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59)화 (59/107)

59. 아디오스, 레이디 클라리온

황족의 결혼식은 귀족 가문의 결혼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대한 규모로 진행되었다. 로아는 두 번째로 웨딩드레스를 입고 홀 앞에 섰다. 그녀의 옆엔 다른 남자가 있었고, 결혼식을 축하해주러 온 하객들 역시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

문이 열리기 전 로아는 굳은 표정을 펼 수 없었다. 이 문이 열리면 하객들 앞에 진정한 신부로 서게 될 것이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공간, 잘 알지도 못하는 고위 인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하객들. 그 사람들 틈에 에이젠도 있을 것이다.

로아는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에이젠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괴로웠다.

“웃어, 웃으라고.”

유다르는 적나라하게 울적함을 드러낸 로아가 탐탁지 않았다. 그 역시도 잔뜩 성이 오른 상태였으나 귀빈들 앞에 비춰질 모습을 위해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입꼬리는 올린 채 복화술로 로아를 다그쳤다.

“귀한 걸음하여 참석해주신 하객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지금부터 위대하신 헤이든 제국의 희망, 위대하신 황태자 저하와 황태자비 저하의 결혼식을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하겠습니다.”

곧 결혼식이 시작되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신랑 신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그들을 축복하는 종소리가 울려왔다.

로아에게 이 종소리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경고음처럼 들렸다.

“앞으로 헤이든 제국을 이끌어갈 미래의 황제, 황태자 저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굳게 닫혀 있기만을 바랐던 문이 열렸다. 셀 수도 없는 하객들의 시선이 홀의 뒤쪽으로 향했다. 하객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유다르는 당찬 걸음으로 버진로드를 따라 걸어갔다.

여유로운 미소를 띤 그가 참석해준 귀빈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다음은 황태자 저하와 함께 헤이든 제국의 장래를 함께해주실 황태자비, 레이디 클라리온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클라리온 백작은 파들거리는 로아의 손을 잡았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에게 기대어 조금씩 발걸음을 뗐다. 하객 사이를 지나가면서도 로아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만을 향했다. 고개를 들었다가 어디에 있을지 모를 에이젠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만일 그를 발견한다면 기어코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클라리온 백작은 쥐고 있던 로아의 손을 유다르에게 넘겼다. 로아는 유다르를 따라 주례석 앞으로 왔다. 하객들을 등지고서야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은 좀처럼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곧 태양이 될 두 분을 위해 황제 폐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결혼식을 진행하던 시종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시종들을 따라 하객들 또한 황제가 등장하기 전 하나둘씩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유다르와 로아는 가장 마지막으로 인사를 전했다.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식장에 나타난 황제가 주례석 앞에 자리했다. 그의 양옆에 호위기사들이 줄을 지어 뻗어 있었다.

황제는 미리 적어온 주례문을 펼쳤다. 글자를 읽기 위해 입술을 떼려던 찰나. 삐이익- 하고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이 식장에 울려 퍼졌다.

“식을 중지하라.”

정체 모를 소음과 함께 누군가 엄격하게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회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회자는 사라지고 얼굴을 감춘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결혼식을 올리는 자리였다. 이 결혼식에 초대된 자는 헤이든 제국을 비롯한 주변 동맹국들의 고위 인사직에 종사하는 일부 가문들뿐이었다. 출입을 할 때도 엄격한 절차를 걸쳐야 했다.

그런데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자가 결혼식에 훼방을 놓았다. 이는 목숨을 건 행위나 다름없었다.

“뭐야?”

혼란을 느낀 하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식장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어떤 미친 자식이…….”

유다르가 호위기사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기사들이 수상한 자를 제압하려 움직인 순간.

“꺄아아악!”

하객석 쪽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누군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그 뒤엔 얼굴을 가린 수상한 자가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이 아닌 집단이었다. 하객석 곳곳에 숨어 무자비하게 주변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자객, 자객이다! 어서 도망쳐!”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피신하기 바쁜 하객들로 인해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황제 폐하부터 호위하라!”

수상한 자부터 제압하려던 기사들은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장 먼저 황제를 그다음으론 황족들을 최우선으로 보호해 피신시켰다.

“황족부터 우선적으로 호위해!”

“저하, 이쪽으로 내려오십시오!”

유다르 역시 혼란한 틈에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떠밀려가듯 도망쳤다.

“뭐야. 대체…….”

그 와중에 신부인 로아를 보호하는 자는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한 로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신없는 비명 소리와 질서 없는 움직임. 그 사이로 가끔씩 보이는 새빨간 핏자국과 피비린내.

로아는 그제야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가족들을 찾았다. 그녀가 찾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안전한 곳으로 신속히 피신했을까. 혹시라도 무차별적인 공격에 당한 건 아닐까. 불안한 생각에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로아는 마구잡이로 피신하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새하얀 웨딩드레스 때문에 거동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하객들은 로아의 기다란 드레스 끝자락을 무자비하게 밟고 지나갔다. 이리저리 이끌려지던 로아는 혼란한 틈 속에 몸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입고 싶지 않았던 드레스는 그녀의 온몸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혼란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저를 향해 뻗어진 손을 발견했다.

로아는 그 도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붙잡았다. 그 손길이 저를 강하게 당겨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구해준 자의 얼굴을 확인한 로아는 직감했다. 자신이 잡은 건 썩어빠진 동아줄이었다는 것을.

“……황자님?”

모두가 패닉에 빠진 상태. 로아를 일으켜준 오필리안만이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를 흥미롭게 내려다봤다.

“괜찮으십니까, 형수?”

그러곤 평안하게 안부를 물었다. 황족들은 모두 최우선으로 피신을 했는데 오필리안만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하객들을 향해 흉기를 휘두르던 자객들도 오필리안은 건들지 않았다.

“이게 다……, 황자님이 저지른 짓입니까.”

로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모종의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해하면서까지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과거에 그가 에이젠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크큭.”

그녀의 물음에 오필리안은 비웃음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내가 계획한 일이야.”

오필리안은 아직 꽉 붙들고 있는 로아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니라고 해봤자 다 눈치챘겠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지독한 바보거든요.”

오필리안은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할 말을 이어갔다.

“황태자는 자신의 호화로운 결혼식을 위해 허용 범위를 넘어선 시종을 끌어모았습니다. 어딘가에 인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면 당연히 비어버리는 곳이 있거든.”

잔인한 테러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오필리안과 로아의 주변만이 고요했다.

“결혼식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호위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묻게 되겠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제국민들의 세금을 사치스러운 결혼식에 쏟아부었는지 드러나게 될 테고요.”

제 계획을 읊는 유다르는 중간중간 웃음소리를 섞기도 했다. 로아는 뒷목이 빳빳해지면서 혈압이 쭉 오르는 게 전부 느껴졌다.

“향후 황제가 될 황태자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겁니다.”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이렇게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이 자객들을 제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형을 짓밟고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는 거죠.”

로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소란 속에 가족들, 그리고 에이젠의 안위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들 또한 자객들이 멋대로 휘두르는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러게 왜 내 계획에 따르지 않아서 이리 고생해요, 형수.”

로아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눈물 날 정도로 불안에 떨던 것들이 증발했다. 오로지 무기력만이 그녀의 뇌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거 알아요?”

오필리안은 꽉 쥐었던 로아의 손을 놓았다.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사람이 여기에 형수밖에 없어.”

그는 두 손으로 로아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희번덕희번덕 커진 두 눈으로 그녀를 같잖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내가 형수를 살려둘 일은 없다는 뜻이야.”

섬찟한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위험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잠깐…….”

“아, 이제 형수도 아닌가?”

오필리안은 로아의 어깨를 잡은 채 몸을 휙 돌렸다. 로아의 발뒤꿈치쯤에 닿은 건 계단 모서리였다.

“아디오스.”

오필리안은 로아의 몸뚱이를 내던지듯 놓아버렸다.

“레이디 클라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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