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당신을 살리는 방법
로아는 벨라니스를 만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마차에 몸을 실었다. 본래라면 저택으로 초대하는 에이젠의 제안을 은근슬쩍 미루려고 했다. 그러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황실 무도회의 초대장과 그 틈에 방문했던 에이젠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아야 했다. 마차를 타고 트로네 영지로 향하는 동안 로아는 묘한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돌아온 시간 속의 에이젠은 조금 이상해졌다. 특히 그의 눈빛에 차이가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해도 다정하게만 바라봐주던 남자였다. 여전히 저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는 똑같은데 눈빛만 오묘하게 변했다.
말로는 자신의 거절을 쉽게 받아들인 것처럼 굴었으나 좀 더 집요해진 눈은 미련을 질척하게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감 따위도 있었다. 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자신감.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트로네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6년 만에 와보는 저택. 로아는 온통 에이젠으로 가득 차 있을 저 공간에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가 자신 때문에 참혹하게 죽는 끔찍한 광경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했다.
“로아, 어서 와.”
마차에서 내린 로아는 트로네 대공 저의 정원부터 훑어보았다. 자신을 마중 나온 에이젠에게서 신경을 덜 쓰기 위해 괜스레 시선을 돌렸다.
로아는 그의 뒤로 펼쳐진 사용인들도 살펴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손님인 자신이 아닌 에이젠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딘지 불안한 눈으로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각하.”
분위기를 읽은 로아는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전했다. 그가 사용인들에게 위엄있는 주인이라면 자신이 그의 위상을 깎아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활짝 웃고 있던 에이젠은 로아의 존대에 표정을 굳혔다.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하기로 했잖아.”
에이젠은 로아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의 손을 잡아 입가로 가져가더니 가볍게 입을 맞추어 인사를 전했다. 로아는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손을 얼른 빼냈다. 그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 눈동자로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래도 사용인들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에이젠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이는 로아를 내려다봤다. 과거의 이 시간쯤에도 로아는 자신의 저택에 왔었다. 그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녀가 다르게 행동하는 걸까.
자신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그녀가 받아들이는 기분도 달라진다. 굳이 유추해보자면 거기서부터 시작한 연쇄작용으로 인한 변화일 것이다.
로아는 아마 불길한 징조를 이미 느꼈을지도 모른다. 촉이 좋은 그녀를 만만히 봐서는 안 됐다.
에이젠은 로아를 환기시키기 위해 정원의 산책길로 그녀를 데려갔다.
“이 정원은 언제나 아름다워.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나서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 후원에 나와 산책을 하곤 했지.”
“오랜만에 왔는데도 정원이 아주 잘 관리되었군요. 그때와 거의 비슷한 모습입니다.”
로아는 평소와 달리 정원에 잘 집중하지 못했다. 경계를 바짝 세운 듯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걸음걸이도 딱딱하게 굳어 어색했다.
“그땐 눈치를 보느라 정원에서만 만났었지. 오늘은 저택 안쪽까지 보여주고 싶은데.”
“직접 안내를 해주신다면 저야 영광입니다.”
고집스럽게도 로아는 말투를 고치지 않았다. 에이젠은 자신을 존대하는 로아가 거슬렸지만 일단은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머지않은 시간 안에 다시 그녀가 저를 편하게 대할 때가 올 테니까.
저택 안으로 들어선 로아는 6년 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분위기를 살폈다. 에이젠은 과거에 로아가 이 저택을 둘러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럼……, 마를레나 부인의 취향?’
‘참, 그러고 보니 마를레나 부인은 어디 계셔?’
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마를레나의 근황을 전혀 알지 못한다. 에이젠은 그녀가 이 집을 둘러보며 마를레나를 떠올릴 수 없게 해야 했다.
홀에서 크게 머물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곧장 2층으로 로아를 데리고 갔다. 그녀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은 공간이 있었다.
“이 방은 혼사를 맺게 되면 침실로 사용하고 싶어 화려하게 만든 방이야.”
침실을 본 로아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이곳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에이젠의 길어진 시선을 느낀 로아가 겨우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간단한 감상평이었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작은 움직임에도 놀란 로아가 얼른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마음에 들어?”
“네?”
“너 하나만을 위해 준비했던 방이거든.”
로아는 에이젠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또 달라져 있었다. 저번에는 오묘하게 달라진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그 기운이 훨씬 짙어져 있었다.
저를 향한 눈빛에 소유욕이 가득 차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곳도 보고 싶습니다. 예컨대 집무실이나…….”
그의 눈을 길게 마주 보지 못하고 결국은 먼저 피해버렸다.
“안내하지.”
에이젠이 몸을 휙 돌리고서야 로아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에이젠과 함께 있는 기분이 전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위압감에 꽉 눌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로아는 여전히 경계를 세운 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넌 맛있는 차나 예쁜 찻잔을 좋아했었지.”
에이젠은 집무실이 아닌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중 한 찬장 앞에 선 그가 유리 안쪽을 들여다봤다. 그의 취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예쁜 찻잔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맞습니다. 기억하고 계시군요.”
클라리온 가에 방문할 때면 두 사람은 테라스에 앉아 티타임을 자주 갖곤 했다. 그 몇 번의 시간 동안 로아의 취향을 정확히 간파한 에이젠은 비슷한 느낌이 나는 것들로만 찬장을 채워두었다.
“너에 대한 건 사소한 것 하나도 잊을 수 없으니까.”
에이젠은 찬장에서 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피식, 하는 미소가 번졌다. 로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참. 이 저택엔 아주 비밀스러운 공간이 하나 더 있어.”
에이젠은 손을 찬장 옆으로 가져갔다. 시선은 여전히 로아에게 고정된 채였다.
“거기엔 로아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더 많아.”
아주 잠깐. 겁을 먹었던 것을 억누를 정도로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찬장을 옆으로 밀어냈다. 로아는 움직이는 찬장을 보며 당황스러워했다. 곧 찬장이 비켜나간 곳에 문 하나가 드러났다. 에이젠은 씩 웃으며 그 문을 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지하실인가요?”
“응. 사용인들도 소수만 들어갈 수 있는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거든.”
신비스러운 광경이었다.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왠지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듯했다.
에이젠은 로아에게 내려가 보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이 먼저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로아는 멀어져가는 에이젠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야 자신의 치맛자락을 걷어붙여 발을 뻗었다.
에이젠은 뒤를 돌아 자신을 따라 내려오는 로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다 내려올 때까지 문을 열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가 자신의 뒤에 바짝 붙을 정도로 다 내려왔을 때쯤에야 문을 열었다. 로아는 문을 열고 기다려주는 에이젠을 뒤로하고 먼저 안쪽으로 들어섰다.
음산해 보였던 입구와 달리 안쪽은 매우 화려하게 치장된 방이었다.
“아까 그 침실과 거의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의 구조를 살폈다. 그녀가 방 한가운데쯤으로 갔다가 뒤를 돌아봤다. 입구 앞에 서 있던 에이젠은 깊숙이 들어간 로아를 보며 입꼬리를 씩 당겼다.
“여긴 로아 너만을 위한 공간이니까.”
“……네?”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곧 쾅, 하는 소리를 내며 입구가 닫혔다. 철컥,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까지 들렸다.
로아는 그제야 자신이 들어와선 안 될 곳에 와버린 걸 알아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다가오는 에이젠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살게 될 거야, 나의 레이디 로아.”
어딘지 위험해 보이던 그의 눈빛이 아스라이 녹아내렸다. 정말로 황홀하다는 눈으로 로아의 손을 잡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잠깐, 이게 무슨 짓입니까!”
로아는 에이젠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다.
“로아. 넌 날 벗어날 수 없어.”
그에게는 이것만이 정답이었다.
“절대로 널 놔주지 않을 거니까.”
과거의 로아는 자신을 거절하면서도 그 이유를 확실히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다고 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거절한 것이 괴로워 울기까지 했다.
뭔지는 몰라도 그녀를 옥죄고 있는 것을 풀어주기만 하면 됐다. 적어도 이 안전한 곳에서만은 그 누구도 그녀를 속박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로 인해 그녀가 괴롭다면, 차라리 그게 자신인 게 나았다.
적어도 그녀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것만이, 그녀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