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후원이 아닌 중정에
“으흑, 흑, 흐으으…….”
마차가 트로네 성문을 지나자마자 로아는 눈물을 터뜨렸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해 시트 위로 온몸을 쓰러뜨려 가며 울었다.
이제 에이젠과의 인연도 정말 끝났다. 그와 사적으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황실 무도회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 정도야 가능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그곳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연이 된 누군가와 정혼을 맺을지도 모른다.
무슨 심리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억울했다.
그가 사랑한 것도, 그와 결혼해야 할 것도 자신이었다.
먼저 미래를 보고 온 그녀는 저 때문에 남편이 죽는 걸 봤고, 그 미래로 가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마음 상해가며 노력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자신을 매몰차게 차버린 콧대 높고 주제도 모르는 여자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지. 로아는 벌써부터 얼굴도 이름도 모를, 그에게 선택받을 여자가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를 가장 사랑하는 건, 그를 가장 위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난데…….
***
무도회 당일.
에이젠은 초대받은 여성들보다 이른 시간에 황실에 도착했다. 고위 관직인 만큼 황족들과 미리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어서 오시오, 트로네 대공.”
그중에서도 에이젠의 참석을 가장 반기는 건 유다르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이 먼저 이곳에 오겠다니 의외였소.”
에이젠은 그가 왜 저렇게까지 기뻐하는지 알았다. 그의 정혼자란 이유로 큰 관심을 보였던 레이디 클라리온. 에이젠이 이곳에 참석했단 건 그녀와의 정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뜻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건 레이디 클라리온 역시 오늘의 무도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정혼자가 있었다면서?”
유다르는 짓궂게도 다 알면서 굳이 그의 아픈 곳을 들쑤셨다.
“…….”
에이젠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도 유다르는 기어이 대답을 듣겠다는 듯 앞을 알짱거렸다.
“왜. 잘 안 됐나 보오?”
에이젠은 그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유다르는 어두운 그의 면 앞에서 무례하게 키득거리기까지 했다.
“클라리온 백작 영애에게도 초대장이 갔을 터인데, 오늘 이곳에서 전 여자친구를 마주치는 것 아니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을 맹약했던 여자를 보는 앞에서 빼앗는다라…….
유다르는 상상만으로 짜릿했다. 그토록 위엄을 다지던 에이젠 트로네가 고작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무너질 꼴이 그려졌다. 배꼽을 잡고 깔깔대고 싶은 걸 겨우 참아냈다.
“너무 상심 말게. 어디 세상에 여자가 그녀 하나뿐이겠소?”
유다르는 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안 그래도 자네에게는 좀 더 좋은 집안의 여성이 어울릴 거라 생각했소. 이곳에서 잘 찾아보도록 하시오.”
그가 에이젠의 어깨를 위로하듯 툭툭 쳤다. 그러곤 경계하듯 날을 세운 눈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나랑 취향이 겹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
로아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기 공간을 향해 걸어갔다. 주변 영애들이 길을 헤매는 것과 달리 로아의 걸음걸이는 거침없었다. 한 번 와본 적 있는 황실 내부의 길을 잘 알았다.
대기실로 들어선 로아는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격적인 무도회장에 들어서기 전 메이크업과 헤어를 다시 만지는 시간이었다.
로아는 과거 황실 무도회장을 갔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지루해하던 로아가 유일하게 반겼던 사람이 카일론이었다. 카일론은 로아에게 자신이 설계한 황실 후원을 보여주겠다며 은밀히 이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절대 마주쳐선 안 됐을 남자 황태자 유다르를 만났다. 그 이후로 유다르가 제게 관심을 가졌고, 그 뒤의 사건까지 전부 이어진 계기가 됐다.
“카일론을 따라가선 안 돼…….”
“네?”
로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쥬디는 그녀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해 되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로아가 쥬디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화장을 해야 하는데 로아는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준비를 마친 로아는 준비된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화려하게 꾸며진 무도회장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교 댄스를 즐기는 사람부터 가벼운 샴페인을 곁들이며 모임을 갖고 있는 귀족 영애들이 보였다. 또한 미혼의 귀족 영식들도 2층에서 호시탐탐 여성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번째 보는 광경이라 그런지 배로 지루한 그림이었다. 딱히 적극적으로 사교 모임에 껴들지 않은 로아는 구석에 자리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싫증이 날 무렵, 로아는 시간을 확인했다. 곧 카일론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로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등장한 카일론이 로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카일론.”
“오늘은 모두가 바빠서 인사를 나누고 와도 좋다는 허가를 이제야 받았어.”
“잠깐이라도 얼굴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무도회는 어때?”
들은 적 있는 물음이었다. 로아는 여기서 재미없다고 대답했고, 카일론은 그녀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후원으로 이끌었다.
“재밌어!”
그래서 이번엔 반대로 재밌다고 거짓 소감을 말했다.
“그래?”
카일론의 의외로 신나 보이는 로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네가 무슨 이유에서 트로네 대공을 거절했는진 모르지만, 혹시라도 이곳에서 좋은 인연을 만난다면 너무 밀어내지는 마.”
카일론은 진심으로 로아가 이 무도회를 즐기길 바랐다. 가능하면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까지도. 워낙에 정혼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굴지 않았던 로아였던지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로아는 카일론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음의 문을 닫은 듯 그녀의 눈동자는 사람들 사이가 아닌 벽이나 바닥 쪽을 향했다.
카일론은 겉으로는 밝은 척하고 있지만 미묘하게 울적해 보이는 로아의 기분을 알아챘다. 동생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자 조심스러운 제안을 건넸다.
“내가 꾸민 후원 보러 갈래?”
“아니.”
그러나 로아는 이 질문이 나오길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단칼에 거절의 말을 뱉었다.
“안 갈래.”
호기심 많고 정원을 사랑하는 로아라면 당연히 눈을 빛낼 줄 알았다. 카일론은 예상에서 빗나간 로아의 반응에 얼떨떨해졌다.
“궁금하지 않아? 황실 후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그러니까 나 같은 애가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잖아.”
로아는 완강히 거절하듯 몸 자체를 옆으로 틀어버렸다.
“카일론도 아무리 후원을 관리하는 책임자라지만 그렇게 아무나 들이고 그러지 마. 황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곳인데.”
로아는 되레 카일론을 다그치듯 말했다. 그녀의 대답에 카일론은 웃음을 빵 터뜨려버렸다.
“정원을 마냥 좋아하기만 해서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더니.”
그러나 카일론은 포기하지 않고 로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럼 후원 말고 중정에라도 나가자. 야외에도 홀이 마련되어 있어.”
중정이라…….
카일론의 다른 제안은 솔깃했다. 우연히 후원으로 산책 나온 유다르와 마침 그 타이밍에 맞닥뜨렸었다. 그러니 같은 시간 다른 방향으로 나가면 그를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로아는 과거와는 다른 카일론의 제안을 따라 중정으로 나섰다. 과거의 무도회에서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야외 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나마 주변에 정원이 펼쳐져 있어 실내 무도회장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로아의 시선은 사람들이 아닌 정원수들로 향했다.
“후원과 달리 중정은 완전 정형식 정원이네.”
그러나 그 관심 어린 시선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응. 관리법이 달라서 애먹고 있긴 해. 토피어리나 리본 화단은 관리하기가 힘들거든.”
“내가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야.”
“네 취향이 아니긴 하지. 로아 넌 식물을 인위적인 모양으로 잘라내는 걸 싫어했으니까.”
로아가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자 카일론이 다시 한번 제안을 바꾸었다.
“그래서 후원으로 가면 이보다 훨씬 좋은 볼거리가 있을 텐데.”
그러나 로아는 카일론의 제안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야외홀 한편에 서 있는, 이 많은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을 발견하고 말았다.
“……에이젠?”
그는 수많은 귀족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트로네 대공님도 무도회에 참석할 거라고 듣긴 했어.”
상상만 할 때와 눈으로 직접 볼 때의 타격감은 전혀 달랐다. 불안하게 쿵쿵거리는 심장이 시큰거리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로아는 평소보다 배로 멋진 모습으로 등장한 에이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직 미련 가득한 얼굴인데.”
카일론에게 정곡을 쿡 찔리고서야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 다른 사람은 속여도 이 오라버니는 못 속인다?”
“아니라니까. 중정은 다 봤으니 이제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그래, 결심했으니 더는 질투의 감정도 느껴선 안 됐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까지 본인이 막을 권리는 없었다. 도망치듯 돌아선 로아는 누군가 제 앞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고개를 든 로아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봤다.
“나, 나오셨습니까. 저하.”
바로 헤이든 제국의 황태자. 유다르 디오넬 라 메르페스.
이 시간에 후원으로 나갔어야 할 그가 중정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