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후회 없는 선택
인사를 마친 에이젠은 더 이상 로아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가 먼저 떠나고 로아는 후원에 홀로 남겨졌다. 온기도, 목소리도, 기척마저도 사라진 공허한 공간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더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한참을 넋 놓고 서 있던 로아는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뗐다.
터덜터덜 걸어 후원을 빠져나온 로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걸어가는 동안 몇 번이고 휘청거려 넘어질 뻔했다. 그래도 난간이나 벽을 꼭 붙잡고 넘어지지는 않았다. 이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혼자 서는 방법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계단을 올라온 로아는 제 방 앞에 서 있던 오필리안을 발견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로아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로아를 발견한 그가 팔짱을 풀고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애틋한 작별 인사는 다 나누셨습니까.”
걱정스러운 척 물었지만 그의 입꼬리는 씰룩거리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공감 감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냉정한 인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피곤합니다. 오늘은 일찍 쉬고 싶으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로아가 오필리안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오필리안은 제 옆을 지나치려는 로아의 팔을 붙잡아 다시 제 앞에 세웠다. 불쾌한 터치에 미간이 좁혀졌다. 날이 선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 버렸다.
“형수가 원하는 걸 들어줬으니 이제 내가 원하는 것도 하나 들어주셔야죠.”
하나의 폭풍이 휘몰아쳐 갔는데도 오필리안은 그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오필리안의 뻔뻔한 태도에 로아 역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예민한 감수성이 그녀를 마구잡이로 자극해서였을까. 늘 초연함을 유지하던 로아는 분노에 찬 두 눈으로 오필리안을 쏘아붙였다.
“저는 황자님의 제안을 받아들인 적 없습니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한 번 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반역인지 혁명인지에 가담할 생각은 없다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하게 의사를 전한 로아는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렇게 먹고 튀시겠다?”
오필리안은 로아의 뒤에 대고 비꼬는 듯한 투로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최대한 갈등을 만들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는 게 그녀의 성격이었다. 괜한 일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격해진 감정을 표출해 약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유를 잃은 로아는 오필리안의 도발에 넘어가고 말았다. 몸을 휙 돌린 그녀가 살기 어린 눈으로 오필리안을 마주 봤다.
“분명히 거절했음에도 황자님께서 억지로 자리를 만든 것 아닙니까.”
그가 에이젠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며 저를 기다리게 했을 것이 뻔해 분노가 치밀었다. 로아 역시 그가 기약 없이 저를 기다릴 것이 걱정돼 나가볼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잊지 못한 두 사람의 마음을 악랄하게도 이용한 것이었다.
“황자님이 계획 중이신 걸 태자 저하를 비롯한 황실 관계자에게 밀고할 생각도 없습니다. 피곤한 일에 말려들기 싫은 거뿐이니.”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르렁거리는 한 마리의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나름대로 위협을 지어 보이는 얼굴에도 오필리안의 입매에는 비웃음만이 가득했다.
“이 또한 후회 없는 선택이십니까?”
오필리안이 되물었다.
후회 없는 선택?
지금까지 그런 건 없었다. 그녀의 모든 선택은 후회할 걸 알면서도 저지른 일이었다.
“황자님의 계획을 함구해준 것만으로 저한테 감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족을 향한 그녀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거만해졌다. 할 말을 마친 로아는 더는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경질적으로 닫힌 문은 쾅- 하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굉음에 가까운 소리에 오필리안은 제자리에서 한쪽 눈을 찌푸렸다.
“나참.”
그는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골이 아파 왔다. 한동안 그녀가 들어가 버린 방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무리 인생이 팍팍하다 한들…….”
무언가를 생각하듯 허공으로 시선을 옮긴 그가 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제 손으로 수명까지 단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녀가 제 쪽으로 넘어오지 않았으니 다른 루트를 찾아야 했다. 플랜B를 떠올렸을 땐 피식, 하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
매일매일이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시간이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로아는 점점 메말라갔다. 배급되는 식사도 거의 먹지 않았고, 활동적인 일은 일절 거부했다.
코르셋을 꽉 졸라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버렸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이 되었을 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황태자의 신부였다.
“흐으으윽, 흐으…….”
신부 대기실에선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아의 준비를 돕는 몇몇 사용인들과 유다르를 제외하곤 아무도 이곳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하, 제발. 작작 좀.”
몇 년이나 제국의 골치였던 황태자에게 짝이 맺어지는 날이다. 그러니만큼 결혼식은 성대하게 준비되었고, 제국을 비롯한 주변 소국의 주요 인사들도 초대한 날이었다.
축복에 겨워야 할 날에 황태자비가 될 신부가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신부님, 괜찮으세요? 화장이 또…….”
아무리 화장을 덧칠해도 그녀의 눈물 줄기에 휩쓸려가는 건 금방이었다.
“눈 크게 뜨고 천장 봐주세요.”
로아는 수정 화장을 거부하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녀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던 사용인이 뒤쪽에 서있던 유다르의 눈치만 살필 뿐 어쩌질 못했다.
고집스러운 로아에 유다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나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보는 눈이 있어 성질을 억누른 그가 낮게 읊조렸다.
“아직 신부님이…….”
“다 나가라고.”
착 가라앉은 유다르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사용인들은 조용히 도구를 내려놓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조용해진 공간엔 로아의 훌쩍거림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이게 아주 황실 위상을 다 무너뜨리려 작정을 했구나.”
저벅저벅 걸어간 유다르는 로아의 앞에 섰다. 로아는 제 앞에 선 유다르를 보고 싶지 않아 두 눈을 감아버렸다.
“일부러 이러는 것이냐? 응?”
지긋지긋한 그의 목소리도 싫었다. 두 손으로 귀까지 막아버렸다.
소통까지 피하려는 로아의 태도에 유다르는 머릿속에서 빠직, 하고 이성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기 싫어 죽겠는데 팔려 간다고 온 제국에 떠벌리려고 이래? 작작 울라고, 작작 좀!”
“흐윽, 흑…….”
겨우 잦아들었던 울음은 유다르의 높아진 언성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흐어어어엉…….”
도저히 멎을 겨를이 보이지 않았다. 유다르는 로아의 울음소리에 골이 띵했다.
“그만하라고, 그만!”
유다르는 우는 로아를 보고 있자니 저 또한 울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발걸음을 돌려 로아에게서 멀어진 그가 허탈하게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때, 똑똑- 하고 바깥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이 날카롭게 선 유다르는 매섭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태자 저하. 들어가도 괜찮습니까.”
기척의 주인을 알아본 유다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카일론이냐.”
카일론이라면 저 대신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다르가 환하게 그를 맞이했다. 카일론은 유다르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로아를 흘겼다.
“잠시 시간을 주시면 제가 잘 달래보겠습니다.”
유다르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훌쩍거리는 로아를 노려봤다.
“책임지고 말끔한 상태로 돌려놓거라.”
카일론과 로아를 두고 바깥으로 나온 유다르는 복도에서 대기 중인 사용인들을 향해서도 소리치듯 지시했다.
“눈물 자국 하나 남기지 말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로 치장해놓거라.”
“예, 저하.”
그 소리를 끝으로 대기실의 문은 닫혔다. 로아는 카일론이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흡, 흑, 흐윽.”
“로아.”
카일론이 부드럽게 로아를 부르며 다가갔다. 앉아있던 로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을 귀 뒤로 다정히 넘겨주었다.
로아는 카일론의 등장에 조금은 마음을 놓은 듯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속상한 마음은 알겠지만 조금만 버티자. 부모님도 보실 텐데 이런 널 보내는 부모님은 얼마나 가슴 찢어지시겠어.”
부모님을 떠올리자 감정을 펑펑 쏟아내던 것을 참을 수 있게 되었다.
카일론은 울음을 참으려는 로아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등 뒤로 감추고 있던 것을 꺼내 로아에게 건넸다.
“자. 부케 만들어왔어.”
봉오리가 크고 연분홍 빛깔을 띠는 작약 부케였다. 부케를 받아든 로아는 익숙한 향을 맡았다.
“이 향은…….”
작약에서 날 리가 없는, 로아가 가장 좋아하는 향기였다.
“은목서 꽃은 너무 조그마해서 부케로 쓸 순 없지만, 로아 넌 이 짙은 향을 좋아했으니까. 잎을 따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섞어봤어.”
커다란 작약 꽃봉오리 밑에 갓 따온 듯 싱그러운 물기를 머금은 은목서 잎이 숨겨져 있었다.
“로아.”
카일론은 부케를 쥔 로아의 손을 감싸 잡았다.
“넌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아이였어. 그러니 네가 이렇게 슬피 울면 널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근심하게 될 거야.”
아무리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로아는 이 감정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파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심이 넓어 딸의 마음을 잘 공감할 부모님, 자상하고 든든한 오라버니들.
그리고 하객으로서 결혼식을 축하하러 올 사랑하는 에이젠.
침울한 제 모습이 이들 모두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착한 로아. 그러니까 밝게 웃어보자. 응?”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계속 후회하는 나날이 펼쳐질 것이다. 벌써부터 나약하게 스러져선 안 됐다.
“……응.”
행복한 척이라도 하기로 약속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