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안 보낼 건데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트로네 가의 주치의인 조나단이 도착했다. 그는 침대 위에 누운 로아의 곁으로 갔다. 에이젠은 조나단의 뒤에 바짝 서서 그가 하는 진료행위 하나하나를 살폈다. 조나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서늘한 시선이 느껴져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진찰을 시작했다.
“단순한 쇼크입니다. 빠르게 혈압이 상승하면서 잠시 블랙아웃 현상을 겪은 거라 보면 되겠네요.”
걱정했던 것만큼 로아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적응하지 못한 환경과 자신에게 닥친 충격이 버무려진 단순한 증상이었다.
“생명엔.”
진료 결과를 듣고도 에이젠은 깊게 찌푸린 인상을 펴지 않았다. 조나단은 겨우 이 정도에 생명을 걱정하는 에이젠에 어이가 없어 뒤를 돌아봤다.
“생명엔 당연히 지장 없습니다. 푹 주무시고 깨어나시면 멀쩡할 거예요.”
주사기에 약을 주입한 조나단은 로아의 팔 위로 바늘을 찔렀다.
“주사도 다 놓았으니 일어나면 피로가 회복될 겁니다. 푹 쉬면 금방 나아질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간단한 진찰을 마친 조나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용인들에게로 간 그는 로아가 일어나면 원기 회복에 좋을 법한 영양 식단까지 알려주고 돌아갔다.
에이젠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한 로아의 곁을 지켰다. 주삿바늘이 찔렸던 팔엔 작은 반창고를 붙여 지혈해둔 상태였다. 에이젠은 그 조그마한 핏방울만 보고도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와 금빛 머리칼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던 그때. 푸른 눈동자를 채 감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그녀의 끔찍한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 어슬렁거렸다.
“……로아.”
에이젠은 희고 가느다란 로아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차가웠던 그때와 달리 그녀의 손은 분명한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어루만지고도 믿을 수 없어 그녀의 손을 제 뺨으로 가져갔다. 손목을 그러쥐자 미세하게 뛰고 있는 맥박도 느껴졌다.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다른 손을 로아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땀에 절어버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봉긋한 이마가 드러났다. 몸을 일으킨 에이젠은 그녀의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려놓았다.
“이제 내 곁에 있어.”
그녀를 제 옆에 두고, 생명을 느끼고 있는데도 도저히 불안한 감정이 가라앉질 않았다. 이마에서 입술을 떼고도 에이젠은 두 눈을 고이 감은 로아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럼 널 괴롭히던 것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고개를 숙인 그는 로아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이 제 안으로 들어왔다. 살짝 비튼 콧대 밑으론 그녀의 숨결이 은은하게 전해졌다.
살아있다. 로아는 죽지 않았다.
***
“으음…….”
묵직한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눈을 뜨고도 다 떠진 건지 헷갈릴 정도로 어두운 공간이었다.
“여긴……?”
몸을 일으킨 로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암순응으로 인해 서서히 시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로아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고개를 돌린 로아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 문 앞에서 열어달라고 소리치다가 픽 쓰러지고 말았다.
“에이젠?”
이곳이 에이젠의 저택인 것도 떠올렸다. 그가 자신을 지하실에 가두어버린 것도. 헐레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문 앞으로 걸어갔다.
“일어나셨어요?”
문 바깥쪽에선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지하실 문이 열렸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이 하녀는 트로네 가의 사용인인 만큼 에이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로아는 아무 죄 없는 하녀를 밀치고 나가고 싶진 않았다. 이곳을 나가려면 에이젠과 대화로 푸는 방법이 최선일 테니까.
문을 잠그고 돌아본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로아는 그녀의 얼굴을 대번에 알아봤다.
“제인?”
“네?”
이 시간 속에서 로아와 제인은 초면이었다. 제인은 처음 보는 로아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단 것에 화들짝 놀랐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아, 아니.”
당황한 로아가 제 입을 손으로 가려봤지만 늦은 타이밍이었다.
“미안해요. 습관적으로……. 우리 클라리온 가에도 ‘제인’이라는 사용인이 있어서.”
로아는 임기응변으로 겨우 상황을 모면했다.
“워낙 흔한 이름이기는 하죠.”
다행히 제인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로아는 의식을 잃기 전 에이젠과 했던 대화에서도 실수를 했었다. 그의 말대로 수신기록까지 말끔히 지워버린 서신을 찾으러 왔다니. 아무리 그가 서신 보관함에서 수상한 행동을 했어도 너무 명확하게 짚어버린 바람에 의심을 사버렸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에이젠의 행동 역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가 서신 보관함에 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겠다는 핑계로 그 안에 들어섰다는 건 목적이 분명히 있었던 모양인데.
에이젠이야말로 어떻게 황실 무도회 초대장이 온 타이밍이라는 걸 알았던 걸까.
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는 동안 땀을 많이 흘리셨더라구요. 목욕물 준비해두었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던 찰나에 제인이 끼어들어 흐름이 끊겨버렸다.
“그전에 일단 물 한 잔 마시세요.”
제인은 따뜻한 물에 꿀을 타 로아에게 건넸다. 로아는 달콤한 꿀물을 마시며 천천히 머리를 식혔다.
“에이젠은?”
“목욕하고 계실 동안 깨어나셨다고 말씀드리려구요. 나오시면 대화 나누실 수 있으실 거예요.”
지하실엔 커다란 욕조가 설치된 욕실부터 조그마한 창고까지 이곳을 나가지 않고도 기본적인 것들은 다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에이젠은 자신을 이곳에 가두어 그 어떤 핑계도 대지 못하도록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해놓고 자신을 초대한 것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 생각해보면 먼저 일정을 잡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서신 보관함에 들른 것은 일부러 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의 계략 위였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욕실로 들어섰다. 일단 몸을 씻어내고 진정이 되면 다시 에이젠과 얘기를 나눌 것이다. 반드시 그를 설득해서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몸을 푹 담그는 동안은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졌다. 한참을 멍한 수증기 속을 헤매던 때, 지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로아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피로를 충분히 풀지도 않은 상태에서 욕조를 벗어났다. 간단하게 샤워만 마친 그녀는 제인이 두고 간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에이젠…….”
욕실 문이 열리고 로아가 다급한 걸음으로 튀어나왔다. 의자에 앉아 가만 기다리던 에이젠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문틈으로 모락모락 쏟아져나온 수증기 사이로 로아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긴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탓에 다 드러난 목덜미엔 다 닦이지 않은 물기가 뚝뚝 흘렀다. 가벼운 차림에 입욕제 향기까지. 에이젠은 잠시 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급히 나온 로아의 앞으로 제인이 다가섰다. 큰 타월을 든 제인은 로아에게서 뚝뚝 흐르는 물기를 닦아주었다. 에이젠은 그 틈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정비를 마친 로아가 에이젠의 앞으로 걸어왔다.
“지하실이라는 공간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나 봐.”
에이젠은 로아의 당찬 걸음걸이와 불만 가득한 표정을 보며 안도했다. 조나단의 말대로 금방 원기를 회복한 모양이었다.
“하긴 지상에서 너처럼 반짝거리는 햇살만 보고 살았을 테니 그럴 만도 하지.”
에이젠은 부드럽게 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로아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과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지하라는 공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살다 보면 익숙해지기도 하고.”
“그게 무슨 말이야?”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테니 오늘처럼 픽 쓰러지거나 그럴 일은 잦아들 거란 얘기지.”
“그러니까 왜 내가 여기 계속 있을 것처럼 얘기하는데?”
로아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알면서도 이를 부정했다. 에이젠이 이렇게 삐뚤어진 소유욕을 가진 남자가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니까.”
그러나 에이젠은 자신의 계획을 굽힐 의지가 조금도 없었다. 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젠. 도대체 왜 그래?”
과거에 그와 결혼했을 때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아의 말이라면 절대적으로 들어주고 양보하던 에이젠이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널 거절했더라도 이런 식으로 억지 부리는 건 아니잖아. 우리 부모님은 내가 왜 돌아오지 않는지 걱정하실 테고…….”
“로아 네가 데려온 사용인들도 전부 돌려보냈어.”
그녀가 걱정하는 것들. 아니, 어쩌면 유일하게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들. 에이젠은 그럴 위험이 있는 유입통로를 모조리 차단시켜 두었다.
“당분간 트로네 가에 머물 테니 걱정 말라 전했고.”
“당분간?”
로아는 에이젠이 내뱉은 말에서 허점을 찾아냈다.
“당분간만 이렇게 어울려주면 날 보내주는 거지?”
느른해진 눈, 거만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로아는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아차렸다.
“아니.”
에이젠은 그게 딱히 허점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안 보낼 건데.”
그렇게 말했을 뿐, 그대로 지킨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