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숨을 쉬고, 심장은 뛴다
깊은 어둠 속에 빠져 허우적댔다. 느껴본 적 없는 절망감이 그를 어디까지 깊어질지 모르는 심해 어딘가로 밀어 넣었다.
수많은 시체 더미를 밟고 일어날 때도, 가장 가까이에 있던 동료를 잃었을 때도, 전사한 아버지와 형의 시신을 확인하러 갔을 때도 그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굴었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게 전부였다.
제국이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자신이 이뤄낸 공적 따위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이제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입꼬리를 틀어 올렸을 뿐이었다.
유일한 삶의 목적. 살아 숨 쉬는 이유.
그녀가 저를 떠나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모든 걸 이해했다. 꼭 제 곁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줄 미소를 짓고 있을 테니까. 그 행복한 기운이 허공을 맴돌다 언젠간 자신에게 닿을 테니까.
그러나 제 목숨의 절반인 그녀가 죽었다.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기 싫었던 그녀가 가슴이 뻥 뚫린 채 온몸의 피를 쏟아냈다. 고통의 신음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메말라버렸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순간에도 선물했던 루비 목걸이를 갖고 있었다. 생명이 다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의 눈동자는 저를 찾고 있었다.
그녀를 저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없는 삶이라면, 다시는 닿을 수조차 없는 인생이라면 살아갈 필요가 없다.
로아의 죽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좌절하고 오열했다.
그 모든 걸 마친 에이젠은 망설임 없이 장검을 꺼내 들었다. 죽어서라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겠노라고.
검집을 빠져나오면서 쇠붙이가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가를 괴롭게 때렸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에이젠은 정신을 잃었다.
“……하, 각하.”
누군가 자신의 육체를 흔들어대는 감각에 눈을 번쩍 떴다.
“곤히 주무시는데 깨워 죄송합니다.”
습하고 텁텁한 공기가 그의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눈앞엔 익숙한 남자가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불편하게 주무셔서인지 악몽이라도 꾸신 모양입니다. 땀을 많이 흘리셨네요.”
그는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이젠에게 건넸다. 에이젠은 손수건을 받아들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 거의 도착했습니다.”
자리로 되돌아간 남자는 흔들리는 공간의 작은 창문을 열었다.
에이젠은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기 보이는 성이 오늘의 목적지이자 제가 나고 자란 곳, 클라리온 성입니다.”
그의 설명대로 창밖엔 정말 클라리온 성이 보였다. 에이젠은 서서히 상황을 인지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 남자는 로아의 오빠인 카일론이었다.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습한 공기가 차 있는 이곳은 마차 안이었다.
“참, 출정하시기 전에 방문한 적 있다고 하셨죠?”
출정하기 전?
에이젠은 카일론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 찰나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일어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로아…….”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박살 나버린 기억이 조각조각 깨져 머릿속을 떠다녔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 에이젠은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던 로아를 기억해냈다.
“로아는?”
“……예?”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카일론은 아직 로아의 죽음을 모르는 건가. 어째서 여기에서 저리도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있지.
에이젠의 다급한 물음에도 카일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할 뿐이었다.
“로아는 저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카일론은 손끝으로 창밖의 성을 가리켰다.
에이젠은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 클라리온 영지까지 온 것인가. 분명 정신을 잃기 전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수도에서 클라리온 영지까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데 도대체 얼마나 잠들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로아를 그리도 보고 싶어 하시다니. 단잠을 주무시더니 꿈에서라도 만나신 겁니까?”
카일론은 아까부터 로아가 클라리온 성에 있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인지하려 할 때마다 지독한 두통이 그를 괴롭혔다. 에이젠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입은 옷을 보게 되었다.
멀끔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채였다. 그는 오늘 결혼식 하객으로서 깔끔한 복장을 입었다. 황궁에 갔던 이유는 황제가 자신을 부른 게 아니었기에 평소보다 예를 덜 갖춘 복장이었다. 그런데 입고 있던 옷이 바뀌어 있었다.
이건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각하.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혹시 어디 불편하신 겁니까?”
그리고 고개를 들어 카일론을 바라봤다.
복장을 보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 제복을 마지막으로 입었던 날을 떠올렸다. 전공을 세운 후 황실에서는 그에게 대공직위를 내리고 재물을 하사하기 위해 황궁으로 불렀다.
그리고 에이젠은 그곳에서 황실 조경가가 되어 있는 카일론을 마주쳤다. 일정이 끝나고 함께 클라리온 성에 가주길 부탁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 어딘가로 향하는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클라리온 성, 그리고 그곳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다는 로아.
모든 게 정확하게 일치했다.
“……지금, 우린 클라리온 가에 가는 중인가?”
에이젠은 카일론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당연한 것을 묻는 에이젠에 황당했지만 카일론은 정중히 대답해주었다.
“귀환하시자마자 저와 함께 클라리온 가부터 가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귀환?”
아, 그래. 그러니까 이 시점은 귀환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혼란스러운 건 있었다.
에이젠은 이날 이후의 기억을 모두 갖고 있었다.
로아와 재회를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다. 에이젠은 로아가 자신을 왜 거절하는지 철저한 뒷조사를 했지만 이유라고 추측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황실 무도회에 초대된 로아는 황태자 유다르에게 청혼을 받고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그 결혼식에서 로아는…….
자신이 가진 이 기억들의 정체는 무어란 말인가.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언능력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지독하게 긴 꿈을 꾼 건가.
그것도 아니면 시간을 되돌아온 거?
“혹시…….”
카일론은 낯빛이 좋지 않은 에이젠을 여전히 걱정스럽게 살폈다.
“댁에 들르셨을 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댁에 들러?
에이젠은 이때의 기억을 되짚었다. 카일론과 함께 황실을 빠져나왔을 때 잠시 각자의 일정을 위해 찢어진 적 있었다. 에이젠은 그때 자신의 저택에 방문했다.
‘목이 썰린 시체가 되어 날짐승에게 사지가 찢긴 채로 쓰레기처럼 끌려 나가시겠습니까.’
‘당신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감사히 여기십시오.’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학대했던 새어머니 마를레나를 쫓아낸 직후였다. 가문을 정리하고 나온 에이젠은 다시 카일론을 만나 함께 클라리온 성으로 향했다.
바로 그 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엔 내가 널……, 저주하겠다.’
에이젠은 마를레나가 마지막으로 저를 향해 저주를 쏟아붓던 그 눈을 떠올렸다. 애먼 로아의 죽음을 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도 마를레나가 저주하는 목소리였다.
“결례를 범한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에이젠의 눈치를 살핀 카일론이 얼른 말을 거두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멈추어 섰다.
“클라리온 백작 저에 도착했습니다.”
에이젠은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마차에서 내려왔다. 붉은 망토를 둘러맨 그가 성의 입구에서 말 위로 올라탔다.
지금은 시간이 어떻게 되돌아온 건지 그런 비과학적인 원리를 궁리해낼 때가 아니었다. 이 성을 지나고 백작 저 앞으로 가면 정말 로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그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분명 그녀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두 손으로 차게 식은 육신을 느꼈다. 그런 로아가 다시 살아 돌아와 자신의 앞에 나타나 줄까.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저택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눈에 힘을 주고 로아를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반겨주기 위해 나와 있었다.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로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 도착해 말에서 내려 그들의 앞까지 걸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클라리온 백작 부부, 소백작 셰인데릭과 그의 부인.
클라리온 가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는데도 로아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다급히 로아를 찾아 헤맬 때, 어디선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아, 너 어디서 뭐 하느라…….”
셰인데릭이 로아를 향해 다그치듯 낮은 목소리를 냈다. 긴 드레스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황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어온 여자.
“……에이젠?”
떨리는 푸른 눈동자, 새하얀 목덜미에서 반짝이는 루비 목걸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 로아 클라리온이 살아 있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셔서 우리 영지부터 찾아주시다니, 클라리온 가의 영광입니다.”
클라리온 백작은 로아를 등진 채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에이젠은 자신을 향해 달려 나온 로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으흑, 흐……, 에이젠.”
아무리 소리치고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던 로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거렸다.
“……로아.”
한달음에 로아의 앞으로 걸어간 그가 가녀린 로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세게 끌어안자 불안하게 떨리는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에이젠은 그제야 묵직해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다. 숨 쉬고 있고, 심장이 뛰고 있다.
로아는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