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일촉즉발
“그렇구나. 새겨들을게.”
쥬디의 생각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황태자의 청혼, 그리고 대공작의 청혼을 거절한 백작 영애는 뻔뻔한 데다 굴러온 복을 제 발로 차버린 어리석은 여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에게도 적잖은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클라리온 백작 부부가 아량이 넓어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끊겼다. 지루함과 화만 가득하던 그녀의 눈 어딘가는 슬픔이 차올랐다.
“아가씨.”
그런 로아의 사소한 변화도 알아챈 쥬디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혹시라도 안 좋은 생각 하고 계신 건 아니시죠?”
로아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아…….”
선택의 기로에 놓인 지금 ‘죽음’을 논하였으니 쥬디가 오해할 만도 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자결을 하려거나 그런 선택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포춘텔러의 말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로아는 그녀의 발언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전부 이루어졌으니까.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시간을 되돌아온 것은 마치 이뤄져선 안 될 운명을 다시 거스르란 의미 같았다.
어차피 죽을 운명. 그게 언제일까. 포춘텔러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했을 경우’라 하였다. 그러니 에이젠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아마 얼마 가지 않아 예언이 들어맞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운명을 피해 보려 했으나 결국은 비극의 구렁텅이까지 자신을 몰아넣고서야 그를 구할 수 있었다.
쥬디의 말대로 유다르와 결혼하면 제국의 평화를 위해 큰 이바지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로아는 반성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제국을 먼저 위하는 게 맞는 일인가. 역사에 길이 남은 수많은 투사들은 그렇게 제국을 지켰을지 모른다. 그러나 로아는 자신이 그들과 같은 그릇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과 저의 희생은 결이 달랐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역사 속에 한 줄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릴 백작 영애.
제 위치가 이 정도라면 굳이 제국을 위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결국 또 쟁점은 원위치로 돌아왔다.
***
“아이구, 이걸 어쩌면 좋아.”
트로네 가의 사용인들은 이른 아침 배달 온 신문을 미리 펼쳐보며 혀를 찼다.
“안 그래도 무도회 다녀오신 뒤로 더 칙칙해지셨다 했더니 하필이면 이런 일이…….”
에이젠은 황실 무도회에 새로운 정혼자를 찾겠다며 자발적으로 참석했다. 그의 적극적인 태도에도 사용인들은 반신반의했다. 당연히 다른 정혼자를 찾아 새롭게 시작한다면 가장 좋은 결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원하는 대로 흘러갈 정도로 호락호락한 작자가 아닌 것을 알았다.
예상대로 황실 무도회를 다녀온 에이젠은 더욱 예민해졌고, 더욱 날카롭게 신경을 세웠다. 안 그래도 살얼음을 걷는 듯했던 사용인들은 점점 더 골이 아파 왔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가 새로운 정혼자 따위를 구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눈치만 보던 날들이 이어지고, 오늘 자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정혼자를 찾지 못해 제국과 황실의 골치였던 황태자 유다르의 약혼 소식이었다. 그것도 저들의 주인인 에이젠 트로네가 몇 년이나 지독하게 사랑해왔던 클라리온 백작 가의 영애.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황실 무도회에서 연이 닿아 이렇게 됐을 것이다. 그러니 에이젠이 그 이후로 날카로워진 것도 이해가 됐다.
“오늘 신문은 깜빡한 척 안 드리면 안 되나요? 주인님 이거 보시면 절대 가만히 안 계실 거 같아요.”
하녀들은 신문을 돌려 보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상하며 벌벌 떨었다.
“그래요. 괜히 우리들한테 불똥 튀기 전에 숨겨버리는 게 어때요?”
하녀 한 명이 보던 신문을 반으로 또 반으로 접어 조그맣게 겹쳤다. 제인은 그들 사이에서 구겨지는 신문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뭐 때문에 그리 소란스러워.”
제인이 신문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끝내 닿지 못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주인 에이젠의 목소리에 등골에서 섬찟한 소름이 찌릿하게 올라왔다.
“주,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신문을 둘러싸고 있던 하녀들이 얼른 몸을 돌렸다. 급하게 돌아서느라 등 뒤로 숨긴 신문은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내버렸다. 촉이 좋은 에이젠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신문을 숨긴 하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숨긴 거.”
“네?”
“가져와.”
에이젠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녀는 우물쭈물거리더니 내밀어진 그의 손 위에 신문을 올려놓았다.
“여, 여기 있습니다.”
에이젠은 마구잡이로 구겨진 신문을 하녀들 앞에서 바로 펼쳐보았다. 하녀들은 그가 분개할 만한 기사를 마주한 것에 무서워져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에이젠은 신문을 접곤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들어선 곳은 집무실이었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저택 전체에 공포스럽게 울려 퍼졌다. 그 뒤론 참을 수 없는 정적이 맴돌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조용한 분노가 더 무서운 법이었다. 집사 리예드가 용기를 내어 집무실 앞으로 걸어갔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도 오늘따라 섬뜩하게 들려왔다.
“주인님. 실례하겠습니다.”
안쪽에서 에이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리예드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에이젠은 책상 앞에 앉지도 않고 서있는 채였다. 책상 위에 신문 1면을 펼쳐놓은 채 매섭게 그것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차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리예드의 물음에 에이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보이지 않는 광기만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시원한 걸로.”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의 목소리가 나왔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화를 미친 듯이 누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알겠습니다.”
집무실 밖으로 나온 리예드는 하녀를 향해 손짓했다.
“얼음물 한 잔 준비해요.”
하녀는 곧 얼음물을 올린 트레이를 가져왔다. 리예드는 그것을 가져다 에이젠의 책상 앞으로 가져갔다. 에이젠은 리예드가 가까이 온 걸 알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눈은 신문기사의 글자를 읽고 있었다.
리예드는 아주 점잖은 손길로 얼음물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에이젠은 그것을 잽싸게 낚아챘다. 그가 화를 삭이려는 듯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리예드가 겨우 한시름을 놓은 채 발걸음을 돌렸다.
뒤돌아 두 걸음 정도 앞으로 걸어갔을 때 뒤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챙그랑-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리예드가 뒤를 돌아봤다. 소리만 들어도 유리컵이 박살 난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봤을 때의 광경은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책상 위에 내리쳤거나 바닥에 내동댕이친 줄 알았건만 유리컵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형체를 잃은 유리컵을 더욱더 아작 내버리겠다는 듯이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버린 유리 조각이 그의 살을 파고들어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데도.
“주, 주인님. 손에서 피가…….”
안쪽에서 들리는 굉음에 바깥에 있던 하녀들도 문틈으로 기웃거렸다. 리예드는 그녀들을 향해 수건을 가져오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리예드.”
“예?”
뜨겁게 흐르는 광기 사이로 차갑게 식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출정한 사이, 분명 클라리온 가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렇습니다.”
내내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던 에이젠의 눈동자가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정확해?”
리예드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라 덜덜거렸다.
“예……, 레이디 클라리온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시녀와 하녀들까지 성내에서 만나고 서신도 주고받으며 확인한 내용입니다.”
에이젠의 눈동자는 다시 느릿하게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도 이럴 수가 있다고.”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가 이런 이유여서는 안 됐다. 자신을 버리고 만날 다른 남자가 유다르여서는 안 됐다.
“내가 없는 사이 밀회를 나눈 게 아니면 어떻게…….”
에이젠은 피를 뚝뚝 흘리는 손에 겨우 힘을 풀었다. 가엾게도 그 안에서 사투를 벌이던 유리 조각들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아니지, 아니야…….”
매서운 눈매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내가 부족한가.”
“아닙니다, 주인님. 일단 손부터 좀…….”
리예드는 곧 하녀들로부터 물수건을 전달받았다. 힘없이 툭 떨어진 그의 손을 잡아 핏줄기를 닦아냈다. 분노를 못 이겨 리예드를 밀쳐낼 줄 알았으나 그는 의외로 고분고분해졌다.
“로아가 날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에이젠은 리예드에게 저번과 같은 질문을 했다.
“잘 모르겠지만 분명 사정이 있으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일촉즉발의 순간. 리예드는 그의 상처를 살피느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갑자기 태도가 변한 걸 보면 레이디 클라리온의 힘으론 이겨낼 수 없는 사정이었을 겁니다.”
리예드의 말에는 에이젠도 동감하는 바였다.
“그래서 더 인정할 수 없어.”
붉은 눈동자는 살벌한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이건 로아가 행복해지기 위해 한 선택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