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갑자기 부끄럽게
“대공 각…….”
에이젠은 클라리온 가의 사람들과 예를 갖춘 인사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흐으윽, 으아아앙.”
에이젠의 품에 안긴 로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로아는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고, 분명히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귀족가에서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서로를 향해 달려든 상황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지난 세월을 아는 사람들은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미 이 공간엔 서로뿐인 순간이었다.
“에이젠이 맞는 거지?”
로아는 에이젠의 품에 안겨 그의 온기와 숨결을 느끼면서도 한 번 더 되물었다. 에이젠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때도 로아가 저를 향해 울면서 달려들었으니까.
그때의 에이젠은 침착하게 인사부터 나눈 후 로아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이번은 그때처럼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당장 이 여자를 옥죄지 않으면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르니까.
“이, 이제 그만. 놔줘도 돼.”
로아는 점점 힘이 들어가는 에이젠의 팔을 툭툭 쳐냈다. 너무 꽉 끌어안겨 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그걸 본 에이젠이 팔을 풀어 로아를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두 손은 로아의 두 팔을 붙잡았다. 그녀가 저를 피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려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본 건 로아였다. 어느새 가족들도, 그가 데려온 사용인들도 자리에 없었다. 로아가 민망한 얼굴로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너무 노골적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저, 에이젠. 무사히 돌아온 걸 환영해.”
덕담을 주고받지도 못해 로아는 서툴게 인사를 건넸다.
로아의 목소리에도 에이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눈앞에 보이고 제 손에 잡히는 로아를 쉬이 믿을 수 없었다.
품에 안아봤으면서도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혹시 이게 현실이 아니면 어떡할까. 그녀를 잃고 정신을 놔버린 자신의 간절함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닐까.
“에이젠 나 민망한데 뭐라고 말 좀…….”
로아는 뒷말을 다 잇지 못했다. 웅얼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던 에이젠은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움직이는 로아의 입술을 제 입술로 가득 물었다. 그녀가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음…….”
낮은 신음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로아는 얼어붙었다. 반사적으로 두 손이 올라왔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로아 역시 입술을 통해 느껴지는 에이젠의 숨결에 눈물을 머금었다.
에이젠은 서툴게 굳은 로아를 좀 더 깊숙이 탐닉하려 했다. 고개를 비틀자 코와 입술이 닿는 사이에 여유가 생겼다. 그녀의 금빛 머리칼 속을 파고든 한 손은 뒷목을 단단히 받쳤다.
“하…….”
잠시 숨을 쉬기 위해 벌어진 틈 사이로 유연한 혀가 들어왔다. 로아는 점점 짙어지는 키스에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녀와 달리 에이젠은 두 눈을 뜬 채였다.
제대로 숨을 내뱉고 있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그에게는 이 키스가 로아의 생명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였다.
눈으로는 키스를 나누며 반응하는 로아의 변화를 관찰했다. 꽉 감은 눈 위로 가지런히 놓인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곧게 뻗은 콧대 위를 따라간 미간은 살짝 찌푸려졌다.
힘을 주고 잘 움직이려 하지 않았던 혀와 입술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의 움직임을 서툴게 따라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스며든 로아는 그에게 집중했다. 먼저 고개를 비틀기도 했다. 제 얼굴을 붙잡은 에이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기도 했다. 에이젠은 자신의 손등을 감싸는 로아의 손을 내려다보다 입술을 떼어냈다.
입술만 떼어냈을 뿐, 두 사람의 이마는 아직 맞닿아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거친 호흡을 가쁘게 내뱉는 숨결이 섞여들었다. 진한 키스를 나눈 흔적처럼 두 입술 사이에 타액이 쭉 늘어졌다. 로아의 아랫입술 역시 그가 핥아 올린 탓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로아는 그것도 모르고 부끄러운 마음에 아랫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다.
“에이젠, 갑자기 부끄럽게 이러면 어떡해.”
뒤늦게 정신이 든 로아는 에이젠을 밀쳐냈다. 한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일방적으로 의사를 묻지도 않고 입술부터 박아버렸다. 그런데도 로아는 조금 놀랐을 뿐, 그를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확실한 건, 싫어하지 않았다.
“우리 중정에 가서 이야기나 할까?”
로아는 에이젠에게서 잡힌 손을 빼냈다. 스륵 빠져나가는 그녀의 손길이 아쉬웠다. 에이젠은 빠르게 돌아선 로아의 뒤를 쫓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귓가가 붉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야외탁자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에이젠은 로아에 정신 팔려 이 흐름을 잊고 있었다. 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기시감이 들었다. 그는 이때 로아와 마주 보고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재회하던 순간만 해도 저를 반기며 눈물을 흘렸던 로아가 단숨에 태도를 바꾸었던 게 바로 지금이었다.
“로아, 우리 혼사에 관한 거 말인데.”
에이젠은 그때의 불안함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저, 에이젠.”
확실하게 먼저 선수를 치려던 찰나, 로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나도 혼사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에이젠은 이 흐름을 알았다. 자신의 말을 끊고 로아가 했던 말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아무래도 에이젠과 결혼할 순 없을 거 같아.’
도대체 왜. 이 짧은 시간 동안 도대체 어쩌다 로아가 마음을 뒤바꾼 걸까.
에이젠은 테이블 위에 고이 놓여 있던 로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랑 결혼하기 싫어?”
“응?”
그녀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에이젠이 먼저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렸다. 로아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가로채여서인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어, 아니, 싫다기보다는…….”
당황한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에이젠은 ‘싫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확실히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로아의 모습이 익숙했다. 이 뒤의 몇몇 순간들까지 떠올렸다.
‘싫다고 한 적 없어.’
‘널 미워한 적 없지만, 내가 널 미워했다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로아는 에이젠을 밀어내면서도 매번 ‘싫다’는 말에는 부정하곤 했다. 그건 시간을 되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에이젠은 전력이 높은 기사이니까…….”
이 뒤로 이어지는 변명 또한 그때와 똑같은 말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출정하는 일이 또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에이젠은 줄줄이 늘어놓는 로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2년간 에이젠을 기다리면서 많이 힘들었거든.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또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잖아. 그때가 되면 내가 버티지 못하는 건 아닌지 뭐 그런…….”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변명을 꺼내는 로아는 에이젠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직위가 오른 것도 있잖아. 난 내 곁을 지켜줄 호위기사가 좋았던 거지, 큰 책임이 따르는 권력이나 명예는 좀 부담스러워.”
마치 이제서야 말을 지어내는 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두 눈은 아래쪽만 향하고 있었다.
에이젠은 거절하는 로아를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야 했다. 저를 거절하고 유다르를 택한 로아는 결국 처참히 살해당했다. 그 미래를 뒤바꾸기 위해 저에게 다시 한번 시간이 주어진 셈이었다.
에이젠은 그제야 자신이 시간을 되돌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그러나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에이젠은 몇 번이고 로아에게 질척거려보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로아는 고집스럽게도 제 마음을 뒤로하고 저를 밀어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로아 네 생각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러니 말로 그녀를 설득하는 건 통하지 않을 걸 알았다. 에이젠은 최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때처럼 고분고분히 물러났다.
“어?”
깔끔히 포기하는 에이젠에 로아는 되레 당황한 모습이었다.
에이젠은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웃음이 나는 걸 참느라 애를 먹어야 할 정도였다. 그녀의 미세한 표정과 눈빛, 불안한 제스처까지. 그 모든 게 자신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고 외치는 꼴이었다.
“내가 너의 행복을 방해한다면 기꺼이 물러나줄 수 있어.”
“아, 이해해줘서 고마워, 에이젠.”
로아는 민망해진 손을 꼬물거리다가 습관적으로 목걸이로 가져갔다. 붉은빛을 내는 루비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던 로아는 ‘아’ 하는 탄성 소리를 냈다.
“참, 이거 돌려줄게.”
로아는 두 손을 목 뒤로 가져가 목걸이 끈을 풀어냈다. 자신이 건넸던 선물을 돌려주려 했다. 과거에 에이젠은 목걸이만은 간직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태도를 바꿔보기로 했다.
“그래.”
에이젠은 로아가 건네는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로아는 목걸이가 빠져나간 허전한 제 손을 내려다봤다.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려면 물건도 정리하는 게 좋지.”
목걸이를 챙긴 에이젠은 겉옷 안주머니에 그것을 넣었다. 로아의 아쉬운 눈길은 공허한 손에서 목걸이가 들어간 그의 겉옷 쪽으로 옮겨졌다.
이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로아가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던 건 전부 진심이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