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54)화 (54/107)

54. 진보할 세계를 위한 혁명

“조국의 안녕한 미래를 위해 잔을 들기로 합시다.”

단란한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로아는 말없이 오필리안만 흘긋거렸다. 기회를 잡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눈치를 주다 보면 그는 분명 알아채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로아는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 그와 에이젠의 관계성에 대해 알아두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가 에이젠의 편을 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걸 알았다면 더 쉽게 제 쪽으로 돌아서게 만들었을 텐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에이젠과 짧은 신혼을 보내면서 오필리안과 교류를 나눈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

“귀빈 객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클라리온 일가족들은 사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귀빈용 건물로 이동했다.

로아는 이곳이 익숙했다. 참고인 신분으로 황실에 소환되었으나 공범 의심을 받고 가두어졌던 그 방이었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

사용인의 물음에 로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허탈한 눈으로 익숙한 방의 구조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탈출할 수 없도록 밖에 잠금장치를 달아놓는 등 개조를 해뒀던 그때와 달리 원형은 훨씬 고급스러웠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있으십니까? 방은 얼마든지 있으니 바꿔드릴 수 있습니다.”

로아는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빈 객실을 담당하는 사용인 역시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애…….”

“네?”

“아, 아닙니다.”

자신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황실의 어린 하녀 애나. 로아는 하마터면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이름으로 부를 뻔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애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을 조력한 죄로 황실에서 잘리거나 심하면 처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반역도모 공범으로 끌어들여져 어린 나이에 사형을 당했을지도.

끔찍한 상상을 하던 로아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어차피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시간을 되돌아 왔으니 이제 그러지 않도록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모두의 미래를 바꿔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아니, 괜찮아요. 신경 써주어 고맙습니다.”

방을 둘러본 로아가 복도로 나왔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주변 구조를 익혀두고 싶었다. 고개를 돌리던 찰나에 바로 앞까지 와있던 누군가와 맞부딪쳤다.

“안녕하십니까, 형수.”

오필리안이었다. 그를 마주한 로아는 잠시 멈칫거렸으나 곧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애나. 자리 좀 비켜줄래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애나는 두 사람의 수상한 접촉에도 별다른 의심 없이 자리를 떴다.

가장 도움을 바랐던 사람이지만 정보가 없는 상태에 마주하니 긴장감이 올랐다.

“아직 정식 혼인을 한 것도 아닌데 말씀을 낮추시지요.”

“그럴 수 없죠. 이제 제 형수 될 분이신데.”

오필리안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었다. 삐딱한 태도로 로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런데 왜 아까 날 뚫어져라 본 겁니까.”

그녀가 보냈던 사인을 그도 조금은 알아챈 듯했다.

“형 몰래 내게 할 말이라도 있다면 하시죠.”

오필리안 역시 로아에게 흥미가 있어 보였다.

현재로서 그나마 가능성 있는 가정은 딱 하나 있었다. 에이젠을 몰아내려던 유다르와 달리, 그를 두둔했던 오필리안은 유다르에 반(反)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

“믿으셔도 좋습니다. 함구라면 자신 있으니까.”

오필리안의 유혹을 덥석 물 필요까진 없었다. 아직 그에 대한 탐색이 부족한 상태에서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되돌아온 시간이니만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행동이나 결정에 신중해야 했다.

“아뇨,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벌써 오필리안에게 의지하기엔 이른 타이밍이었다.

“형과 결혼하기 싫으시지요?”

오필리안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유다르가 약혼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필리안은 현장 분위기만 보고 그들의 관계성을 정확히 파악했다.

“하긴. 누가 저런 또라이 와이프가 되고 싶어 하겠냐마는.”

오필리안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 웃음이 터져 배꼽을 잡았다.

아무리 악감정이 있다 해도 감히 황실 안에서 황태자를 욕보이는 말을 했다. 로아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오필리안의 속내를 조금씩 읽어낼 수 있었다. 유다르를 향한 오필리안의 악감정은 어림짐작한 것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과거에 목숨이 위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로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배를 잡고 깔깔대던 오필리안은 그제야 웃음을 멎고 로아를 내려다봤다.

“그때 오필리안 황자님께서 도와주러 오신 적 있지요.”

오필리안이 와준 덕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가 끌고 온 루크티아의 기사단들이 에이젠에게 무기를 건네주었다. 그때 에이젠의 지시대로 도망갔다면 에이젠은 무사할 수 있었을까. 이미 지나간 일에 ‘만약’을 대입할 수 없다지만, 로아는 자꾸만 새로운 가정을 하곤 했다.

“물론 도와주셨을 뿐, 살려주지는 못했지만…….”

오필리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오필리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시간의 오필리안은 로아를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아, 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로아는 그제야 싱긋 웃으며 해명했다.

“꿈에서 황자님을 뵌 적이 있어 실제로 뵙고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선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꿈이라 둘러댔지만 그가 저의 말을 믿어줄지에 대한 간단한 시험을 해본 셈이었다.

“그래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만 것입니다. 그 외의 이유는 없습니다.”

오필리안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내가 형수의 꿈에서처럼 현실에서도 도와주길 바랍니까.”

고개를 숙인 그가 로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로아는 이번에도 그를 피하지 않았다.

“마침 잘됐군요. 나에게도 계획이 있는데 들어보겠습니까?”

오필리안은 생각보다 쉽게 저의 패를 내보였다. 로아는 이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지금 제국의 체계와 정치 방향에 대해서 꽤나 큰 불만을 가진 사람이라서 말이지요.”

그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늘어진 눈은 초점을 잃었지만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로아에게 조력자가 필요했듯, 오필리안에게도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는 현 체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르에 반하여 에이젠의 편에 선 것이다. 로아는 이제야 그가 했던 행동의 개연성을 찾아냈다.

“형수가 내게 협조해주기만 한다면…….”

“아니요.”

그러나 로아는 단칼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딱 여기까지. 자신의 원하는 방향과 그의 패는 전혀 달랐다.

“나는 반역에는 영 관심이 없습니다.”

반역을 의심받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일은 잔뜩 생긴다. 로아는 지긋지긋한 그때를 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싫어도 이렇게 끌려가듯 혼인을 준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로아의 눈은 전혀 휘어지지 않았으나 입꼬리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냈다.

“반역이라뇨. 어휘 선택이 조금 그렇습니다.”

오필리안은 패를 보이자마자 발을 빼버리는 로아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이건 반역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진보할 세계를 위한 혁명.”

“나는 반역이고 혁명이고 관심이 없습니다.”

오필리안의 어휘 수정에도 로아는 거절 의사를 분명히 내비쳤다.

“기회를 주어도 걷어차겠다는 말입니까.”

오필리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황자님의 의견 또한 존중합니다.”

로아는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를 단순히 파혼하는 데에만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반역을 도모해야 된다면 말이 달라진다.

만일 반역에 성공한다면 에이젠이 다시 저를 데리러 올 것이다. 겨우 에이젠이 저를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그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 순 없었다.

또한 실패한다면 포춘텔러가 말한 ‘죽음’에 가까워지고 말 것이다.

로아는 자신이 모르는 미래에 대해선 함부로 나아갈 자신이 없었다.

“다만 우리가 조력하는 관계는 될 수 없을 거란 말입니다.”

대화를 마친 로아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전한 후 발걸음을 돌렸다. 오필리안의 옆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로아의 발목을 잡았다.

“에이젠 트로네를 만나게 해드릴까요?”

에이젠의 이름이 나오자 로아는 곧바로 주춤거렸다. 굳센 척하는 그녀의 유일한 아킬레스건. 동요하는 모습을 감추지도 못할 만큼 발목을 잡는 이름이었다.

“솔직히 말씀하시죠. 지금이 아니면 평생 그를 만날 기회는 없을 겁니다.”

에이젠의 이름만 나와도 파들거리는 로아에 오필리안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로아의 뒤를 따라 걸어간 오필리안이 그녀를 가로질렀다.

“형이 두 사람을 만나도록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 인사는 충분히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로아는 에이젠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날 정도로 미련이 남았다. 비록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싶은 입장이었다. 그럴 수 없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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