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64)화 (64/107)

64. 도망갈 수 없도록

“그래도 날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고마워.”

로아는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어뜨리며 말했다.

에이젠은 어떻게든 로아와의 접점을 많이 만들어두어야 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황실 무도회에 그녀가 초대되기 전까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녀가 무도회에 가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뭔데?”

그곳에 참석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끔은 로아 널 보러 와도 될까. 편한 친구 정도로는 지냈으면 좋겠는데.”

이 요구에 로아가 무어라 대답할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아는 그때와 달리 흔쾌히 대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루비 목걸이가 자취를 감춘 에이젠의 안주머니 쪽으로 향했다.

“목걸이까지 가져가 놓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때와 달라진 행동이 있으니 상대방의 반응도 달라졌다. 에이젠은 상황의 흐름을 금방 학습했다.

“이건 내가 너한테 청혼하기 위해 준 거였잖아.”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그는 매끄럽게 대처했다.

“이거랑은 별개로 친구로서 새롭게 시작하면 되지.”

로아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그러나 에이젠은 여유를 누렸다. 그녀가 이 제안을 단칼로 밀어내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물론 로아 네가 결혼을 하게 되고 멀리 떠나게 된다면 그럴 수 없겠지만 그전까지만이라도.”

좀 더 빠르고 확실한 결정을 위해 조건을 덧붙였다. 어리둥절하게 미간을 찌푸렸던 로아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그러지 말고 다음엔 우리 저택으로 오는 게 어때?”

***

로아에게 처음 청혼을 거절당했을 때만 해도 에이젠은 겉으로는 신사다운 척했으나 속으로는 수도 없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거라고. 이미 예상했던 두 번째 거절은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을 나선 그가 미련 없이 말 위에 올라탔다.

그의 뒤를 따라 나온 로아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그럼 무탈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작별 인사 말고도 하고픈 말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로아는 진짜 할 말을 속으로 꾹 눌러 담았다. 에이젠의 눈엔 로아의 그런 눈빛이 전부 읽혔다.

미련이 남은 모습을 먼저 보였을 땐 부담스러워했던 로아가, 미련 없이 돌아서는 남자에겐 다른 태도를 보였다.

에이젠은 로아에게 인사를 전한 후 클라리온 가를 떠났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고삐를 꽉 부여잡은 채로 참아냈다. 어차피 로아는 자신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그런 확신이 있었다.

로아는 아직 저를 사랑하니까. 그것도 아주 많이.

***

먼 길을 지나 트로네 저택에 도착했다. 쿨하게 클라리온 가를 떠나왔지만 성을 벗어나 클라리온 성이 멀어질수록 그의 눈매도 가늘게 떨어졌다.

완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에이젠은 마음 편히 쉬지도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부정하는 그녀의 마음을 다시 일깨워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일 것이다.

“주인님, 다녀오셨습니까.”

예상대로 집사 리예드가 나왔다. 에이젠은 입구에 우뚝 멈춰선 채 리예드를 내려다봤다. 당황한 그의 얼굴만 봐도 무어라 중얼댈지 눈에 선히 보였다.

“그, 주인님께서 말씀해주신 일정보다 이르게 도착하셔서 사용인들이 준비를…….”

“됐어.”

“얼른 목욕 준비부터 하겠습니다.”

차갑게 떨어지는 말에도 뒷말을 이어가는 것조차 똑같았다. 에이젠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계단부터 올랐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위치한 테라스. 그곳에서 위를 올려다보자 역겨운 그림이 자신을 깔보는 듯한 눈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리예드.”

“부르셨습니까.”

마를레나의 초상화는 과거에 치워두라 한 것이었다. 리예드에게 분명히 지시했고, 그 뒤로 저 초상화는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시간이 되돌아왔으니 초상화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이는 리예드의 잘못이 아니었다.

“저거 아직도 안 치웠나.”

“아…….”

그럼에도 에이젠은 날카롭게 신경을 세웠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음에도 마를레나의 흔적만 보면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별다른 지시가 없으셔서 일단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불편하시다면 내일 안으로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들었던 변명을 두 번 들으니 두 배로 성질을 자극했다. 허리를 반쯤 접은 리예드를 뒤로한 채 에이젠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클라리온 가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리예드의 물음에 에이젠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리예드는 에이젠이 화를 가라앉히는 유일한 방법이 로아를 떠올리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결혼식을 슬슬 준비하겠습니다. 일정을 말씀해주시면 늦지 않도록 준비를…….”

리예드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 로아와의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과거엔 청혼을 거절당해 심기가 불편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 그래.”

뒤를 돌아본 에이젠이 리예드와 눈을 맞추었다. 여태까지 본 에이젠의 얼굴 중 가장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이질감에 리예드는 오히려 불안감에 휩싸였다.

“신혼집을 미리 꾸려놓는 게 좋겠지. 새로운 사람을 들일 거니까.”

에이젠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로아에게 청혼을 거절당했다. 겉으로도 그때처럼 쉽게 물러나는 척 굴었다.

그러나 같은 행동을 했어도 그때와 의도는 명확히 달랐다.

자신을 향한 로아의 경계심을 허물고 좀 더 쉽게 저에게로 데려오기 위한 목적이었다.

즉, 에이젠은 로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데려올 생각이었다.

“전 주인의 손을 너무 많이 탄 집은 좀 그렇잖아.”

중요한 말을 빼놓은 바람에 리예드는 당연히 계획대로 에이젠과 로아가 결혼을 준비할 거라고 받아들였다.

“저걸 내려놓는 김에 집 안을 완전히 손봐야 할 것 같다.”

“공사를 원하시는 부분이 있으실까요? 아니면 설계도를 가져올까요?”

에이젠은 방향을 바꾸어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위치한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리예드는 점잖이 그의 뒤를 따랐다.

“침실부터 손보는 게 좋겠지.”

복도로 나온 에이젠은 사용하지 않는 옆방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사용해야 하니까 옆방을 트는 게 좋겠어.”

“예, 알겠습니다.”

리예드는 수첩과 만년필을 꺼내 그가 말하는 것들을 받아적었다.

“인테리어도 싹 바꾸도록 해. 로아는 식물을 좋아하니까 꽃이나 난을 가져다 놓아도 좋고.”

“참고하겠습니다.”

에이젠은 실내에서 키울 화분을 들여놓을 위치까지 전부 생각해두었다. 창가에는 아기자기한 다육식물이나 선인장을 두면 로아가 문을 열 때마다 기분 좋게 내려다볼 것이다. 방 모서리엔 몬스테라 같은 잎이 큰 화분을 둘 것이다. 관상 효과를 주면서 실내 공기를 정화시키는 역할도 하니 일석이조였다.

“정원이 잘 보이도록 창문도 더 크게 넓히면 좋겠군. 커튼은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시폰 소재로.”

에이젠은 로아가 새로 꾸민 침실을 보며 기뻐할 모습을 상상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황홀한 미소를 띠었다.

대략적으로 침실 리모델링 계획을 마친 그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선 그가 어느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택의 구석 쪽에 위치한 찬장이었다.

지금은 찬장으로 가려두었으나 저 뒤엔 문이 하나 있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로 향하는 문.

“지하실은 지금 어떤 용도로 쓰고 있지.”

에이젠의 뒤를 따르던 리예드는 그의 물음에 함께 고개를 돌렸다.

“예? 지하실이요?”

에이젠이 어린 시절 가장 큰 트라우마를 남겼던 지하실. 본래대로라면 저택에 빈 공간이 생긴 만큼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그가 가주가 된 후 사용인들은 에이젠 앞에서 감히 지하실을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문 앞에 찬장을 둔 것도 그의 지시가 아니었다. 그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사용인들이 임의로 찬장을 만들어 가려둔 것이었다.

“그냥 비워두었습니다. 입구를 막아두었으니 창고로 사용하기도 불편하다고 하여…….”

에이젠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찬장 앞으로 걸어갔다.

“지하실을 좀 꾸며야겠다.”

지하실이라면 펄쩍 뛸 줄 알았던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지하실이라는 공간을 무언가로 활용하려 하다니. 리예드는 그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해 눈만 껌뻑거렸다.

“아주 예쁘게. 아주 화려하게.”

웃고 있는 그의 눈은 오묘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 방에 한 번 들어서면 다시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곳으로.”

리예드는 그 공간을 무슨 용도로 사용하려 하는지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조용히 뿜어내는 광기에 겁이 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 침실과 똑같은 구도로 만들어. 침실에 있는 똑같은 침대를 하나 더 갖다 놓고, 식물도 커튼도 전부 똑같은 걸로.”

에이젠의 말을 전부 수첩에 받아적던 리예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지하실에 아마 뒷문이 하나 더 있지?”

“예……, 뒷정원으로 나가는 비상로가 있습니다.”

“거기는 막아버려.”

리예드는 직감했다. 에이젠은 이 지하실이 ‘감금’의 장소라는 걸 여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 이 방을 꾸민다 한들 용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철저하게. 한 번 이 지하실에 갇히면 절대 도망갈 수 없도록.”

그러니까 결론은 에이젠이 꾸리는 모략은 분명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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