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61)화 (61/107)

61. 기다리라고 했잖아

다시 꿇어앉은 에이젠이 손을 뻗어 로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로아. 난 할 수 있는 게 없어. 얼른 데리고 올게. 응?”

“싫어. 싫어, 에이젠.”

로아가 두 눈을 글썽거렸다. 두 손으로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제발, 제발 가지 마.”

불쌍해 보이는 표정, 그리고 간절한 목소리만이 그를 붙잡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에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시야에서 벗어났다. 로아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금방 올게.”

돌아선 에이젠이 결국 로아를 두고 가버렸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그의 발걸음이 급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로아는 멀어져가는 그의 기척을 느끼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댔다.

“……가, 지……마.”

이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거릴 힘도 없었다.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거칠어지는 호흡은 뇌에 산소를 전달하지 못해 아득해졌다.

그의 품에 안겨 죽는다면 괜찮은 죽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를 두고 떠나가는 뒷모습이 마지막 장면이라니. 최악이었다.

이렇게 차디찬 바닥에 혼자 남겨져 꺼져가는 불씨를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땐 이미 식어버렸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로아는 그때의 에이젠이 걱정됐다.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차게 식어버린 모습을 보았을 때의 절망적인 그 기분.

죽었다 깨어나도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감각을 에이젠이 느껴야 한다니. 남겨질 그가 걱정되어 편히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안타깝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없다면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단명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그 포춘텔러의 예언이 맞았다. 대체 그 여자의 정체는 뭐였을까.

로아는 헛웃음이 났다. 그제야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었다. 죽게 되면 어디로 가는 걸까. 지하세계에서 생전의 죄를 따지고 재판받게 되는 건가. 사랑하는 남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죄로 지옥에 떨어지는 건 아닐까. 지옥은 어떤 곳일까.

무서워서 치가 떨렸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가 떠났던 곳에서 다시 그가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를 절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순간 원망의 화살을 돌릴 곳을 찾았다.

비극적인 운명을 말해준 포춘텔러가 가장 원망스러웠다. 신도 아닌 인간이 어떻게 미래를 정확히 내다본단 말인가. 혹시 정해진 운명을 읽은 게 아닌, 순탄했던 흐름을 비틀어버린 저주 따위는 아니었을까.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너무해. 이렇게 괴롭게, 이렇게 아프게, 이렇게 외롭게 죽을 거라곤 말 안 해줬잖아. 사랑하는 에이젠 앞에서 죽게 될 거라곤 안 했잖아.

서서히 불씨는 꺼져갔다. 온몸이 늘어지듯 바닥에 으스러졌다. 로아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 온 힘을 끌어모아 눈꺼풀에 집중했다. 그가 갔던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피의 양은 주체할 수 없이 불어났다. 마지막 박동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몸 전체가 텅 빈 껍데기처럼 박동이 공명이 되어 울렸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전율이 몸을 뚫고 머리끝으로 빠져나갔다.

눈은 아직 뜨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에이젠은 황실 소속의 의사와 함께 돌아왔다.

“로아, 의료진을…….”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에이젠은 축 늘어진 로아를 보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의사는 에이젠을 신경 쓰지 않고 로아에게 다가갔다. 육안으로만 봤을 때도 절망적인 상태였다. 이미 그녀의 웨딩드레스엔 새하얀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아름답게 빛나던 금빛 머리칼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호수처럼 맑은 빛깔을 내던 눈동자도 공허하기만 했다.

차가워진 로아의 육체 앞에 앉은 의사는 목 뒤로 손을 가져가 맥박을 쟀다. 예상대로 싸늘해진 피부 위로 느껴지는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유감이지만 이미 심정지가 왔습니다.”

의사가 조심스럽게 사망 선고를 내렸다. 에이젠은 그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어 멍한 상태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의 귓가에 가지 말아 달라는 로아의 마지막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아니, 그 목소리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런데도 저를 두고 간 그가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로아의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의사는 아무 반응 없는 에이젠을 보다 다시 로아의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얼마나 기다렸으면, 죽음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눈도 감지 못했다.

이승의 한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바라며 손을 뻗은 의사는 로아의 눈꺼풀을 내려주었다.

“저리 비켜.”

에이젠은 로아의 얼굴을 만지던 의사를 옆으로 밀쳐냈다. 차디차게 식어버린 로아의 몸뚱이를 억지로 일으켰다.

“로아. 나 왔어.”

손끝에 닿는 그녀의 몸에 이질감이 들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싶어도 몇 번이나 참았다. 그런데 겨우 닿은 그녀의 육체가 식어버렸다니.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조금만 기다리라고!”

에이젠은 이 상황을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애먼 로아의 시신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눈을 감아버린 로아는 제 앞의 에이젠을 보지 못했다. 목소리를 내어 그를 부르지도 못했다.

“아니야. 아직 안 늦었어.”

에이젠은 뜨겁게 흘러내리는 눈물조차 사치라 생각해 다급히 훔쳐냈다. 로아의 시신을 다시 바닥에 눕힌 그가 의사에게로 눈을 돌렸다.

“살려봐.”

그의 눈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미 숨이 멎은 자를 살리라는 말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몇 번이고 시체를 봐왔던 만큼 그는 생명에 있어서 철저히 냉정한 남자였다. 그런 그도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여자의 죽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라고!”

의사는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는 걸로 대답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가진 황실 주치의라지만 시신 앞에서만은 가장 무능력한 존재였다.

감정이 격해진 에이젠은 다소 과격하게 의사의 멱살을 쥐었다.

“살려 내. 살리라니까.”

그 역시도 말이 안 되는 요구임을 알았다.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었지만 두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은 시야를 방해할 정도였다.

“숨이 붙어있다 하더라도 출혈이 너무 커서 지금 여기서 손쓸 수 있는 방법은…….”

에이젠은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는 의사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고개를 숙인 그가 로아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로아.”

제발 장난치지 말라고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격한 분노가 올라왔지만 로아의 앞에서만은 억누른 채 다정하게 그녀를 불러보았다.

“로아. 눈 떠. 나를 봐. 로아, 로아…….”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아는 더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얼굴을 차분히 살폈다.

그러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결혼식 날에도 에이젠에게 선물 받았던 루비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온통 새하얀데 그 목걸이만 붉게 빛나고 있었다. 잘 보였어야 하는 액세서리였는데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하마터면 발견하지도 못할 뻔했다.

그녀는 아직 저를 사랑하고 있었다. 에이젠은 더 깊은 좌절감에 빨려들어 갔다.

“이럴 리 없어. 이건 아니야.”

중얼거리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의 한 손은 피가 빠져나왔던 상처를 막았고 다른 손으론 차가워진 로아가 추울까 봐 품에 안아 제 온기를 나눠주었다. 여전히 로아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이미 죽고 껍데기만 남아버렸다는 것을.

“로아가……, 내 로아가 왜! 도대체 왜!”

왜 그녀가 이토록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을까.

그가 미친 듯이 발악하며 오열했다. 더 세게 끌어안았지만 그녀의 몸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그녀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자신이 희생당할 때까지 가만히 당했어야 했을까. 어떤 미친 자식이 그녀를 협박했을까.

그럼 자신은 무엇을 했어야 했나.

청혼을 거절하던 로아를 왜 더 깊이 있게 설득하지 못했나. 왜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훔쳐 가놓고 그리도 쉽게 돌려줘 버렸나.

아마도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을 터였다.

그때 집으로 유인한 김에 발목이라도 분질러서 아무 데도 못 가게 했어야 했다. 그녀가 조금 괴로울 순 있어도 제 울타리 안에 있으면 적어도 안전했을 텐데.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에이젠은 몇 번이나 로아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후원에서 몰래 만났을 때 그녀를 둘러업고 도망이라도 갔어야 했다.

모든 순간이 후회로 남았다.

후회에 미쳐가기 직전의 순간. 그의 머리를 식히는 한 여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이번엔 내가 널……, 저주하겠다.’

자신이 대공으로 즉위하자마자 가문에서 쫓아냈던 새어머니 마를레나 트로네.

마지막으로 성을 떠나기 전 눈을 희번덕거리며 협박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이 타이밍에 떠올랐다.

로아가 이렇게 된 건 제 업보의 대가를 대신 치른 거였다. 새어머니를 쫓아내고 저주를 뒤집어쓴 그의 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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