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마지막 밤
“아직 트로네 공에게서 미련을 떨쳐내지 못했잖아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당신은 제 형수가 될 겁니다. 매사에 싫증을 느끼는 변덕쟁이 형님도 한 번 문 건 결코 놓지 않는 맹수 기질이 있거든.”
오필리안은 가엾다는 눈으로 로아를 훑었다.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차기도 했다.
“도망가라는 게 아니라, 작별 인사라도 하란 말입니다.”
오필리안은 로아를 정확히 통찰하고 있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제안에도 이리도 나약해진 모습을 드러냈으니.
“마지막 밤이라도 보내던지. 그럼 마음도 다 정리될 겁니다.”
마지막. 도대체 그 마지막은 언제가 진짜 마지막일까.
로아는 에이젠을 만날 때마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처음 그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도, 루베른 영지에서 클라리온 가로 돌아왔을 때도,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훔쳐 달아난 그를 쫓아갔을 때도.
하지만 전부 마지막이 아니었다.
결국 로아가 마지막으로 본 에이젠은 짙은 원망이 담긴 눈으로 저를 노려봤던 눈빛이었다. 또한 그의 주변엔 수많은 귀족 가문의 여인들이 있었다.
에이젠이 본 마지막 로아 역시 유다르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쫓아가는 모습이었다.
하고 많은 날 중에 하필이면 그게 마지막.
용납하기 힘들어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렸다. 그러나 로아는 애써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정을 모른 체 밀어냈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차갑게 식은 이성은 더는 그를 만나지 말라고 지시했다. 아직도 요동치는 그를 향한 깊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를 만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더는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리게 될 걸 알았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습니까?”
“네.”
견고해진 마음은 확실한 거절의 소리를 냈다.
“그럼 황자님께서도 평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필리안에게 꾸벅 인사를 건넨 로아가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가 문이 닫힐 때까지 오필리안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차단벽이 생기고서야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바라봤다.
로아의 단호한 태도에도 오필리안의 생각은 여전했다.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그녀에게 닿지 못할 비웃음 섞인 한 마디를 남긴 오필리안은 뒤늦게 발걸음을 뗐다.
***
황실에서 하루를 보낸 클라리온 가 일가족들은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영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로아는 곧바로 결혼식 준비를 해야 했으므로 돌아가지 못하고 황실에 남아야 했다. 카일론까지 없었다면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유다르는 로아를 웨딩드레스 숍으로 데려갔다. 황실에서 준비하는 결혼식이니만큼 제국 최고의 재단사들이 맞춤으로 드레스를 제작해왔다.
로아는 유다르가 미리 선별해놓은 드레스 리스트를 확인했다. 그의 앞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야 한다니. 벌써부터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로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분고분 움직였다. 이게 되돌아온 시간의 제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드레스를 입은 로아는 거울 속 제 모습을 살피지도 않았다. 피팅을 마친 후 숍 마담이 탈의실 커튼을 젖혔다.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있던 유다르는 보고 있던 샘플북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눈앞에 펼쳐진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로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곧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의 입꼬리에 앉았다.
“음, 잘 어울리네.”
간결한 칭찬마저도 듣기 싫었다. 로아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급한 손길로 탈의실 커튼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럼 이거로 하죠.”
빠르게 진행하고 싶은 로아와 달리 유다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입혀보고 싶은 게 이만큼이나 있어.”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샘플북을 펼쳐 로아에게 보여주었다.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각종 드레스 디자인이 수도 없이 많았다. 로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묵직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다음은 이걸로 준비해.”
“알겠습니다.”
유다르는 곧바로 다음 디자인을 선택했다. 종업원들은 그가 가리킨 드레스를 준비했다. 탈의실 커튼이 닫히면서 로아의 망연자실한 얼굴은 거울 속의 자신만 보게 되었다.
“피팅 도와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로아가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기려 했다. 그러나 로아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저…….”
당황한 종업원이 로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잔뜩 화가 난 듯 붉으락푸르락해진 로아에게 정중한 부탁도 건넬 수 없었다.
첫 번째 드레스를 입은 시간보다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려 두 번째 드레스 피팅이 완료됐다.
또다시 커튼이 걷히고 로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번 드레스는 유다르가 특히 눈에 두고 있었던 몸매가 잘 드러나는 머메이드 라인 드레스였다.
“역시 이 드레스가 잘 어울릴 줄 알았다니까. 좋은 몸매는 과시도 하고 그래야지.”
유다르의 시선은 첫 번째보다 더욱 길고 짙게 닿았다. 마치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듯 그는 로아를 세워놓고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어울리는 게 하도 많아서 고르기 곤란할 정도야.”
유다르는 다음으로 로아에게 입힐 드레스를 골랐다.
“갈아입기도 힘드니까 이제 그만하고 대충 결정해요.”
로아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주변에 있던 종업원들과 기사들이 놀란 토끼눈으로 로아를 바라봤다. 그러나 유다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신중하게 골라야지. 그것도 이 황태자 유다르의 신부인데 대충 골라서 되겠어?”
테이블에 놓여있던 펜을 집은 유다르는 샘플북 위에 무어라 끄적거렸다. 그러곤 마담에게 샘플북을 건넸다. 샘플북엔 앞으로 그녀가 더 입어봐야 할 드레스에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세 벌만 더 입지.”
유다르는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곤 다리를 꼬았다. 로아는 거만한 그를 노려보았으나 종업원이 후다닥 두 사람 사이에 커튼을 쳐버렸다.
이번에도 종업원들이 그녀가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도록 도와주었다. 반대편에선 그녀가 입어야 할 드레스들이 하나씩 들어왔다.
“악!”
참지 못한 로아가 빽 소리를 질러버렸다. 얼핏 바깥쪽에서 들으면 드레스를 갈아입다가 살이 집히는 등 단순한 사고로 인한 비명 같았다. 그러나 그런 사고 따윈 없었다. 단지 제 성미를 이기지 못한 로아가 분노를 표출하고 만 것이다.
“크크크큭.”
유다르는 그 비명이 고통이 아닌 짜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타이트한 드레스를 몇 번이나 갈아입는 것도 고역인데 바깥에서 킥킥대는 그의 웃음소리에 로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신경이 곤두선 로아는 점점 과격히 움직였다. 종업원들은 값비싼 맞춤 드레스에 흠이라도 갈까 노심초사했으나 황태자의 여자이니만큼 무어라 따질 수도 없었다.
그 뒤로 로아는 유다르가 시킨 대로 세 벌 정도의 드레스를 입어본 후에야 피팅을 마칠 수 있었다. 황실에서 격식을 차린 드레스를 입는 것도 불편하다 생각했으나 웨딩드레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시 제 옷을 입은 로아가 겨우 한 시름 놓은 얼굴로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아쉽지만 이것만 보곤 고를 수 없겠어. 다음에 다시 방문해서 다른 디자인들도 입어보도록 하자고.”
유다르는 겨우 한숨을 돌린 로아에게 청천벽력같은 말을 내뱉었다.
“예? 다시 올 시간이 어디…….”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정무 볼 일이 있어서 먼저 올라가 보겠다.”
제 할 말만 전한 그가 먼저 발걸음을 돌려 웨딩 숍에서 나갔다. 로아는 마담이 준비해 준 차가운 차를 마시며 열을 식혔다.
“하, 미친 자식.”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 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여줘야 한다는 게 이리도 고역일 줄 몰랐다. 로아는 주변에서 누가 듣든 말든 황태자를 욕보이는 말을 읊조렸다.
유다르가 가고 한참 뒤에야 갈 채비를 마친 로아는 마담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황실에서 보낸 마차와 기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스레 마차로 걸어가던 로아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도중에서 멈춰 섰다.
“드레스 피팅은 끝났습니까?”
저를 데리러 온 마차인 줄 알았으나 누군가 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린 건 오필리안이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로아는 달갑지 않은 눈으로 오필리안을 맞았다.
“저번에 했던 얘기를 좀 더 나누고 싶어서.”
오필리안은 에이젠 트로네를 만나게 해줄 테니 자신의 혁명에 협조라는 제안을 했었다. 그 제안이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터인데, 더 할 얘기가 있다니. 로아는 불편한 기색을 담아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오필리안은 전혀 굽히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늘만 벌써 한숨이 몇 번째 쏟아지는지 다 셀 수도 없었다. 상대방 의사를 눈곱만큼도 존중하지 않는 건 황태자고 황자고 똑같은 놈들이었다.
“오늘은 좀 피곤한데 다음에 얘기하는 걸로 하죠.”
로아는 오필리안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그의 옆을 지나쳐 마차에 올라타려던 찰나. 오필리안은 로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늘 황궁에서 열리는 정무회의에 트로네 공도 참석한 건 알고 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