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구해줄까
에이젠의 이름이 나오자 여지없이 로아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저녁에 시간을 내줄 테니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러나 로아는 굳게 다진 맘을 바꿀 생각 없었다. 이것 또한 오필리안의 계략에 말려드는 것뿐일 테니까.
“트로네 대공님을 만나지 않겠다고 저번에 말씀드렸는데요.”
고개를 숙인 오필리안은 로아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트로네 공이 형수를 매우 보고 싶어 하십니다.”
드레스 자락을 말아쥔 로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 형수보다 그쪽이 더 심하단 말이죠.”
황실 무도회 이후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느라 에이젠의 근황을 알 수 없었다. 로아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그의 안위는 괜찮은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에게도 마음을 정리할 마지막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
오필리안이 그와의 만남에 등을 떠미는 것은 밀회가 아닌 완벽한 정리를 권유하는 거였다. 그는 꽤 눈치가 좋았다. 로아와 에이젠이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니, 만나선 안 되는 관계란 걸 알았다. 마무리를 깔끔하게 매듭짓지 못해 서로를 더욱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회의는 9시에 끝납니다. 10시까지 후원으로 나가시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오필리안은 로아로부터 떨어져 제 갈 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이곤 사라졌다.
“현명한 형수께서 후회 없는 선택 하실 거라 믿습니다.”
***
황궁으로 돌아온 로아는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쓰고 있던 모자의 끈을 풀어 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
한동안 사그라들지 않는 분 때문에 앉지도 않고 서서 씩씩거렸다. 이미 그녀를 보필하는 사용인들은 로아와 유다르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유다르의 계략에 끌려든 가여운 희생양. 하루하루가 끔찍한 시간이었다.
사용인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로아가 무서워 가장 어린 애나의 등을 떠밀었다.
“아가씨. 주스 좀 마시면서 진정하세요.”
눈앞에 나타난 조그만 하녀 애나에 로아는 그나마 분을 삭였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주스를 들이켜면서도 묵직한 분위기를 풍겨댔다. 얼음이 조금도 녹지 않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도 주스는 깔끔히 비워졌다.
불안한 기분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방 안을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움직이기도 하고,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어 상처를 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해는 떨어지고 시계는 9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여태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시간을 확인한 로아는 지체할 새도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바깥에서 그가 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로아는 카일론의 방을 찾아갔다. 카일론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로아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카일론. 부탁이 있어.”
“무슨?”
“후원에 가고 싶어.”
카일론은 로아가 왜 이 시간에 그곳을 들어가려 하는지 물으려 했다. 그러나 결의에 찬 로아의 흔들림 없는 눈을 보고 더는 물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로아가 무슨 일을 꾸리고 있든 든든한 가족으로서 지원해줄 의지가 있었다.
카일론의 도움으로 로아는 비밀 통로를 통해 후원으로 들어섰다. 한 번 와본 적 있는 후원은 그다지 신비롭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자연풍경식 정원이었지만 유다르와의 시간만 남아 있는 이곳은 로아에게 그리 특별한 곳도 아니었다.
드넓은 후원 곳곳을 뛰어다니던 로아는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를 때까지 그를 찾아 헤맸다. 숨을 고르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로아의 시야에 제 발끝만 보였을 때 앞쪽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로아.”
그리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에이젠.”
고개를 든 로아가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두 남녀의 시선이 맞물렸을 때.
아무것도 아닌, 지독히도 싫었던 후원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자연풍경식 정원은 여지없이 아름다웠다. 향기로운 꽃내음과 풀내음이 차가운 밤공기에 짓눌려 아래에서부터 은은하게 올라왔다. 어둠 속에서도 휘영청 밝은 달빛이 한줄기 내려와 서로를 환하게 비추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먼저 발걸음을 뗀 건 에이젠이었다. 한 걸음씩 떼는 그의 폭이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 순식간에 로아의 눈앞까지 다가온 그가 아직 거친 숨을 몰아쉬는 로아를 와락 안았다.
“에이젠…….”
“보고 싶었어.”
놀란 로아가 그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바로 귓가에 와닿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달콤했다. 그래서 차마 모질게 밀어낼 수가 없었다. 머리는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은 그를 원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저를 기다린 걸까. 그의 품이 차가웠다. 마치 죽어가던 에이젠이 마지막 온기를 잃는 그 순간처럼.
그러나 그건 사라진 미래였다. 두 사람의 신체가 맞닿은 부분은 차가웠던 곳도 금방 온기를 피워냈다.
그때가 떠올라서 괴롭고 서글펐다. 또한, 그때와 달리 살아 숨 쉬고 따뜻한 온기를 가진 그를 확인해 안심이 됐다. 그를 살리기 위해 온몸으로 버둥거렸던 자신이 가여웠다.
복합적인 감정들이 얽혀들었다. 확실한 건 그녀를 괴롭히는 여러 감정들은 눈물을 흘리도록 재촉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표출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로아는 에이젠에게 나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찔끔 나오려는 눈물을 삼켰다.
“에이젠.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로아는 물리적으로 에이젠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 거절의 말에도 에이젠은 순순히 물러났다.
에이젠은 낯빛이 어두운 로아의 표정을 살피려 했다. 로아는 겉으로 드러나 버리는 제 감정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굴을 숨겼다.
“약혼 소식 들었어.”
재회의 감동을 더 느끼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에이젠의 물음에 로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걸 그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
그가 의심할 만한 범위에 로아는 단 한 번도 걸려든 적 없었다. 그가 무사히 출정을 다녀올 동안 꿋꿋하게 견딘 의지의 여자, 로아.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려 결혼하는 것도 아닐 터였다.
로아에겐 상황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다.
“우리 가문이 그렇게 권력 있는 집안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태자 저하의 청혼을 거절하겠어.”
결론은 어쩔 수 없었다는 추상적인 핑계. 그러나 에이젠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 파혼하지 않았다면 유다르를 거절할 명분이 되었을 테니까.
로아가 저를 거절한 이유는 권력에 따른 책임이 두렵다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족과 혼인이라니. 에이젠의 입장에선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나를 밀어냈어.”
그의 원망 섞인 목소리에 로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네가 행복해지길 바랐던 건데.”
로아는 그가 바란 삶의 전부였다. 저 때문에 그녀가 부담을 떠안는 게 싫어 신사답게 물러났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같은 이유로 불편해질 선택을 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로아는 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불안한 손끝을 꼼지락거리기도 했다.
분명 말하지 못할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에이젠은 날렵한 눈매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로아의 앞으로 다가선 그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화들짝 놀란 로아가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강한 힘으로 로아의 손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딱 한 가지를 물었다.
“후회해?”
무얼 숨기고 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둘러댄 변명 말고 저를 밀어낸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왜 황족과 결혼하기로 했는지.
이따위 질문에 돌아올 대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건 로아의 심정이었다.
행복하지 않을까 봐. 웃지 않을까 봐.
“후회한다면 내가 구해줄까.”
로아는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나. 그러나 나지막이 떨어지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힘을 빼버렸다. 에이젠은 사그라든 로아의 손을 더 제 쪽으로 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가까워졌다.
고개를 숙인 에이젠은 로아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널 불행하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로아의 팔이 움찔거렸다. 하마터면 두 팔을 뻗어 그를 안아버릴 뻔했다. 충동을 겨우 억누른 로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바람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로아라는 한 여자를 취하려는 게 아닌, 단순히 그녀가 맑은 웃음을 유지하고 행복하길 바란 것.
그것을 위해 말끔히 물러났다. 그러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 모습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좀 더 확실히 말했어야 했는데. 좀 더 자연스럽게 연기했어야 했는데.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 앞에서 자꾸만 진실이 드러나는 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변수였다.
“아니. 난 지금이 좋아.”
로아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표정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비록 엇갈리고 말았지만 에이젠도 이만 날 잊고 다른 사람을…….”
로아의 말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에이젠의 손이 올라왔다. 로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손가락이 로아의 눈가를 훔쳤다.
“울면서 얘기해봤자 설득력 없다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