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47)화 (47/107)

47. 영악한 도련님

“로아. 황실까지 가는 건 너도 원치 않잖아.”

현 시국, 헤이든 제국은 겨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유례없는 이유로 역사에 없던 전쟁을 일으킬 만큼 위험천만한 정치를 하는 자들이다. 클라리온 가는 늘 평화와 안전을 중시했던 가문인 만큼 급진적인 황실과 엮이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황실이 앞으로 또 어떤 이유로 제국을 위험에 빠뜨릴지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클라리온 가문도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다.

“그거, 다 감당할 수 있어?”

에이젠의 물음에 로아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다고 판단을 내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응.”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그래서 두렵지 않았다.

“태자 저하께서 날 선택하신다면 겸허히 받아들여야겠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겪었던 에이젠의 참혹한 죽음. 로아가 이번 생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건 그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돌려줘.”

로아는 에이젠보다 더 단호해진 목소리로 요구했다.

“내 초대장.”

***

해가 떨어진 이후, 두 사람은 한 저택에 있으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로아는 사용인들이 준비해준 곳에서 몸을 씻고 잘 채비를 했다. 에이젠은 잠들기 전 인사를 하러 오지도 않았다.

본래 로아의 것이었던 초대장도 하녀를 통해 전달받았다. 봉투는 없었고 꺼내본 초대장만 있었다. 그 초대장 역시 멋대로 구겨진 채였다. 품 안에 아무렇게나 넣어서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화가 나서 일부러 구겨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거까지 신경 쓸 필욘 없었다. 이로써 그가 마음을 모두 정리했다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로아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포근한 침구가 그녀의 피로를 풀어주려 부드럽게 감싸 어르고 달랬다. 그럼에도 로아는 쉬이 잠들지 못해 새벽 내내 뒤척거렸다.

잠을 이루지 못한 로아는 결국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시기 위해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밤이라 어두운 조명에 의지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주방 쪽으로 걸어가자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다행히 누가 있는 모양이었다. 로아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뻗은 손을 멈칫거렸다.

“에휴, 저 착해 보이는 아가씨가 우리 집 마님이 되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도 잘하고, 웃는 것도 예쁘고.”

설거지를 하는 듯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속에 섞인 대화의 주제는 바로 로아 자신이었다.

“그러게요. 주인님이 완전 다른 사람처럼 순해지시던데요?”

익숙한 목소리에 로아는 문틈으로 안쪽을 보려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각도 상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진 않았다. 자신의 감이 맞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은 제인이었다.

“내 말이. 평소엔 눈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다니잖아. 며칠 됐다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돼.”

사용인들의 대화 소리에 로아는 입매를 틀어 올렸다. 제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던 남자였다. 그런데 사용인들에겐 꽤 엄한 주인인 듯했다.

하긴, 전쟁에서 군대를 이끌었던 수장인 만큼 그는 매우 까다롭고 규칙적인 성향일 것이다. 다만 그런 면모들이 로아의 앞에선 잠시 사그라들 뿐이었다.

“그럴 만도 하죠. 어릴 때 지하실에 갇혀서 사육당하듯이 컸는데 사용인들이라고 곱게 보이겠어요?”

에이젠을 떠올리며 미소 짓던 로아는 사용인들의 뒷말에 웃음기를 잃고 말았다. 서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가 마를레나 부인에게서 미움받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불우한 유년 시절을 어느 정도 예상하기만 했을 뿐, 정확하게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몰랐다.

“슈카트 도련님이 평소에 먹는 양의 절반 정도만 줬는데도 어찌 저렇게 체격이 큰지 모르겠어요. 정량 먹였으면 어쩔 뻔했나 싶기도 하고.”

제인의 말을 들은 로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귀를 문 쪽으로 더 가까이 기울였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솔직히 너무들 하긴 했어요. 주인님과 마님이 하도 무시하고 미워하니까 사용인들 중에도 덩달아 도련님을 깔보는 사람들도 있었는걸요.”

로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어린 시절 에이젠이 겪었을 부당한 시련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체벌 도구를 만들어 오라 하면 주문했던 것보다 더하게 만들어 오고, 주인님과 마님이 외출하셨을 때도 지하실 문을 열어주지 않았잖아요. 영악한 도련님은 그걸 다 눈치채고 계셨을 거예요.”

구체적인 내용을 들은 로아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들어선 안 되는 걸 들은 기분이었다. 제 숨소리라도 들킬까 숨을 참았고, 다시 올라가면 발소리가 들릴까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사용인들이 뭔 힘이 있어? 우리도 먹고살려면 부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원. 그리고 둘째 도련님이 주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그럼에도 사용인은 뻔뻔한 태도였다.

권력을 잡는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인가? 그게 진정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자신이 살아온 클라리온 가문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선대 트로네가 가주였을 때 이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꽉 쥔 두 주먹이 바들거렸다.

“차라리 사용인들 물갈이를 하던지. 놔주지도 않고 말이야.”

“복수하는 거잖아요. 전 그래서 더 무서워요. 이 살얼음 같은 분위기에서 평생 일하라는 그런 뜻 같아서요.”

그래서 이 저택에 들어섰을 때 사용인들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거였다. 그제야 수긍한 로아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님이 좀 생기면 달라지나 했건만, 헛된 희망이었다.”

“저 아가씨도 주인님께 마음이 없는 것 같진 않던데 왜 거절하는 걸까요? 현재로서는 제국 최고의 명예와 재물을 짊어진 가문에 시집가는 건데.”

마음이 없는 것 같지 않다는 걸 눈치챈 건 에이젠뿐만이 아니었다. 남들이 봤을 때도 티가 났을 정도였다니. 모호하게 굴었던 제 태도를 돌이키게 됐다.

“마음이 있고 없고는 모르겠고, 오늘 분위기 보니까 영 맺어질 거 같지는 않더라고. 아가씨도 꽤나 단호하던걸?”

그렇게 보였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때마침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끝나고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로아는 그 틈에 주방으로부터 멀리 물러났다.

***

다음 날 아침.

로아는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화장을 하려 거울 앞에 앉았을 때 로아는 화들짝 놀랐다. 뒤척이는 새벽 동안에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잘 가려드릴게요. 모자도 있으니까…….”

로아의 머리를 빗겨주던 쥬디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나 로아의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얼굴을 보면 에이젠이 또 저를 잊지 못했다고 오해할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오해가 아니었다. 진심을 숨겨야 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래도 오늘 트로네 성을 나가면 완전히 끝이다. 당분간은 가슴 졸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를 만나지 않으면 그래도 괜찮을 테니까.

준비를 마친 로아는 에이젠을 마주하기 전부터 입꼬리를 끌어당기는 연습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서로의 행복과 무운을 바라주는 멋진 여성이고 싶었다.

입구엔 그녀가 올라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에이젠 역시 로아보다 일찍 나와 그녀를 기다렸다.

“잠자리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덕분에 편히 잘 잤어.”

그런 말을 하면서도 로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기 급급했다. 잠자리는 편했어도 편히 잠든 건 아니었다. 퀭한 다크서클과 부은 눈이 그 증거였다.

에이젠은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로아를 억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사용인들이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 쪽으로 몸을 틀었던 로아가 잠시 멈칫거렸다.

“이제 당분간은 볼 일 없겠네.”

마지막 인사를 하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아쉬운 감정이 담긴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던 에이젠의 입꼬리가 싹 말려 올라갔다.

“아, 내가 말을 안 했나.”

돌아섰던 로아는 에이젠의 목소리에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엇을 덧붙이려는 건지 불안해졌다.

“황실 무도회, 나도 가기로 했어.”

로아는 그의 말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황태자 유다르의 정혼자를 구하는 무도회에 그가 왜? 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의 반응에 더욱 개구진 웃음을 지었다.

“제국의 가문 좋고 빼어난 영애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인데.”

그는 로아가 일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운이 좋으면 나도 거기서 정혼자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 왜 그가 저와 똑같을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자신은 에이젠이 아닌 남자와는 결혼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당연히 에이젠과 결혼하지 않은 그녀의 남은 인생은 비혼이었다. 로아는 안일하게도, 에이젠 역시 자신이 없다면 비혼을 유지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정혼자를 찾겠다는 그의 말에 쉬이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것은 당황한 그녀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네. 그럼 거기서 마주칠 수도 있겠구나.”

로아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늦게나마 모자의 챙으로 제 표정을 감추었다. 그러곤 가차 없는 걸음으로 뒤돌아 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이만 가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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