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68)화 (68/107)

68. 가장 안전한 곳

“안 돼, 안 돼요! 난 여길 나가야만 해요. 난 당신과 결혼할 수 없다구요!”

로아에겐 이보다 더 최악이 없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그의 목숨은 위험해지니까.

에이젠에겐 로아를 살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로아에겐 에이젠을 죽일 가장 유력한 방법이나 다름없었다.

에이젠은 격하게 저항하는 로아의 팔을 꽉 붙들었다.

“너도 날 사랑하잖아. 내가 싫지 않잖아.”

그녀의 마음은 이미 과거부터 지금까지 겪어 알고 있었다. 로아는 에이젠의 말에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소리쳤다.

“싫어요!”

그 짧은 순간 로아가 내비친 반응을 보며 더욱 확신했다.

“거짓말.”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진심이 아니다. 언어 따위로 로아를 설득할 수 없단 건 과거의 시간 동안 충분히 학습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감에 거만한 미소를 짓던 그가 일순 슬픈 눈을 내비쳤다. 격분했던 로아 역시 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줘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을까. 난 그저 사랑했을 뿐인데.

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싶지 않았고, 그 또한 그녀를 가두고 싶지 않았다.

“넌 왜 이렇게까지 날 밀어내지.”

엇갈린 시간 속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전부 당신을 위해서예요.”

사랑하던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충격은 시간이 되돌아왔어도 잊히지 않았다. 그 참혹했던 광경을 건너 겨우 다시 만난 상대가 너무도 소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의 지옥 같은 경험은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이 싫어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상처입혀야만 했다.

“나 또한 전부 당신을 위해서야.”

사랑하니까, 이번엔 반드시 살려야 하니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냉기 어린 기 싸움은 한동안 계속됐다. 둘의 눈치를 살피던 하녀들은 먼저 지하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둘만이 남게 되자 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젠.”

드디어 로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이래? 이러는 거 너답지 않아.”

친근해진 말투와 달리 내용에는 굵은 가시가 박혀 있었다. 한껏 예민한 촉을 세운 로아는 에이젠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게 여길 왜 왔어.”

이는 에이젠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한 보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이럴 것도 몰랐어?”

붉은 눈동자에 대조되는 서늘한 기운이 품어졌다.

“내가 널 쉽게 놓아줄 줄 알았냐고.”

그가 자신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에이젠은 항상 자신을 위해주는 남자였다. 이렇게까지 강제적으로 자신을 구속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로아는 가까이 다가온 에이젠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두 눈을 꽉 감고 재빨리 두뇌를 회전시켰다.

이대로 에이젠의 곁에 있다 보면 당연히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그녀 역시 마음 같아선 그의 옆에 머물고 싶었으니까.

매일 그를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온기를 느끼다 보면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잊고 또다시 그를 욕심 내게 되고 만다.

“쥬디랑 서신 보관함을 들렀다면서.”

로아는 흥분할 뻔한 마음을 겨우 침착한 채 입을 열었다.

“그때 나한테 온 서신, 가져간 거지?”

에이젠을 거절하는 것 외에 모든 것은 원점이어야 했다. 그래야 다른 변수가 작용하지 않을 테니까. 로아는 자신에게 온 황실 무도회에 꼭 가야 했다.

“난 그걸 가지러 온 거야. 오해하지 마.”

로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에이젠이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가져간 것이라 확신했다. 그를 향해 돌려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이상하다.”

에이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수신기록까지 없애버렸는데 언제 어떤 서신이 왔는지 어떻게 알고 있지.”

로아는 에이젠의 날카로운 지적에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

어째서 황실에서 서신이 왔다는 걸 그녀가 알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이상했다. 과거에 리예드를 시켜 자신이 출정해 있는 동안 로아의 시간에 대해 뒷조사를 한 적 있다. 그때도 로아가 황실과 교류를 한다거나 하는 등의 소식은 전혀 없었다.

“아니면 루베른을 통해서인가.”

에이젠은 로아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묻는다 한들 그녀에게서 명확한 답을 얻어낼 순 없을 테니까.

“그게 지금 네가 이러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로아는 어영부영 논점을 흐리려 했다. 시선을 멀리 두었던 에이젠은 로아의 앙칼진 목소리에 서서히 눈을 돌렸다.

“상관이 있지.”

에이젠이 로아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로아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나는 거야말로 그와의 기 싸움에서 눌리고 만다는 의미였다. 물리적인 힘으로 그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기에 정신이라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거기 가면 네가 위험해지니까.”

낮에 속닥거리는 그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난 널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고.”

보호해주겠다 말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섬뜩했다.

“그러니까 넌 여기 있어야 해.”

에이젠이 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반쯤 가려졌던 로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가장 안전한 곳에.”

탁.

에이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아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듯 쳐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네가 원하는 대로 어울려줄 수 없겠어.”

로아는 단호한 거절과 함께 발걸음을 뗐다. 당차게 문 쪽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미 단단하게 잠겨버린 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철컥거리는 소리 뒤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문 여세요.”

로아는 문 뒤쪽에 있을 누군가를 향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뒤쪽에 있던 하녀들은 그녀가 원하는 답을 쉬이 해주지 못했다.

“열어. 문 열라니까!”

로아는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기까지 했다. 에이젠은 문 앞에서 난리를 치는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단단한 철문 위로 마구 부딪치는 그녀의 솜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은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잘 생각해봐.”

에이젠은 한 손으로는 로아의 손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네가 가장 안전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 말이야.”

로아는 에이젠을 피해 버둥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에이젠은 그 틈에 문고리를 잡았다. 그녀가 잡았을 때는 단단해 돌아가지도 않던 문고리였다. 그러나 그가 잡자 뒤쪽에서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쉽게도 열렸다.

에이젠은 그 틈에 지하실을 빠져나갔고 문은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닫혀버렸다. 로아는 문이 닫히기 전 얼른 몸을 움직였지만 이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에이젠, 이러지 마.”

다시 문 앞에 붙은 로아는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려댔다.

“에이젠, 에이젠!”

울부짖듯 그를 불러봤지만 문 뒤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러지 마. 나 무서워. 제발 열어줘, 에이젠!”

더 이상 문을 두드릴 체력도 잃은 로아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밀폐된 공간에 홀로 갇혀버렸다는 두려움이 곧 그녀의 전신을 강하게 짓눌렀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곳에 갇히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이곳에 갇혀있다는 걸 가족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이 저를 찾으려 하겠지만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에이젠이 여기에 없다고 진술한다면 국가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비밀스러운 지하실. 설령 저택을 수사하러 온다 해도 발견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로아는 저 말고도 걱정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에이젠이었다. 자신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그에게 또 부정적인 기운이 흘러가는 건 아닐까. 또 그가 자신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참사를 당하진 않을까.

“에이…….”

복합적이고 불길한 생각들은 그녀의 육신을 지배했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시야가 점차 흐려지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 픽 쓰러지고 말았다.

문 뒤쪽에 서 있던 에이젠은 묵직한 몸뚱이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 굳게 잠겨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로아.”

에이젠은 쓰러진 로아를 보며 사색이 됐다. 그녀의 가녀린 육체를 단숨에 끌어안아 흔들어봤지만 로아는 미동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숨 쉬어.”

에이젠은 로아의 뺨을 두드리며 말했지만 로아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로아의 머리칼 속을 헤집어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에이젠은 그대로 자신의 입술로 로아의 입술을 감쌌다. 살짝 벌어진 입안으로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흐읍.”

그제야 로아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되찾지는 못했다. 로아를 번쩍 들어 안은 에이젠은 그녀를 지하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숨을 잘 못 쉬는 그녀에게 밀폐된 공간은 치명적이었다.

쓰러진 로아를 안고 나온 에이젠을 본 리예드가 후다닥 그에게로 달려왔다.

“주인님, 이게 어떻게 된…….”

“의사 불러.”

2층 침실을 향해 올라가던 에이젠은 멍하게 저를 올려다보고만 있는 리예드를 향해 한 번 더 소리쳤다.

“당장 의사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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