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57)화 (57/107)

57. 행복한 죽음, 괴로운 삶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울먹거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로아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던 에이젠의 손길로부터 벗어났다. 그제야 붉어진 눈시울에서 뜨겁게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황급히 소매를 끌어당겨 젖은 눈가를 닦아냈다.

로아는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뜸을 들였다. 숨을 들이쉬고 마시는 과정을 하나하나 셀 정도로 호흡에 집중했다. 수습하기 전에 말을 더 이었다간 주체할 수 없이 터져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에이젠은 로아가 진정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나도 알아. 내가 언젠간 후회할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거.”

그러나 ‘거래’라는 게 늘 그렇듯, 대가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고통의 시간. 그리고 결론은 죽음. 로아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에이젠.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여기서 그의 손을 잡아버리면 다시 그때와 같은 일이 반복될 테니까.

에이젠을 질투한 유다르가 갖은 핑계를 갖다 붙여 그를 반역자로 몰고, 결국은 쫓기는 신세가 되다가 죽음에 이를 것이다.

“그냥, 그냥 아무것도 모른 척해주면 안 될까?”

그때 에이젠의 말대로 먼저 도망쳤다면 운 좋게 죽음을 피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까. 언제까지 황실로부터 쫓기는 신세를 연연하며 살 수 있을까.

에이젠의 명예를, 그리고 와이프인 저를 탐하기 위해서. 유다르는 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서라도 원하는 걸 취할 작자였다.

“널 미워한 적 없지만, 내가 널 미워했다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괴롭지만 그를 살리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다.

유다르를 선택한 건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 이 순간에도 후회하고 있다.

그러나 이로써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는다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은 절대 후회하지 않은 선택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내가 힘들어 보여도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로아는 결국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서러운 감정은 목구멍을 가득 메웠지만 고집스럽게도 뒷말을 이어갔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묻지 말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폭 감쌌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턱 끝에 맺혀 밑으로 투둑 쏟아져 내렸다. 얼굴은 가렸지만 들썩거리는 어깨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물 흐르는 대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 안 되는 걸까?”

에이젠은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로아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에이젠 네가 이럴수록 난 더 괴롭기만 해.”

그러나 저 때문에 괴롭다 말하는 로아에게로 그의 온기는 끝내 닿지 못했다.

“겨우 잘해보고자 다잡았던 것도 네 앞에만 서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고…….”

그의 뜻대로 행복할 수 없는 게 더없이 슬펐다. 괴로운 자신을 보며 더 괴로워할 남자인 것도 알았다.

행복한 죽음, 괴로운 삶.

로아는 두 개의 선택지에서 ‘괴로운 삶’을 골라야 했다.

“로아.”

훌쩍거리던 로아의 울음소리는 그의 차분한 부름에 멎어들었다.

“그래, 미안해.”

에이젠은 더 이상 로아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눈물을 닦아주지도, 품에 안아주지도 않았다.

“다 내려놓을게.”

완전히 남이 되길 바라는 것. 로아에게도 에이젠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너도 날 피하지 마.”

오늘부로 서로를 향한 미련은 내려놓기로 했다. 서로를 걱정하는 것도 여기까지. 불안해 보여도 모른 척 지나가는 것. 그게 각자를 위한 최선이었다.

“네가 없는 시간은 나에겐 다 아무 의미 없는 날이겠지만.”

에이젠은 허탈한 웃음을 섞으며 말했다. 로아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바닥을 내렸다.

혹시라도 에이젠이 자신을 잃은 충격에 나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뒤집어놓은 이 시간들이 전부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다른 생각 안 해.”

에이젠은 로아의 얼굴만 보고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걱정하는 로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힘들지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어 보였다.

“악착같이 버텨왔던 주제에 나약하게 주저앉았다간 네가 나한테 실망하겠지.”

에이젠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좋았다. 동시대를 살아 숨 쉬는 동안 아직 많이 남은 시간 속에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를 위해서라도 에이젠은 자신을 비하하고 주저앉을 생각은 없었다.

“너와 함께할 수 없어도 못난 사람으로 기억되긴 싫어.”

그녀의 목에서 여전히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 빛깔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분명 타이밍은 돌아온다. 기회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는 그 한 가닥 희망만 가지고도 지금까지처럼 지독하게 버틸 자신이 있었다.

로아는 에이젠을 보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눈이 퉁퉁 붓고 짓물러 따가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마지막 순간을 눈에 담으려 벌게진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았다.

“울지 마, 로아.”

에이젠은 로아와 거리를 유지한 채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그의 눈은 점점 슬픈 모양으로 변해갔다. 그의 손은 로아를 향해 뻗었다가 금방 방향을 틀어 제 심장 쪽으로 가져갔다.

“네가 울면 내 심장이 다 찢어질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면 심장박동은 여지없이 빨라졌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에 닿는 울림은 평소와 달리 불규칙하고 불안했다.

굳건한 남자의 모습만 보이던 에이젠이 처음으로 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로아는 그 모습이 선하게 보여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 역시도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에이젠 역시 제 감정을 수습하듯 잠시 뜸을 들였다. 거친 그의 숨소리가 후원에 불어닥치는 바람 소리에 섞여들었다.

“그때 날 살린 게 너였으니까.”

그러니까 이 심장의 절반은 그녀의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심장을 꺼내서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멋대로 해달라고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에이젠은 숨을 쉬는 일분일초의 시간을 로아에게 구원받은 거라 생각했다.

“네가 없었다면 난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이딴 직위를 달고 이런 대우를 받지도 않았을 테니까.”

살기 위해 버둥거리던 모든 순간의 끝엔 항상 그녀뿐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시체 더미를 밟고 일어서 물 한 방울이라도 먹기 위한 추악한 생존본능은 이 역겨운 시간을 벗어나 다시 그녀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금빛 머리칼을 보기 위해서. 보고만 있어도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짙고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기 위해서. 웃음기가 섞인 달콤한 목소리로 불러주는 내 이름을 듣고 싶어서. 보드랍고 하얀 손을 맞잡기 위해서. 나를 향해 웃어주는 그 미소를 보기 위해서.

“네가 그렇게까지 고통받고 있다면 내가 물러나는 게 맞겠지.”

에이젠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째로 풀어냈다. 마치 어린아이를 안듯 조심스러운 손으로 검집을 들어 눈앞에 두었다.

로아와 떨어져 있어야 했던 수많은 시간. 그녀의 말대로 기사를 서임받기 위해 훈련을 받던 때,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맨몸으로 내던져졌을 때. 그 억겁의 시간이 한 장면씩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프지 말고. 울지 말고.”

버티기 힘들 때마다 그가 들여다본 것이 검집 위로 드러난 칼자루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준 그 자체. 에이젠은 로아를 직접 안아줄 수 없는 대신 칼자루 위에 입을 맞추었다.

“행복한 척이라도 해.”

에이젠은 검을 들고 로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리고 발밑엔 자신의 분신과 다름없는 검을 내려놓았다.

“그럼 네 말대로 네가 날 미워해서 버리고 다른 남자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착각이라도 해줄 테니까.”

에이젠은 고개를 들어 로아와 눈을 맞추었다. 마지막이 될 감정교류의 시간. 두 사람은 완전한 작별 인사를 준비했다.

끝까지 행복한 척 웃어주지 못한 로아에 비해, 에이젠은 따뜻한 미소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고마웠어.”

에이젠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의 오른손이 로아의 오른손을 살며시 잡았다.

로아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나마 잦아들었던 눈물이 또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불길한 기운이 로아의 전신을 감싸 사방에서 압박했다.

그의 온기가 닿는데도 이렇게 싫은 적은 처음이었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면 다시는 그를 느낄 수 없을 테니까.

로아는 차분하게 인사를 전하는 에이젠에게 아무 대답도 전하지 못했다. 메여버린 목은 소리를 낼 여력도 없었다.

“사랑했어.”

달콤하게 전하는 사랑 고백도 싫었다.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이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얼굴에서 손등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느긋한 움직임으로 그녀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입술이 하얀 살결 위로 짓뭉개졌다.

아주 짧게 닿았다 떨어졌던 평소와 달리 입맞춤은 길었다. 짧지 않은 시간에도 로아는 속으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주길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매정한 시간은 결코 멈춰 서지 않았다. 로아의 손등에서 에이젠의 입술이 떨어졌다. 다시 고개를 든 에이젠이 로아와 눈을 마주했다.

“나의 레이디.”

그의 눈시울마저 붉은 눈동자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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