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조력자
원하는 대로 굴러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클라리온 가로 돌아간 것도 잠시였다. 유다르는 기다리지 않고 클라리온 가 일가족 전원을 황실로 초대했다. 클라리온 백작은 낯빛이 어두운 로아에게 혼인의 의사를 몇 번이나 물었다. 그러나 로아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비가 되기 싫단 말도, 되고 싶단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순리에 따르듯 움직일 뿐이었다. 황실로 떠나기 전 치장을 할 때도 꼭 영혼 없는 인형을 꾸며주는 기분이었다.
그 누구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로아의 태도는 황제의 앞에서도 변함없었다. 그저 배운 대로 예를 갖추어 인사를 나눌 뿐, 자신의 의견은 조금도 내지 않았다.
본격적인 식사 자리가 시작되기 전, 유다르는 로아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드디어 우리만의 시간이 왔군그래.”
그는 두 팔 벌려 로아를 환영했다. 그러나 로아는 정색하고 뒤로 물러섰다.
“약속하셨잖습니까.”
로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에게 다가서던 유다르의 걸음도 멈추었다.
“단둘이 있을 땐 절대로 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의 유효기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가.”
“앞으로 계속입니다.”
로아는 유다르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온몸으로 그를 외면한다는 듯 어깨를 틀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유다르를 화나게 하기는커녕 흥미만 돋울 뿐이었다.
“그래. 네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마.”
유다르는 로아를 세워둔 채 소파 쪽으로 걸어가 편하게 앉았다.
“어차피 넌 나한테 넘어오게 되어있다. 네가 권력의 맛을 아직 못 봐서 그래.”
그는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던 책자를 펼쳤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위해 준비된 각종 자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다르가 가장 먼저 고른 건 웨딩드레스 샘플북이었다.
“결혼식 땐 어떤 드레스를 입고 싶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결혼식’이란 단어에 소름이 쭉 올라왔다. 로아는 굳은 표정으로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라면 누구나 결혼식과 웨딩드레스에 로망이 있을 터이니, 내 이것만은 너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없습니다. 그런 로망.”
로아는 유다르의 호의를 단칼에 잘라냈다.
“로망이 없다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러지 말고 이리 오거라.”
유다르는 샘플북에 그림으로 디자인된 드레스의 형태를 살피더니 로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어깨 골격, 골반, 상하체의 비율까지. 음흉하게 훑는 그의 시선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
“몸매가 가냘프고 여리여리한 데에 비해 가슴과 골반이 있으니 머메이드 라인이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로아는 저의 몸을 훑는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투명하고 맑을 줄만 알았던 푸른 눈동자에 살기가 서려 부들부들 떨렸다. 유다르에게 로아는 보면 볼수록 재밌는 존재였다. 로아는 즐거워 보이는 감정이 드러나는 유다르가 가증스러워 버틸 수 없었다.
마음도 없는 결혼식에 의사를 내비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 의견도 내지 않으면 유다르의 뜻대로 흘러갈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골라준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만은 싫었다. 그의 로망을 저에게 실현시키지 않길 바랐다.
“웨딩드레스를 입어본 적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샘플북을 넘기던 유다르의 손이 멈추었다. 당찬 걸음으로 걸어온 로아는 유다르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로망을 이루어서인지 지금은 딱히 아무 생각 없습니다.”
로아는 유다르가 보던 샘플북을 제 쪽으로 가져갔다. 책자를 넘겨보던 로아는 한 페이지에 멈췄다. 한 디자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유다르에게 보여주었다.
“그땐 이런 느낌의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유다르가 말한 머메이드와는 전혀 반대의 분위기였다. A라인으로 풍성하게 떨어지는 드레스 라인은 하반신보다는 상반신의 몸매를 강조하기 위해 어깨와 등을 과감히 드러낸 디자인이었다.
“하.”
유다르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테이블을 돌아 로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로아는 머리 위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음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감히 내 신부가 될 여자가 어디서 웨딩드레스를 입어보았단 말이냐.”
유다르는 고개를 들지 않는 로아의 턱을 잡아 억지로 저를 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로아는 살기 띤 눈으로 정면으로 맞섰다.
“난 트로네 대공과 결혼한 적 있습니다.”
“뭐?”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유다르는 잠시 묵직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때 아주 눈부시게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었습니다. 그의 앞에서 몇 벌이나 갈아입었죠.”
그때를 떠올린 로아는 아주 잠시 경계를 풀었다. 푸른 눈동자에 서렸던 음침한 기운은 사라지고 황홀한 때를 기억하듯 우수에 젖은 눈이 되었다.
유다르는 로아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파혼했다. 그 이후로 로아는 유다르와의 일정을 소화하기도 버거웠을 것이다. 따로 트로네 대공과 만났을 만한 접점도 없었다.
“망상에 미쳐있구나.”
한낱 환상에 젖어있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진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로아의 입으로 그와 결혼했다고 하는 말은 영 듣기 불편했다.
유다르는 손아귀 안에 잡힌 로아의 턱을 놓지 않겠다는 듯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잘 봐. 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에이젠 트로네가 아니야.”
아무리 망상이라도 고까웠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들 그녀의 마음속에 아직도 에이젠 트로네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썩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으니.
강하게 나오는 유다르에도 로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 입매를 틀어 올려 비소를 흘리기까지 했다.
“태자 저하와 트로네 대공님을 헷갈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속 시원히 다 내뱉고 싶었으나 뒷말은 황족의 위상을 위해 생략하기로 했다.
로아의 능욕에도 유다르는 잠시 정색할 뿐 곧 입꼬리를 싹 말아 올렸다.
“방향을 잘못 잡았어, 로아.”
움켜쥐었던 턱을 놓았다. 그러더니 그의 손가락이 로아의 뺨을 훑었다.
“네가 그렇게 건방지게 굴수록 난 너한테 더욱이 빠져들 수밖에 없거든.”
어느 한쪽도 물러나지 않는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
“클라리온 백작. 훌륭한 아들들만 둔 줄 알았더니 현명하고 심성 고운 딸까지 있었다니 몰라보았소.”
클라리온 백작 가의 구성원들은 식사 자리에서 황족과 마주 앉았다. 모두가 긴장한 듯 편하게 있지 못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면서 테이블 밑으론 땀이 흐르는 손을 옷가지에 훔치곤 했다.
그중에서도 로아는 공허한 눈으로 테이블 위 음식들만 바라봤다.
“앞으로도 기대가 큰 가문일세.”
“과찬이십니다.”
클라리온 백작은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낯빛이 어두운 로아였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이런 자리에서까지 제 기분을 표출할 정도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황실과 사돈을 맺는 자리에서 죽을상을 하고 있다니. 어찌 보면 무례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아의 옆에 앉은 카일론이 테이블 밑으로 그녀의 발끝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로아는 눈치 주는 카일론의 발길질을 피해버릴 뿐, 딱히 자신의 태도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우리 황족들부터 소개하도록 하겠소.”
드디어 서로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 때마침 드르륵, 하고 연회장의 문이 제멋대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누가 감히 황족과 사돈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을 방해하는가. 그러나 사용인들도 훼방꾼에게 쩔쩔매는 얼굴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로아는 그의 얼굴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렴풋한 기억이 그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오필리안!”
성이 난 유다르의 목소리가 부른 이름을 듣고야 정확히 기억이 났다.
‘진격을 중지하라. 명령이다. 진격을 중지하라.’
그는 탈출한 에이젠과 자신을 도우러 왔던 황자 오필리안이었다.
황실 기사단에게 둘러싸여 물러설 곳 없던 그때. 유일하게 오필리안이 다른 기사단원들을 이끌고 와 에이젠을 호위했다.
위급한 상황이었던지라 로아는 왜 오필리안이 에이젠을 도우러 왔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에이젠이 죽고 다시 시간을 되돌아온 이후로 그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믿어볼 만한 자였다. 로아는 다시 희망을 얻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늦다니!”
“그만하거라.”
발끈한 유다르를 중재시킨 건 황후였다. 오필리안은 저를 향해 화를 내는 유다르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비어있던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쪽은 황녀 티타니아이고…….”
황족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하는 시간에도 로아는 오필리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로아의 짙은 시선을 느낀 오필리안 역시 로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은 황자 오필리안.”
그는 분명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몰라도 유일하게 황족 중에서 유다르가 아닌 에이젠의 편을 들었던 남자니까.
내내 인형처럼 무표정으로 있던 로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생기가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