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이성과 감정 사이
몸이 기울어지면서 로아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자신의 시간만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그녀의 시야엔 장검을 든 자객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로아의 몸뚱이가 제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윽.”
딱딱한 바닥에 몸이 부딪치면서 올라오는 고통은 시야를 아득하게 했다. 낮은 신음을 할 새에도 저를 기다리고 있던 자객에 로아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눈꺼풀을 반쯤 밀어 올렸을 때. 이미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덮쳤다. 순간적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로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챙, 하고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윽!”
로아를 공격하려던 자객이 저 멀리고 나가떨어졌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은 그보다 더 멀리 날아간 채였다. 로아는 아직도 그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를 올려다봤다.
어마어마한 몸집은 뒷모습만으로도 살벌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자객에게서 흉기를 빼앗은 그가 다급한 놀림으로 뒤를 돌아봤다. 로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로아, 안 다쳤어?”
그 얼굴을 보자마자,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로아의 눈가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에, 에이젠…….”
오늘의 결혼식에서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에이젠이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 다른 기분이었다. 그를 맞닥뜨리자 불안했던 기운이 가라앉고 안도의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자신을 며느리로 받기로 한 황족들은 최우선적으로 호위를 받으며 피신했다. 직계 혈통이 아닌 신부는 홀로 버려져 이리저리 치였다. 아수라장이 된 하객들 사이에서 가족들은 어디로 갔나 찾지 못해 걱정 또한 이만저만 아니었다. 거기다 모략에 가담하지 않았단 이유로 오필리안은 저를 죽이려 했다.
정말 죽을 뻔한 순간에 나타난 에이젠은 말 그대로 구세주였다. 로아는 그 짧은 시간에도 그를 향해 모질게 굴었던 제 말과 행동들이 뇌리를 스쳐 갔다. 차오르는 죄책감에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감정을 교류할 새도 없었다. 에이젠의 등 뒤로 누군가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뒤, 뒤에!”
너무 늦게 눈치챈 건 아닐까. 하지만 에이젠은 날렵한 반사신경으로 뒤에서 공격하려던 자를 단숨에 제압했다. 자객의 팔을 꺾어 땅바닥에 짓누른 채로 에이젠은 고개를 들어 로아를 바라봤다.
“어서 피신해!”
다급한 외침에 로아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하, 하지만 에이젠은…….”
아직 그의 밑에 깔린 자객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또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 다른 자객들도 있었다. 이대로 에이젠을 두고 가면 그가 위험할 것 같았다.
그러나 로아는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
먼저 도망가라던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주변을 알짱거렸다가 오히려 방심한 그를 죽게 만들고 말았다.
로아는 무거운 드레스 자락을 모아 한 손에 쥐었다.
“미, 미안해. 미안해, 에이젠…….”
젖먹던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그녀는 에이젠을 두고 발걸음을 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 뛰었다.
에이젠은 강해. 내가 있으면 날 신경 쓰느라 오히려 집중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에이젠을 두고 가는 걸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그게 그를 도와주는 거야.
그를 두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 저에게 합리화를 주입시켰다.
“로아, 이쪽이야!”
로아는 저를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 선 카일론이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카일론!”
생사를 알지 못해 불안했던 가족을 찾았다. 로아는 카일론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달려가던 그녀의 걸음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
아주 잠깐 사이였다. 카일론의 앞을 걸어가듯 다가온 자객이 그에게 칼을 휘두른 후 금방 사라졌다. 힘없이 털썩 무릎을 꿇은 카일론은 몸을 고꾸라뜨리고 말았다.
“……카일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로아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복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카일론이 괴로움에 기침을 해댔다.
“말도 안 돼, 카일론!”
한 템포 느리게 카일론에게 다가간 로아가 그의 몸뚱이를 안아 들었다.
“어, 어떡해. 안 돼. 카일론 정신 차려. 제발, 제발.”
일단 그를 안아들긴 했으나 그녀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여기 사람이…….”
간절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제가 먼저 살기 위해 정신없이 피신하느라 타인까지 둘러볼 여유가 없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피신을 하던 사람들 무리에서 튀어나온 자가 쓰러진 카일론을 둘러업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카일론 먼저…….”
남자가 카일론의 육신을 업고 돌아섰다. 로아가 그 뒤를 따라가려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로아는 살결을 파고드는 서늘한 이질감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일론을 업은 자가 점점 멀어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까지 로아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감각을 느끼긴 했으나 믿지 못했다. 두 눈으로 확인했다간 절망감이 밀려들 게 뻔했다. 그럼에도 로아의 눈동자는 서서히 밑으로 향했다.
“아, 아…….”
새하얗던 웨딩드레스는 이미 새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제 몸을 뚫었던 서늘한 칼날은 뒤쪽으로 다시 빠져나갔다. 로아는 그 반동으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얼굴로 떨어졌는데도 부딪친 턱관절이 아프지 않았다. 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부위가 있어서인 듯했다. 고통스러웠지만 로아의 눈동자는 굴러가 누군가를 찾았다. 아직 그녀의 시야엔 사투를 벌이는 에이젠의 뒷모습이 보였다.
타이밍이 알맞게 떨어진 건 오히려 비극이었다. 상대하던 자객을 쓰러뜨린 에이젠이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로아?”
그는 피에 젖은 검을 떨어뜨렸다.
“로아, 로아!”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로아를 일으켰다. 엎드린 채 쓰러진 로아를 봤을 땐 사태의 심각성을 다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몸을 뒤집었을 때, 그녀의 가슴부터 쏟아져나온 다량의 혈액이 복부까지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에이, 젠…….”
로아는 파들거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에이젠의 손을 잡았다.
“로아, 안 돼.”
에이젠은 로아의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가볍게 붕 뜨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묵직해진 눈꺼풀이 내려앉을 것 같았는데 몸이 편안해져서 더욱 그랬다.
“꽉 붙잡아.”
그러나 로아는 자신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자꾸만 감기려는 두 눈에 힘을 주고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마지막 순간에 그를 눈에 담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저 다행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그뿐이었다.
“에이젠.”
로아가 간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막아.”
에이젠은 로아의 얘기를 들어줄 경황이 없었다.
“상처 제대로 막으라고!”
로아는 두 손으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가슴을 꾹 눌렀다. 하지만 상처 부위는 너무 컸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자꾸만 새어 나왔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아 아무 소용 없었다.
“나 힘이 안 들어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정신 바짝 차려!”
흥분한 에이젠이 언성을 높였다.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걸 로아의 눈높이에 맞춰주는 다정한 남자였다. 다급한 상황에 처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긴 그랬으니까 잔악한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았겠지. 로아는 에이젠을 올려다보며 피식거렸다.
“에이젠은 이럴 때도 이성적이구나.”
로아의 목소리엔 서운함이 묻어났다. 에이젠은 어금니를 꽉 깨물어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로아를 안아든 그의 두 팔에 긴장한 듯 뻣뻣한 힘이 들어갔다. 로아는 안긴 그의 가슴팍이 좋았다. 쏟아져나오는 고통은 어느새 무뎌져 가고 있었다.
시선을 들어 올린 로아는 에이젠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아닌가…….”
그의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로아의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굳은 심지를 담았던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 감정적인 것 같기도 하고.”
에이젠의 색다른 모습을 보며 로아는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마지막을 그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은 싫지 않았다.
“로아. 말 그만해.”
에이젠은 로아와 생각이 달랐다. 이게 그녀의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싫어…….”
로아 역시 물러나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에이젠한테 말 못 할 거 같아서 그래.”
평소에 몇 번이나 에이젠과의 마지막을 그리며 슬퍼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눈앞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그런데 왜 진짜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지금 순간은 괜찮은 걸까.
아마도 이 죽음으로서 그를 살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저와 엮일 일 없는 그는 평생 안전한 곳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안심이 됐다. 다가오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두렵지 않았다.
“내려줘. 그만해, 에이젠.”
그녀의 시선은 에이젠만을 향해있었기에 어디까지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주변이 조금 고요해진 것 같기도 했다. 에이젠이 로아의 몸을 내려놓았을 때 꽤 푹신한 것이 풀숲 같기도 했다.
“여긴 안전할 거야.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로아를 내려놓은 에이젠이 몸을 일으켰다. 어딘가로 가버릴 것처럼 구는 에이젠에 편안했던 로아는 다시 불안하게 떨었다.
“자면 안 돼. 기다릴 수 있지? 빨리 의료진을 데려올 테니까.”
“가지 마.”
어차피 희망을 잃은 순간, 눈을 감기 직전까지 사랑하는 남자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여자.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살리기 위해 의료진을 데려오고 싶은 남자.
두 남녀의 의견이 엇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