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66)화 (66/107)

66. 결혼 안 해

에이젠은 클라리온 가를 방문한 이후에도 다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그가 돌아왔을 땐 시일이 지난 후였고, 떠나기 전 미리 얘기했던 대로 내부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중이었다.

“클라리온 가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그래. 공사는 잘 되어가나.”

클라리온 가에 다녀온 에이젠은 이전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이었다. 리예드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에이젠이 결혼하게 되면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조금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식을 최대한 빨리 진행하고 싶었다.

그가 신혼집을 꾸미라고 했을 때도 사용인들은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하루라도 빨리 햇살 같은 여인을 들여 그가 지금보다는 온순해지길 바랐다.

“설계도를 수정한 대로 내부 공사는 거의 진행되었습니다. 곧 계획했던 세부 인테리어가 들어갈 텐데 다시 한번 주인님께 컨펌 받겠습니다.”

리예드는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을 표시한 도면을 가져와 에이젠에게 건넸다. 그는 도면을 가지고 침실로 올라갔다. 리예드의 말대로 공사는 꽤 빠르게 진행되어 있었다.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려냈던 상상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완벽한 모습이었다.

“언제쯤 완성되는데.”

“창틀을 갈고 커튼을 달면 공사는 끝이 납니다. 다만 새로 주문해둔 침구와 화분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늦어도 차주 내로 완성될 수 있을 겁니다.”

리예드는 성내에 나가 미리 주문해둔 커튼과 화분 정보가 담긴 책자를 꺼냈다. 에이젠이 말했던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의 커튼과 각종 실내용 난초들이 리스트업되어 있었다.

에이젠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침실 공사를 위해 임시로 사용하실 침소를 다른 방에 마련해놓았습니다.”

당분간 침소로 써야 하는 장소 따위는 관심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새롭게 꾸며질 공간에만 쏠렸다. 설계도와 인테리어 용품 리스트를 훑어보던 그가 또 다른 곳을 물었다.

“지하실은.”

그가 지하실을 언급할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하실도 진행 상황은 엇비슷합니다.”

에이젠은 곧바로 계단을 내려와 지하실 쪽으로 향했다. 문을 가려놓았던 찬장은 훤하게 옆으로 치워둔 채였다.

“이건 왜 치워놨어.”

“네?”

당연히 지하실을 새로운 공간으로 조성했으면 앞으로 자주 사용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리예드는 그가 묻는 것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아, 공사를 하기 위해 인부들이 들락거리기 편하라고 일단 치워뒀습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해 신경을 거스를까 겁이 난 리예드는 임기응변으로 둘러댔다.

“이 공간도 활용하시려는 거면 입구를 잘 보이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리예드의 제안에도 에이젠은 영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찬장과 지하실 입구를 훑어보던 그는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공사 끝나고 환기까지 마친 후엔 다시 찬장을 들여놔.”

리예드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지하실을 제2의 침실처럼 화려하게 꾸며놓으라 지시해놓고선 완전히 감춰놓겠다니. 도대체 그가 여길 무슨 용도로 쓰려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전처럼 입구를 가리라는 말씀이신가요?”

“어.”

이해하지 못해 되묻는 말에도 에이젠은 단호히 대답했다.

에이젠은 발걸음을 떼어 입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살며시 그러쥐었다. 그는 문고리를 잡고도 대번에 문을 열어젖히진 못했다.

뒤에 서 있던 리예드는 덩달아 긴장했다. 그는 기사가 되기 위해 출가한 이후로 지하실로 되돌아간 적 없었다. 마를레나를 쫓아낸 뒤 그가 가장 먼저 뜯어고친 것이 저택 전체의 실내 건축이었다.

기존의 고상한 분위기와 앤티크한 인테리어는 전부 치우고 최대한 반대되는 분위기로 꾸려달라 했다. 그때만 해도 그가 이렇게까지 직접 실내 건축에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지하실은 아예 내려가 보지도 않았으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신혼집을 꾸리기 위해 재차 리모델링을 하는 와중에 지하실을 언급했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설계도를 보면서까지.

그럼에도 지하실 앞에 선 에이젠은 망설이는 듯했다. 아무리 겉모습이 달라졌다 한들 같은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담긴 이곳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문고리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기어코 문을 열었다. 안쪽은 화려하게 바꿔놨을지라도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만큼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햇빛 한 줄기조차 들어서지 못할 정도로 꽉 막힌 공간. 그곳을 내려다보던 에이젠은 서서히 발걸음을 뗐다.

“지하실이라 창문은 없지만 말씀하신 대로 같은 커튼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리예드는 에이젠의 뒤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침구와 화분 또한 침실 것과 같은 걸로 한날에 조달될 예정입니다.”

이곳에 들어선 그가 혹시라도 트리거 요소를 밟고 폭주할까 두려웠다. 그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괜히 주절거렸다.

계단을 다 내려온 에이젠은 다시 한번 문 앞에 섰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고 했던가. 두 번째 관문은 생각보다 쉽게 용기를 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펼쳐진 지하실은 자신이 알던 곳과 전혀 달랐다. 보석으로 만든 샹들리에부터 햇빛이 들지 않아도 곳곳을 밝히는 향초들이 있었다.

생각보다는 이곳에 머무르는 게 괜찮았다. 달라진 모습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을 로아를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어차피 그녀와 함께라면 그게 지옥이라도 뛰어들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전쟁터까지 다녀와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긴 마당에 이따위 지하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하실 점검까지 마친 그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잠시 내려갔다 왔을 뿐인데 위로 올라오자 공기가 훨씬 맑게 느껴졌다.

“주인님.”

지하실에서 올라온 에이젠을 본 하녀가 부랴부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트레이 위에 서신 한 통을 올려놓은 채로 에이젠에게 내밀었다.

“레이디 클라리온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서신이라면 몰아서 한 번에 전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발신인에 적힌 이름 ‘로아 클라리온’을 보자마자 수령한 하녀는 헐레벌떡 뛰어와 건넸다.

에이젠 역시 건네받은 서신을 서있는 자리에서 바로 뜯었다.

「에이젠, 잘 지내니?

다름이 아니라 내가 루베른 영지에 다녀온 사이 우리 성에 들렀다고 들었어. 온 김에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그냥 가서 많이 아쉽네. 먼 길 돌아온 걸 텐데.

저번에 초대해준 것도 있고 해서 에이젠을 보러 트로네 성에 한번 방문하고 싶은데 언제쯤 가면 될까?

에이젠의 일정이 괜찮은 때를 알려주면 그때로 맞추어 방문할게.」

에이젠은 길지 않은 편지 내용을 두 번, 세 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동글동글한 로아의 손글씨가 귀여웠다. 이 편지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로아의 모습도 상상되어 입가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내용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의 계획대로 로아는 자신의 저택으로 초청한 것을 수락했다. 이제 그녀가 이곳에 오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다시는 그녀가 끔찍한 죽음을 맞지 않도록. 이번 시간에서는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다 읽은 편지를 접으려던 에이젠은 편지지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쓰인 추신을 발견했다.

「ps. 쥬디를 통해 우리 저택으로 서신을 받을 게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아직 오지 않았더라구. 받기로 한 분께 다시 한번 확인해봐.」

피식, 웃음이 났다. 계략의 하나였을 뿐인데 그걸 믿다니. 그녀의 순진함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편지에 얼굴을 파묻은 그가 위엄 없이 낄낄거리는 얼굴을 가렸다.

“이래서 내가 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지…….”

로아의 글씨 위로 입술을 내려놓았다. 촉, 하는 소리에 에이젠은 벌써 로아가 제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모략에 순진하게 넘어올 로아와 이곳에서 평생 머무를 것이다. 그게 에이젠의 계획이었다. 물론, 로아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주인님.”

로아의 편지를 보며 기분이 좋아진 듯한 에이젠에 리예드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슬슬 결혼식을 준비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에이젠의 시선이 리예드에게로 옮겨졌다. 로아의 편지를 보던 따뜻한 눈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금전적인 부분은 황실에서 지원해주겠다는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예산에 맞추어 예식 플랜을 작성해서 보내면 된다고 합니다. 드레스의 경우에도 디자이너에게 미리 주문해두어야 일정에 맞출 수 있다고 하니…….”

조잘거리던 리예드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날카로워진 붉은 눈동자에 그는 하려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에이젠은 한동안 리예드를 내려다보다 느긋하게 입술을 뗐다.

“결혼식 안 해.”

리예드는 묵직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신부를 데려올 준비를 하고, 신혼집까지 꾸몄으면서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니.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예?”

제대로 들었지만 황당함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느른하게 돌아선 에이젠은 다시 쥐고 있던 편지로 눈을 돌렸다.

“그러니까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고.”

곧 자신을 보러 오겠다는 로아의 편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지하실 공사나 확실하게 신경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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