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끔찍하게 싫은 남자
“정말 재미있어. 자네 같은 여인은 처음 본다니까.”
유다르는 눈가에 눈물이 찔끔 맺힐 정도가 되어서야 웃음을 그쳤다.
“그래…….”
모순적인 제안에도 유다르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이렇게 나와야 로아 클라리온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 유다르에겐 겪어본 적 없는 색다른 매력이었다.
그렇게 더 날뛰고 건방지게 굴어라. 그래봤자 넌 내 눈에 이제 갓 태어나 갸르릉거리는 아기 고양이일 뿐이다.
“약속하지. 내 자네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오늘 밤 나와 함께 있어 주시오.”
유다르가 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과연 이 남자가 약속을 지킬까. 그것 또한 미지수였다. 지금 당장 저를 꾀어내려 억지스러운 부탁을 수용한다 한들 둘만의 공간에 들어가면 언제 태도를 돌변시킬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최선의 협상이었다. 로아는 그를 위해 저의 시간을 바치기로 했지만 손을 맞잡지는 않았다.
***
로아가 황실을 나섰을 땐 들어왔을 때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복작거리던 무도회장은 어느새 정리되었다. 초대된 사람들 중 남은 손님은 저를 제외하고 한 명도 없었다.
나가는 길 역시도 들어올 때와 달랐다. 올 때만 해도 동행인은 마차를 끌어줄 기사 한 명과 쥬디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걷는 주변은 황실 기사단들이 호위하듯 둘러쌌다. 이들은 로아가 무사히 클라리온 영지로 갈 때까지 마차를 호위할 예정이었다.
‘즐거웠소. 다음 달쯤에 클라리온 백작 가 전원을 황실로 한번 초대하겠소.’
유다르는 로아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아마도 그녀가 클라리온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황실에서 보낸 서신이 먼저 도착할 것이다.
‘그때 제국과 우리의 미래를 위해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지긋지긋한 유다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그녀를 괴롭게 했다.
로아는 타고 온 마차가 아닌 황실에서 준비한 훨씬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 앞에 섰다. 특별대우를 해주는 호의조차 불쾌했다.
마차 앞에 서서 기다렸던 기사 한 명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잡고서야 겨우 마차에 올라탈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높이였다. 그러나 로아는 치맛자락을 둘러매 한 손으로 꽉 붙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기사의 손이 아닌 높은 마차를 스스로 짚었다. 조금은 힘겨웠지만 혼자 힘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로아의 뒤에 있던 쥬디가 그녀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라타려 했다. 그러나 기사들에게 앞을 가로막혔다.
“사용인은 뒤에 있는 마차에 타라. 이 마차는 영애가 홀로 탑승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머쓱해진 쥬디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로아는 시트 끄트머리로 당겨 앉아 쥬디를 향해 손짓했다.
“쥬디, 타세요.”
앞을 가로막던 기사들이 로아를 올려다봤다. 로아는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마주했다.
“내 사용인을 누구 멋대로 옮기는 겁니까? 저는 쥬디와 함께 갈 겁니다.”
그제야 기사들이 비켜났다. 로아를 대할 때처럼 손을 잡아주는 이도 없었다. 로아보다 키도 체구도 작은 쥬디가 마차에 올라타지 못해 낑낑거리고 있는데도 주위 기사들은 가만히 있기만 했다.
결국 앞으로 나온 로아가 쥬디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서야 쥬디도 마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호화스러운 마차는 곧 출발했다. 로아는 황궁을 빠져나오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쐤다. 해 질 무렵이라 그런지 하늘이 어스름했다. 붉은색, 그리고 보라색이 한데 어우러진 하늘은 기묘한 색깔이었다. 마차가 숲길로 진입하자 키가 큰 나무들에 가려져 해와 하늘은 보이지 않게 됐다.
볼거리도 없는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에이젠을 살리기 위해 뭐든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버거웠다.
에이젠이 아닌 유다르와의 결혼 생활을 떠올려 봤다. 그 어떤 장면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는 안중에도 없던 남자였다.
‘안타깝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없다면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단명할 것으로 보입니다.’
포춘텔러가 말했던 로아가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어차피 죽음이란 운명도 피할 수 없게 된다. 로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걸까…….”
공허한 어딘가를 바라보며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삐져나왔다.
“네?”
그 중얼거림을 들은 쥬디가 로아에게 되물었다. 초점을 잃고 멍하기만 하던 로아의 눈이 쥬디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자세를 똑바로 고쳐앉은 채 쥬디를 마주 봤다.
“쥬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네. 물으세요.”
“끔찍하게 싫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리고 죽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나은 거 같아?”
시답잖은 건인 줄 알았으나 꽤나 심도 깊은 질문이었다.
“음…….”
가설일 뿐인데도 쥬디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글쎄요. 끔찍하게 싫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싫긴 하지만 전 아직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쥬디의 대답은 로아의 눈을 번뜩 뜨이게 했다. 늘 클라리온 가의 하녀로만 있던 그녀가 다른 일도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쥬디가 이루고 싶은 건 뭔데?”
황실에 있는 내내 썩은 동태 눈을 하고 있던 로아가 간만에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근래 들은 것 중 가장 흥미로운 소재의 이야깃거리였다.
“자수하는 것을 좋아하여 쉬는 시간에 곧잘 만들곤 합니다. 언젠가 돈을 모아 성내로 나가 자수 가게를 차리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 어떤 주인도 제 사용인이 독립을 준비한다면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로아를 포함한 클라리온 가는 달랐다. 그들은 가문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들이 독립할 때마다 미래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었다. 형편이 어려운 자에겐 거처를 마련하거나 간혹 식재료를 보내주는 등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쥬디 역시 제 삶에 다른 목표를 갖는 것도, 그걸 로아에게 말하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웠다.
“자수 가게……. 정말 좋구나.”
로아는 눈을 감고 상상에 빠져들었다. 성내에서 쥬디가 운영하는 아기자기한 자수 가게를 그려보았다. 모양과 색깔이 다채로운 부채나 양산, 식탁보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주인이었다는 정 때문에 값을 받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카운터 앞에서 실랑이를 하게 되는 상상도 했다. 로아의 입가에 처음으로 설핏 미소가 번졌다.
“나도 그런 거나 해볼까.”
빈말이긴 했지만 꿈이 있는 쥬디가 부러운 건 진심이었다. 지독한 불행에 빠져든다 해도 이겨낼 무언가가 있다면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쥬디는 로아의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아가씨처럼 고운 손으론 힘드실 겁니다.”
“왜?”
“이게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조그마한 것을 봐야 해서 눈이 빠질 것 같고, 단단한 도구들을 오랜 시간 쥐고 있으면 손이 다 부르틉니다. 나중에 익숙해지면 굳은살이 생겨 좀 덜 아프긴 하지만요.”
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쥬디는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이었다.
“싫어하는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자수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제 시간과 정신을 온통 자수에 쏟아부으면 되니까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꿈이 있는 건 참 부러운 일이었다. 로아는 쥬디처럼 두 눈에 생기를 띨 수 있을 만큼, 가슴 뛰는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정원을 산책하고, 맛이 좋은 허브티를 음미하고, 화단에 물을 주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는 일. 그게 로아가 좋아하는 전부였다.
그 옆엔 항상 에이젠이 있었다. 그와 함께였기에 행복했던 것들.
지금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하는 건, 에이젠 트로네. 이 남자뿐이었다.
“아가씨께선 태자 저하께 시집가기 싫으십니까?”
쥬디가 조심스레 물었다. 누가 들어도 로아가 말하는 ‘끔찍하게 싫은 남자’는 유다르였으니까.
“응. 그러네.”
황실에서 내어준 화려한 마차를 타고,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귀가하는 것치곤 당당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가씨.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권태로움을 느끼던 로아는 쥬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신을 말하려는 듯 잠시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개인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사회구성원이잖아요. 아가씨가 황실과 연을 맺게 되면 클라리온 가는 황실의 사돈으로서 더없는 명예와 권력을 쥐게 될 거예요.”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로아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아가씨 앞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느끼는 바로 클라리온 가 분들은 다 좋으신 분들이에요. 가진 만큼 베풀 줄 알고, 행복해질 선택이라면 선입견 없이 존중해주시기도 하고, 또 자신의 선택에 책임감을 가져 아랫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줄도 아시고.”
로아는 저의 부모들을 떠올렸다. 두 분은 확실히 남들보다 선진적인 사고를 가지긴 했다. 귀족 가문에서 조경가를 배출해내고, 사용인들에게도 마음껏 자유를 주곤 했으니.
“주인님과 마님 아래에서 자라신 도련님들도 그리고 아가씨도 모두 바른 성품을 가지셨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는 멋진 사람들이에요.”
또 입바른 소리 한다며 타박하려 했으나 이 또한 수긍하는 바였다.
“그래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클라리온 가라면 권력을 쥐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제가 정치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분명 제국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거예요.”
돌고 돌아 비로소 하고픈 말의 결론이 나왔다. 로아는 달라진 시선으로 쥬디를 바라봤다. 저의 입장만 고집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