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50)화 (50/107)

50. 그를 사랑하기에

로아의 당돌한 반응에 유다르는 할 말을 잃었다. 황태자로서 이런 대접을 받아본 것도 처음이었으며, 그게 한낱 백작 영애일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으니 말이다.

“……하하.”

유다르는 로아를 똑바로 보며 웃음소리를 냈다. 로아는 그의 인위적인 웃음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재밌다고 하기만 해봐.

“정말 재미있는 레이디로군.”

이마를 탁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로아는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유다르의 눈엔 오히려 무너뜨리고 싶은 도도한 여성으로 보일 뿐이었다.

“사실은 그대가 트로네 공의 정혼자였단 걸 알고 있소.”

유다르는 고개를 돌린 로아의 시선에 들기 위해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매우 궁금했거든.”

유다르를 마주 보는 로아의 시선은 고울 수가 없었다.

‘자네는 본성이 잔악한 전쟁광에게 속은 순진한 여자고, 난 가여운 자네를 구원해준 아량 넓은 황태자가 되는 거지.’

그가 로아를 탐했던 목적은 분명 이 때문이었다. 황실과 제국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영웅 에이젠 트로네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함.

에이젠을 짓밟고서라도 황태자로서 이미지 갱신을 하려는 목적. 자신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되는 도구. 그뿐이어야 했다.

그러니 저 계획은 에이젠과 결혼을 한 이후에 나온 발상이어야 했다.

왜 유다르는 에이젠과 결혼하지도 않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까. 저를 이용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 있길래.

그의 말대로 고작 백작 영애였다. 황실의 며느리로 들이기엔 턱없이 부족한 가문.

그런데 왜.

우연을 가장하는 수고로움을 동반해서라도 그가 저에게 접근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2년 넘게 생사도 모를 정혼자를 지조 있게 기다렸다고 들었소만은 어째서 그와 파혼하게 된 것이오?”

지극히 궁금했다. 도대체 이 여자가 무엇을 믿고 이리 콧대가 높은 걸까.

제국에서 가장 칭송받는 인물 트로네 대공의 청혼을 거절하고, 황태자인 저에게까지 흥미 없다는 듯 건방진 태도를 유지했다.

어떻게 해야 저 높은 자신감을 꺾어버릴 수 있을까. 미묘하게 흐르는 기 싸움. 유다르는 이 기 싸움을 통해 그녀를 넘어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로아의 굳은 지조는 아는 사람은 다 알 정도로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로아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유다르를 향해 한쪽 입매를 틀어 올렸다.

“개인사적인 일이라 다 아뢰올 수는 없으나 분명한 건…….”

사랑하는 남자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말하기로 했다.

“그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로아의 말에도 유다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턱을 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트로네 대공을 위해, 그를 사랑하기에.”

이해력이 낮은 가여운 황태자를 위한 보다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눈에 힘을 준 로아는 울음이 터져버릴 것처럼 목이 메어 왔다. 호흡도 점차 거칠어졌다.

그를 떠올린 것뿐인데도 로아는 울컥한 마음이 치올랐다. 당사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곳에서 그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이리도 힘들지 몰랐다. 그저 그가 비극적인 일을 피하고 행복해지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그 대가는 가혹했다. 그조차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자신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기만 했다. 거기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까지 곁들어야 했다.

하지만 둘 다 행복해질 방법이 없다면 로아는 지금의 인생이 더 나았다. 둘 사이를 가로막은 황태자 유다르의 벽은 감히 무너뜨릴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그래…….”

유다르는 제 턱을 매만지며 허공을 바라봤다. 무심한 눈이었다. 로아가 올려다본 유다르의 반응은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이렇게 분한 감정을 절제하듯이 표출하고 있어도 그는 영 관심 없다는 일이었다. 자기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따위 공감해줄 여력도 없는 건가. 과연 이자가 추후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될 재목이란 말인가.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가 내린 결론은 겨우 이거였다. 매만지던 턱에서 손을 내린 유다르는 빙긋 웃기까지 했다.

“어차피 자넨 그와 결혼할 생각이 없지 않은가.”

로아는 입을 떡 벌렸다. 유다르는 두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 따위 처음부터 관심 있는 게 아니었다. 이토록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확인하고도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두 주먹을 꽉 쥔 로아는 차오르는 분을 억누르려 했다. 호흡을 가다듬다 보니 씩씩거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저는……!”

말문을 트고도 바로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메인 목을 가다듬은 로아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무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채 단호하게 말했다. 나약한 모습을 드러냈다간 적 앞에 아킬레스건을 드러낸 꼴일 테니.

“흠, 과연 그럴까.”

유다르는 그녀가 무어라 말하며 저를 밀어내든 아무렴 상관없다는 느른한 얼굴이었다.

“레이디 클라리온.”

그의 호명에도 로아는 고개를 휙 돌릴 뿐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로아.”

로아는 격노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구겨진 미간을 펴기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이름으로 부르는 유다르의 목소리에 넋을 놓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감히, 이 남자가 자신을 이름으로만 불렀다.

제 이름을 편히 부를 수 있는 남자는 에이젠뿐이었는데.

“자넨 나와 결혼하게 되어 있어.”

아주 나긋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증오의 감정이 허용 게이지를 초과해 정상적인 사고 회로를 잃은 듯했다. 로아는 아무런 대꾸도, 그 이상의 반항 어린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의 근육에 힘이 풀린 듯 축 늘어졌다. 표정 또한 혼이 나간 사람처럼 어리바리해졌다.

도대체 왜.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 왜 하필이면 나야, 왜.

그러나 로아는 ‘왜?’냐는 질문에 그가 무어라 대답할지 알았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트로네 공이 집요하게 살아 돌아올 원동력이 되었던 그 상대가 궁금했던 것이오.’

‘그런 여자라면 향후 제국의 황후가 되어도 올곧은 심지를 유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지.’

머릿속이 지끈거려왔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그의 면전에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제국에는 드높은 명예와 풍족한 부를 가진 귀족 가문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태자 저하께서 저를 선택하셨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격해진 감정에 저도 모르게 따지는 듯한 말투가 나갔다.

“저하 또한 저처럼 저하의 명을 거스르기만 하는 건방진 여인보다, 지고지순하고 현명한 여인이 앞으로 황실의 미래에 있어서도 이점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로아는 그에게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닌 ‘당신에게 더 이상적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교묘히 바꾸었다.

“유감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좋은 전략이었으나 유다르에겐 통하지 않는 화법이었다.

“무언가를 쉽게 가지는 것처럼 재미없는 건 없어. 그리고 내가 살아온 인생 전부를 통틀어 어렵게 얻어낸 건 단 하나도 없었지.”

그는 자신감에 찬 얼굴로 제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로아 클라리온, 자네만은 아주 넘기 어려운 산 같단 말이지.”

그러다 일순 웃음기를 지워내고 차가운 공기를 품은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지고지순이라면 자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 아닌가.”

그러더니 이번엔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트로네 공을 위해 혼기가 꽉 찰 때까지 생사도 모르는 그를 기다리고, 기적처럼 재회를 하고도 그에게 무언가 피해를 끼칠까 두려워 청혼까지 거절했다…….”

로아는 직감했다. 어쩌면 자신이 과거에 겪은 것보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유다르는 훨씬 위험한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내 옆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여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뿐이 없어.”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밀려나지 않는 굴레였다. 로아는 머릿속으로 새롭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또 찾았다. 분명 있다. 이 미친 자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이.

“오늘 밤, 나와 있어 주겠소?”

로아가 사념에 빠진 사이 기어코 피하고 싶었던 제안이 나오고야 말았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이 트랩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심리적인 방법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단단한 철벽만 내세우던 로아가 처음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다르는 로아의 수락에 미소 지으며 손을 뻗었다.

“……단.”

로아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손을 과감히 탁 쳐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주십시오.”

유다르의 시선은 로아에게서 밀려난 제 손으로 향했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황태자를 쳐내기까지 했다.

“아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그럼에도 로아는 기죽지 않고 한 번 더 신신당부했다.

“약속해준다면 당신과 오늘을 보내겠습니다.”

유다르의 시선이 서서히 움직여 로아에게로 향했다. 굳은 심지가 보이는 푸른 눈동자. 그러나 자세히 보면 겁을 먹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유다르는 한순간도 제 맘대로 통제되지 않는 로아가 마음에 들어 통쾌한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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