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49)화 (49/107)

49. 금목서, 필요 없습니다

“옆은?”

유다르의 시선은 로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카일론에게 그녀를 소개하란 듯 턱짓으로 가리켜 물었다.

“아, 제 여동생입니다. 황실 무도회에 초대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올라온 김에 잠깐 인사만 나누러…….”

“그렇지. 카일론도 백작의 자제였으니.”

과거에 같은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로아는 자신의 말 한마디나, 행동거지에 조금만 변화를 주어도 상황이 변하는 걸 느꼈다. 같은 말이나 행동이더라도 사소한 태도나 표정만으로도 상대방의 다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후원으로 나가지 않았으니 당연히 유다르를 마주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데 반대인 중정으로 나왔는데도 유다르를 마주치다니. 이건 도저히 경험으로선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레이디 클라리온. 그대는 이름이 무엇이오?”

아니, 오히려 더 최악이었다. 은밀한 장소였던 후원에서와 달리 중정에 야외홀이 설치된 바람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머, 태자 저하께서 웬 영애에게 말을 걸었어.”

“저분이 태자 저하의 선택을 받는 건가?”

오늘의 주인공인 황태자 유다르가 먼저 관심을 보인 여성이라니. 주변인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교 모임에 참석한 것은 개인일지라도 여기서 하는 모든 것들은 곧 가문의 평판으로 연결되고 만다.

“로아 클라리온이라 하옵니다.”

“로아…….”

유다르가 곱씹는 제 이름이 혐오스러웠다. 로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생각했다.

과거에 카일론을 따라 후원에 나갔다가 유다르를 우연히 마주쳤다. 그때를 되짚어보던 로아는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우연’이라는 건 자신의 추측이었다.

유다르가 처음부터 저를 주시하고 있다가 따라 나온 거라면 이 상황이 설명됐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에이젠의 약혼녀인 걸 알면서도 초대장을 보냈다.

즉, 유다르는 이 무도회가 열리기 전부터,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친 이날보다 훨씬 전부터 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 설명이 됐다. 그날도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빛나는 머리카락처럼 아주 아름다운 이름이군.”

유다르는 그때와 같은 말을 건넸다. 그러나 이번엔 그때와 하지 않았던 행동을 추가했다. 손을 뻗어 잘 빗겨져 윤기를 내는 로아의 금빛 머리칼 끝을 만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후원에서의 유다르는 함부로 저를 손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바뀐 걸까.

보는 눈이 많아 저를 밀어내지 못할 거란 생각 때문인가. 이 남자의 수상한 꿍꿍이를 알고 있는 로아는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어지러웠다.

“내 그대에게 눈길이 가는데 나의 제안을 받아줄 수 있소?”

유다르의 과감한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예?”

이번에도 과거엔 없었던 제안이었다. 그녀가 거절하지 못할 상황이란 걸 알았고, 에이젠과도 파혼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유다르의 적극성에 로아는 등 뒤로 식은땀만 흘렸다.

“나온 김에 나와 산책을 하는 게 어떻소?”

제안을 건넨 유다르는 로아를 향해 손까지 뻗었다.

“그대를 아주 조용한 후원에 초대하고 싶은데.”

끔찍했다. 이 자리에서 유다르의 제안을 거절하고 저 손을 뿌리친다면 지금껏 쌓아온 가문의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제국의 영웅 트로네 대공의 청혼을 거절한 건방진 백작 영애로 알려졌다. 유다르까지 거절한다면 클라리온 가의 일원들은 딸을 이토록 콧대 높고 건방지게 키웠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로아는 더 이상 가문에 먹칠을 할 수 없었다.

곤란함에 고개를 살짝 튼 로아의 시야에 매서운 빛깔이 걸렸다. 멀찌감치서 이쪽을 보고 있는 에이젠이었다. 로아는 날렵해진 그의 눈과 마주쳤다.

아, 너무 싫다. 사랑하는 남자의 눈앞에서 다른 남자의 손을 잡아야 한다니.

그러나 로아에겐 이 이상의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에라도 유다르의 손을 잡아야만 했다.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그를 놓아주려면, 그를 살리려면.

황태자 유다르의 여자가 되어야 했다.

“남매의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만.”

유다르는 아직 로아의 대답을 듣지도 않았으면서 당연히 수락할 거라 지레짐작했다. 함께 있던 카일론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까지 당당히 요구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카일론 역시 그때처럼 순순히 물러났다.

“로아, 그럼 난 이만.”

유일한 지원군마저 사라졌다. 로아의 두 눈동자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공허해졌다. 허탈함이 가슴 안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락한다면 내 손을 잡아주시오.”

유다르는 로아에게 손을 더 가까이 뻗었다. 그녀의 대답을 독촉하고 있었다.

“좋겠다. 당연히 잡겠지?”

“당연한 걸 뭘 물어? 안 잡으면 가문이 멸할지도 모르는데.”

“우린 이제 기회 끝난 거야?”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유다르의 곁을 지키던 호위기사들도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이 공간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지나가는 엑스트라 정도이고 싶었으나, 원치 않는 주인공이 된 기분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을 끌어봤자 결과는 똑같았다. 어차피 그녀가 해야 할 답은 하나뿐이었다.

로아는 제 앞의 유다르의 손 위로 제 손을 살포시 올렸다. 잡지 않고 싶었으나 유다르는 위로 올라온 로아의 손을 놓칠세라 꽉 잡았다.

“꺄아!”

“어머, 어머.”

주변에서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부러워 미치겠어.”

“에잇, 우린 그냥 우리끼리 즐기다 가자.”

로아가 부러운 건 저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른 가문의 영애들이었다.

로아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비극적인 표정이었다.

그냥 조용히 지나가고 싶었는데, 왜 유다르의 손을 잡고 있는 거지.

아, 내가 왜 중정으로 나왔을까. 차라리 후원에 갔어야 했다. 그럼 이렇게 최악의 결말만은 피했을 텐데.

최악을 바꾸려고 시간을 돌아온 것 아닌가.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 맞나. 팔자를 더 기구하게 꼬아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처음부터 이자가 저를 노리고 있다는 걸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유다르가 얼마나 계획적이고 괴기한 자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때의 마주침을 ‘우연’이라 치부해버린 걸까.

너무 순진했다. 아니, 멍청했다.

로아는 유다르의 이끌림대로 따라갈 뿐 앞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끌려가는 발끝만 바라봤다. 그들이 걸어가는 대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비켜나 길을 만들어주었다. 로아는 사람들 무리를 어느 정도 벗어났을 때 문득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급히 찾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내내 서 있던 자리엔 그와 함께 있던 여성들만 있을 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잔혹하게도 신은 그녀에게 그럴 기회조차 앗아갔다. 로아는 다시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그도 다른 여성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되겠지. 이제 그거면 됐다.

저와는 완전히 끝나버린 관계. 상황이 마무리되고서야 로아는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젠은 죽지 않을 것이다.

***

유다르가 로아를 데려온 곳은 후원이었다. 황실 관계자도 미리 일정을 허가받지 않으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 후원.

결국은 이곳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같은 결말일 바에 에이젠에게 상처는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로아는 다 끝나버린 마당에도 온통 에이젠 걱정뿐이었다.

“무도회는 괜찮았나.”

“네. 즐거웠습니다.”

유다르의 물음에 로아는 영혼 없는 대답을 했다.

터덜터덜, 함께 후원 길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로아는 일부러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유다르와 연인이 된 것처럼 나란히 걷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유다르는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로아의 속도에 맞추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유다르는 한 그루의 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혹시 이 나무를 알고 계시오?”

지긋지긋한 금목서. 이자는 이 나무 앞에서 작업 멘트를 연습이라도 한 것인가. 상상하니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금목서라 알고 있습니다.”

“역시 카일론의 동생답게 수종을 잘 알고 있군.”

유다르는 금목서에서 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로아는 금목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나무가 그리 달가운 건 아니었지만, 그와 시선이 맞물리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꽃도 없이 잎사귀만 있는 나무에서 향기가 나길래 뭔가 했더니, 정말 잎사귀에서 좋은 향기가 나더군. 참 특이한 종이야.”

유다르는 잎사귀에 손을 대곤 허리를 숙여 향을 맡았다. 감성적인 모습을 연출하다니. 그의 더러운 속내를 알고 있는 로아는 연기하는 유다르에게 환멸이 났다.

“이 식재를 그대의 정원에도 선물…….”

“아닙니다.”

로아는 유다르의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그의 소리를 잘라낸 채 대답했다. 칼같이 날카로운 거절이었다. 감히 황족의 말을 끊다니. 유다르는 분노보다는 놀란 얼굴로 로아를 바라봤다.

그러나 로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금목서 필요 없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