는 햇빛도 기분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로아는 유리벽 너머의 정원을 바라보느라 한동안 다이닝룸을 벗어나지 못했다.
“안은 몰라보게 달라졌는데 정원은 그때 그대로네.”
에이젠이 로아의 옆으로 걸어왔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이 한 방향을 바라봤다.
로아는 가까이 다가온 에이젠의 체향을 느꼈다. 정원의 아름다운 나무들만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설핏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은 없어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나 에이젠 역시 유리창에 비친 로아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잽싸게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정원 좀 걷자.”
에이젠이 먼저 발걸음을 뗐다. 짓궂게 웃음을 터뜨리거나 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못 본 척 돌아섰다. 한 시름 내려놓은 로아가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역시 만나지 않는 것이 그를 밀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이번만 버티면 계획의 반 이상은 성공이다.
로아는 에이젠을 따라 뒷정원으로 나왔다. 6년 전에 이곳에 와본 이후로 처음 오는 것이지만 이 공간이 생생히 기억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전신을 휘감는 맑은 공기와 음이온, 풀숲 특유의 은은한 향기.
감각이 하나하나 깨어나는 게 다 느껴질 정도였다.
클라리온 백작 가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자연풍경식 정원.
그간 애먹었던 근심이 사그라들고 편안함이 찾아왔다.
머리를 비우는 동안 로아는 이곳의 공기를 더 느끼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살랑거리는 바람과 적절한 습도.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러나 갑자기 손끝에서부터 부드럽게 올라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손을 움직이려 했을 땐, 이미 그의 손에 꽉 붙잡힌 제 손을 발견한 후였다.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손을 맞잡은 것이 꼭 연인 같았다. 이러지 말라고 뿌리쳐야 하는데, 판단력이 흐려진 로아는 그의 온기가 너무 좋았다. 그가 쓰러지던 순간 마지막으로 만졌던 그의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니까. 온기는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손을 비틀어 빼기도 전에 그의 온기가 먼저 사라졌다. 손을 놓고서야 로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기억나?”
익숙한 장소. 익숙한 각도. 로아는 주어 없는 에이젠의 물음을 알아들었다.
“딱 여기였어.”
6년 전 처음 마주쳤던 두 사람. 로아는 그날 피하려는 에이젠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좋은 풍경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망설이는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로아가 에이젠을 이끌고 와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공유한 바로 그 자리.
머릿속으로만 가끔 떠올리던 그때의 시간, 그때의 장소였다. 이곳에 다시 에이젠과 함께 섰을 때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전히 키가 큰 교목의 수형이 흐트러질 때면 장관이란 말이지.”
물론 회귀하기 전 에이젠과 결혼을 했고 이곳은 자주 드나들었다. 그런데 왜 감회가 새로운 걸까.
이젠 그때가 될 수 없단 걸 알아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애틋한 마음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지하실엔 출입구 말고도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비상문이 하나 더 있었어.”
로아가 감상에 젖어있는 사이 에이젠이 말문을 열었다.
“갇혀 지내기만 했던 난 멋대로 거길 열고 나오곤 했지.”
그 대피로를 빠져나오면 바로 보이는 곳이 여기였다.
“아름다운 정원에 넋을 놓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아름다운 머리칼이 흩날리는 걸 보고 시간이 멈춘 줄 알았어.”
그가 자신을 가리켜 하는 얘기인 걸 알았다. 로아에게도 그랬지만, 그날은 에이젠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때였다. 처연하기만 하던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던 순간이었다.
“어두운 절망뿐이던 내가 지상 위로 올라온 계기가 됐지.”
“그, 그랬었지.”
로아는 과거에도 에이젠에게 구애를 받을 때마다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왜 그 말을 하는 걸까. 하필이면 지금 여기에서.
나란히 서 있던 에이젠이 걸음을 뗐다. 로아의 앞에 그가 만들어낸 새카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초록색의 맑은 빛을 띠는 잎사귀를 보던 로아의 앞에 선 그가 시야를 방해했다.
“네 덕에 지하실을 나올 수 있었고 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너야.”
또, 구애를 하려는 걸까. 왜 나를 포기하지 않는 거야, 왜.
이 남자가 너무도 가여웠다. 두말할 것 없이 용맹한 제국의 기사 에이젠 트로네. 명예롭게 짊어진 대공이라는 직위. 부족함 없이 그를 둘러싼 재물.
그런 그가 딱 하나 갖지 못한 것에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네가 없인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겠지.”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슬퍼 보였다. 로아가 없는 제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무슨 소리야, 에이젠.”
로아는 그런 에이젠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뻗은 두 손이 그의 손을 감싸 쥐려 했다. 그러나 바로 손끝이 닿기 직전. 앞에서 멈칫거리더니 손길을 거두어버렸다.
안아주고 싶어도 그래선 안 돼. 위로해주고 싶어도 이런 건 괜한 희망고문일 뿐이야.
거둬들인 손은 멋대로 튀어 나갈 뻔한 제 손목을 잡았다.
“그때 지하실에 갇혀 죽었어야 할……, 아주 가여운 아이였겠지.”
로아는 더는 그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에이젠은 몸까지 틀어버린 로아에게로 느른한 눈길을 던졌다.
“황실에서 온 서신.”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돌아갔다. 그녀가 이곳에 제 발로 들어온 목적. 로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에이젠을 마주 봤다.
“황태자 유다르가 신붓감을 찾기 위해 개최한 황실 무도회 초대장이야.”
에이젠이 서신의 내용물을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에이젠은 저 몰래 그 초대장을 뜯어 내용을 확인했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뜯어 봤어?”
“갈 거야?”
에이젠은 로아의 물음엔 답하지 않고 자신이 궁금한 것만 물었다.
“황실 무도회.”
참석 여부를 물었으나, 꼭 가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로아에게 황실 무도회란 놓칠 수 없는 좋은 핑계였다.
“황실에서 부른 건데 가야지, 그럼.”
느른하던 에이젠의 눈매가 서늘하게 변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공기도 차분히 내려앉았다.
“거기에 가면 황태자 유다르에게 청혼받을지도 몰라.”
로아는 미래를 알고 있는 듯한 에이젠의 추측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실 무도회에 참석했던 때, 로아는 유다르에게 구애를 받았다. 어떻게 에이젠이 그걸 정확히 예상하고 있는 걸까.
“마, 말도 안 돼. 제국에서 가문 좋고 빼어난 영애들만 모일 텐데 거기서 어떻게 날…….”
애써 모르는 척 내뺐다. 그저 가볍게 참석하는 사교모임 정도. 그 정도로 치부해야 에이젠이 이 이상 상관하지 않을 듯했다.
“유다르는 널 탐내고 있어.”
에이젠은 추측이 아닌 확언을 했다.
“……뭐?”
“그러니까 네가 거길 가면, 네가 선택받을 거야.”
에이젠은 로아가 황실 무도회에 가지 못하도록 온갖 명분을 갖다 붙이려 했다.
“에이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니 로아는 그의 주장을 부정해야만 했다.
“전공을 세우고 처음 황실에 방문했을 때 수많은 전리품과 재물을 하사받았어.”
그러나 에이젠은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상세히 꺼내기 시작했다.
“혼인 상대를 하사받는 것도 선택지에 있었지. 난 너에게 청혼할 생각이라 거절했어.”
황실에서 유다르를 만났던 에이젠이 직접 보고 느낀 바였다.
“나에게 정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큰 관심을 보이더군.”
으득, 꽉 깨문 어금니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릴 정도로 분이 치솟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빼앗고 싶다는 뉘앙스로.”
그자의 의도는 참 투명하게 보였다. 로아가 당연히 자신의 여자가 될 거라 생각했던 에이젠은 크게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임자가 있는 걸 알고도 뻔뻔히 남의 여자를 탐닉하던 그에게 결국 로아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그 이야기를 들은 로아는 생각이 많아졌다.
과거의 에이젠도 알고 있었을까. 황실 무도회를 가기 전에도 그곳에 가면 유다르의 청혼을 받을 거란 걸. 아무리 거절하고 돌아왔다지만 알고 있었다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느닷없이 유다르에게 반역자로 내몰렸던 것도…….
어쩌면 자신 때문이었단 걸 알았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