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증거인멸
“다시 찾아주시다니. 환대합니다, 대공 각하.”
에이젠은 리모델링을 맡겨놓은 동안 저택을 비우기로 했다. 그가 향한 곳은 어김없이 클라리온 가였다. 그의 과거 경험상 이쯤이면 로아 또한 저택을 비웠을 시기였다.
에이젠은 잠시 기다렸다가 이 틈을 타고 그녀가 없을 클라리온 가에 방문했다.
“로아는 친구인 벨라니스 부인을 만나러 루베른 영지로 내려갔습니다. 아마도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올 것입니다.”
로아가 없는 대신 저택을 지키고 있던 백작 부부와 셰인데릭과 함께 차를 마셨다. 그들은 로아가 에이젠의 청혼을 거절한 걸 알고 있었다. 로아가 그를 오랜 시간 기다려온 걸 알았기에 누구보다 사위가 되길 바란 자였다. 그러나 갑자기 로아가 마음이 바꾸어버린 탓에 에이젠 앞에선 더욱이 좌불안석이었다.
“응접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에이젠은 하녀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편하게 겉옷을 벗어 내려놓았다. 에이젠은 자신의 뒤에서 그의 옷을 받아주는 하녀 쥬디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로아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하녀였다. 그가 이곳에 방문했던 날, 황실 무도회 초대장이 섞인 서신을 가져다준 사람이기도 했다.
에이젠이 로아가 없는 틈에 클라리온 백작 저에 방문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앞으로 왔던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훔쳐야 했다.
그때는 단지 로아를 자신의 저택으로 유인하는 도구로만 사용했다. 그러나 이번엔 완전히 인멸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혹시 내 앞으로 서신이 온 게 있나.”
“네?”
에이젠은 뜬금없이 자신의 앞으로 온 서신이 있느냐 물었다. 이곳은 그의 저택도 아닌데 왜 제 앞으로 온 우편물을 찾는지. 쥬디는 그 말을 제대로 듣고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급하게 받아야 할 게 있어. 이쯤에 들를 때 여기로 보내 달라고 했는데.”
“아, 그러시군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에이젠은 대충 말을 지어냈다. 쥬디는 우편물이 보관된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에이젠 역시 응접실에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클라리온 가에는 매일 매일 영지주민들로부터 다양한 건의가 담긴 서신이 왔다. 그중에는 가끔 성내에 나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로아의 앞으로 온 것도 많이 있었다.
에이젠은 수북이 쌓인 서신들 속 로아의 이름을 발견했다.
“여기 있는 건 아가씨 앞으로 온 건데…….”
쥬디는 로아의 서신만 모아둔 바구니를 옆으로 밀어냈다.
“아직 분류되지 않은 쪽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찾아드리겠습니다.”
쥬디는 창고의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사이에 에이젠은 로아에게 온 서신이 쌓인 바구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수많은 편지봉투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황실을 나타내는 황금빛 실링왁스. 어렵지 않게 황실 무도회의 초대장을 찾아냈다.
겉옷으로 그것을 숨긴 에이젠은 창고를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입구에 놓인 두꺼운 책자를 발견했다. 수신 여부를 전부 기록해놓은 책자였다.
영리한 로아는 수신기록까지 확인해 사라진 초대장을 찾으러 왔다. 그러니 이번엔 확실하게 증거를 없애야 했다.
그녀가 황실 무도회 초대장 따위의 존재를 아예 인지하지 못하도록.
황실에게서 서신을 받은 기록을 찢어버린 그가 종잇장을 구겨 초대장과 함께 옷깃 사이로 넣었다.
응접실로 돌아간 그는 지체할 것 없이 짐을 챙겼다.
“어찌 밖으로 나와 계신지요. 방이 불편하셨습니까?”
밖으로 나온 그는 복도에서 응접실로 걸어오던 셰인데릭과 마주쳤다.
“급한 일이 생겨 이제 출발해야 할 듯합니다.”
“예? 로아도 거의 도착했을 텐데 얼굴도 보지 않으시고 가셔야 하는 겁니까?”
그가 이곳에 들른 이유는 누가 봐도 로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황실 초대장을 수거하고 흔적까지 모두 없앤 에이젠은 굳이 지금 로아를 볼 필요가 없었다.
“유감이지만 그렇게 되었군요.”
어차피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보러 오게 될 테니까.
“로아에게 이걸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이젠은 로아에게 남겨둘 쪽지만 셰인데릭에게 건넸다. 짧은 인사를 나눈 그가 곧바로 성을 떠나갔다.
에이젠이 말한 서신을 찾지 못한 쥬디가 더러워진 옷을 탈탈 털며 창고에서 나왔다.
“어? 대공님은 벌써 가신 겁니까?”
“급할 일이 생겼다고 일정보다 일찍 출발하셨구나.”
워낙 급하게 떠난지라 셰인데릭 역시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셰인데릭이 먼저 발걸음을 떼고도 쥬디는 의아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여기서 받을 서신이 있으시다더니…….”
***
“다녀왔습니다.”
에이젠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루베른 영지를 다녀온 로아의 마차가 성안으로 진입했다.
“루베른 백작 부인은 잘 만나고 왔니?”
로아는 그녀를 마중 나와준 클라리온 백작 부부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이후 로아는 저택으로 들어서면서도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자신이 돌아왔을 때 그가 저택에 들렀던 걸 기억했다.
“로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선물이 도착했던데. 응접실에 가보렴.”
예상했던 로아는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응접실에 가면 에이젠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청혼을 거절했으니 안 올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으나 그는 과거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로아가 응접실 문을 노크하려 손을 들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쥬디가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어젖혔다. 안쪽엔 실례를 구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아는 황당한 얼굴로 안으로 걸어갔다.
“선물이라는 게……, 이 쪽지?”
“트로네 대공님께서 오전에 잠깐 들르셨어요.”
응접실에 있는 협탁 위엔 편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
“날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갔단 말이야?”
“네. 아가씨를 뵈러 들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쪽지만 남기고 먼저 출발하셨어요.”
들른 것까진 똑같았는데 편지만 남기고 가버렸다니. 자신이 기억하던 때와 다른 흐름이었다.
“뭐야, 분명 에이젠이 날 기다렸어야 하는데…….”
중얼거리던 로아가 다급한 손으로 접혀있던 편지를 펼쳤다.
「로아에게.
방문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와서 미안해.
이동하던 루트 중에 즉흥적으로 들러봤어.
로아가 너무 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안타깝게도 로아를 만나기도 전에 가야 할 때가 되어버렸어.
접때 내 저택에 초대하겠다고 했던 말 기억하려나.
당분간 클라리온 영지 쪽으로 갈 일이 없으니 로아 너를 내 저택에 초대하고 싶어.
가주가 바뀌었으니 6년 전과는 전혀 다른 저택이 되었거든.
시간이 된다면 한번 방문해줘.
그럼 나의 성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에이젠이 일전에 했던 말들이 글자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로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시간을 되돌아온 이 세계에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자신뿐이었다.
자신이 특별히 말이나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모든 게 똑같이 흘러가야만 했다.
그런데 자신이 관여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찾아온 에이젠의 흐름이 바뀌었다니.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목욕물 먼저 준비해놓겠습니다.”
“……그래.”
머릿속이 혼잡해진 로아가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아, 쥬디. 목욕물 준비되는 동안 서신들 좀 내 방으로 갖다 줄래? 내가 떠나있는 동안 많이 쌓였을 거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지금쯤 황실 무도회 초대장이 올 때였다. 로아는 먼저 침실로 올라가 쥬디가 서신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온 서신들 가져왔습니다.”
“응, 고마워.”
로아는 트레이에 놓여있던 서신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먼저 찾았던 초대장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쥬디. 서신 방금 준 게 다야?”
로아는 자신의 손에 놓은 서신들의 발신인을 두 번, 세 번씩 다시 확인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로아의 다급함에도 쥬디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네. 그게 전부입니다.”
로아는 가장 먼저 에이젠을 의심했다. 저택에 있는 사람 중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숨길 사람은 없다. 하필이면 에이젠이 자신이 없는 틈에 다녀갔다. 과거에도 에이젠은 로아가 자던 틈에 초대장을 몰래 열어본 전적이 있었다.
그러나 로아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로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초대장을, 이번엔 아예 가져가 버렸다?
그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 그가 범인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어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신할 때 기록한 거 있지? 그거 좀 가져다줘.”
쥬디는 수신기록 책자를 가지러 갔다. 로아는 그걸 기다리는 동안 불안함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이윽고 쥬디가 다급한 걸음으로 책자를 들고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수신기록을 확인해도 빠진 게 없습니다만…….”
올라오는 동안 미리 찾아봤지만 수신기록에 적혀 있으나 빠진 서신은 없었다. 로아는 쥬디의 말을 믿지 못해 자신의 눈으로 다시 책자를 넘기며 확인했다.
“……말도 안 돼.”
이 세계에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건 유일하게 에이젠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손대지 않은 부분까지 미래가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