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70)화 (70/107)

70. 이만 놔줘

로아를 가두어둔 지 나흘째. 바깥 업무를 마치고 성으로 돌아온 에이젠에게 새로운 루틴이 하나 생겼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사용인들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다. 오늘따라 그들의 낯빛이 어두웠다. 에이젠의 눈을 잘 쳐다보지도 않고 평소보다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에이젠이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 집사 리예드는 그의 뒤를 지켰다.

“오늘 로아는 잘 있었나.”

에이젠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로아의 안부였다. 흘기는 시선은 날카롭게 리예드를 향했다. 예상했다시피 리예드는 무언가를 말하는 걸 망설이듯 우물쭈물거렸다.

“정원을 보러 나가고 싶다고 하셔서 하녀들과 함께 외출하셨습니다.”

에이젠은 불편한 심기를 가득 담아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리예드는 부릅뜬 그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누가 마음대로 밖으로 내보내라고 했지.”

그의 허가 없이 로아에게 자유를 주었다. 에이젠은 하마터면 로아를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다 아찔해졌다.

“하녀들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탈출을 시도하셔서…….”

리예드는 고개를 푹 떨군 채 보고를 이어갔다. 아주 잠시 자유를 허용했을 뿐인데, 로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을 탈출했다.

차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집어삼키던 에이젠이 리예드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화들짝 놀란 리예드가 얼른 두 손을 마구 내젓기 시작했다.

“물론 기사들에게 수색을 시켜 금방 찾았습니다. 인근 숲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합니다. 탈 것이 없다 보니 그리 멀리 도망가진 못한 모양이십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로아는 이 저택 지하실에 안전하게 있었다. 에이젠은 결과를 듣고도 불안하게 쿵쿵거리는 심장을 잠재울 수 없었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은 여전히 과거의 끔찍했던 때를 기억했다.

“하녀들은 제 선에서 따끔하게 교육해두었으니 너무 무어라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리예드는 사용인들을 대표해 에이젠에게 몇 번이나 사과의 말을 전했다.

“로아는.”

“예?”

그러나 에이젠의 머릿속엔 누가 왜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안 다쳤나.”

사용인들의 처사는 나중 문제고,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여전히 로아만을 향했다.

“아, 급하게 도망가는 동안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셨다 합니다. 발바닥에 자잘한 생채기가 생겨 치료해드렸습니다.”

옷을 다 갈아입은 에이젠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뜸을 들였다. 리예드의 옆을 스치듯 지나친 그가 경고하듯 낮은 음성을 냈다.

“앞으론 내가 없을 땐 밖으로 내보내지 마.”

감정을 억지로 짓눌러놓은 듯한 목소리였다.

“답답하다고 징징거려도 지하실에서 못 벗어나게 해.”

리예드에게 똑똑히 지시 내용을 전한 그가 먼저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

“알겠습니다.”

리예드가 뒤늦게 고개 숙여 대답했지만 이미 그는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사용인들은 에이젠을 식당으로 안내했지만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지하실 쪽이었다. 로아를 향하는 그의 걸음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가 달아났을까 두려워 쿵쿵거리던 심장은 점차 두근거리는 부드러운 박자로 바뀌어 갔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 장치가 풀렸다. 사랑하는 그녀를 가두어 놓았던 지하실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에이젠은 눈앞의 로아를 확인하고서야 응어리져있던 지독한 감정을 사르르 녹아내릴 수 있었다. 침대 끝에 앉아있는 로아는 참 아름다운 자태였다.

“나의 레이디, 로아.”

어쩌면 이곳에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고운 때깔이었다. 에이젠은 로아를 데려오기 전, 그녀에게 주고 싶은 수많은 선물을 준비해두었다.

황실 의복을 담당하는 디자이너에게 로아와 어울릴 만한 드레스들을 맞춤 주문을 해두었고, 액세서리나 화장품도 마찬가지였다.

탈출하느라 입고 있던 옷은 엉망이 되었고 윤기 있던 머릿결도 마구 헝클어졌다. 하녀들은 이런 로아의 모습을 에이젠이 봤다간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가 가장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용해 로아를 꾸며놓았다.

그가 로아를 위해 준비해두었지만 사용하지 못했던 것들이 전부 로아에게 착장되어 있었다.

“잘 있었어?”

예상대로 에이젠은 로아의 모습이 마음에 든 듯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심통이 났어, 응?”

로아는 제 앞까지 걸어온 에이젠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그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에이젠은 로아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로아의 두 손이 자연스레 그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내가 없는 사이에 탈출 시도했다면서.”

그를 밀어내려던 로아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에이젠은 로아가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킨 그가 만들어낸 그림자에 로아는 금세 지배당했다. 순식간에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발버둥을 치기도 전에 역동적으로 돌아간 몸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로아는 침대에 정자세로 눕혀졌다. 그리고 에이젠은 두 팔로 제 몸을 지탱한 채 로아의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짓이야.”

당황한 로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고집스럽게 피하던 시선도 그제야 맞물렸다. 에이젠의 뜨거운 눈길은 로아의 얼굴을 훑다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몸도 함께 로아의 몸을 훑더니 밑으로 향했다. 불안해진 로아가 버둥거리자 그녀의 어깨를 꾹 눌렀다.

“가만히 있어.”

로아의 발끝에 다다른 에이젠은 그녀의 가녀린 발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발목부터 발바닥까지 성한 곳이 없네.”

뒤도 안 돌아보고 맨발로 도망간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저를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에이젠은 로아가 애잔하면서도 괘씸한 마음도 있었다.

“바람이 쐬고 싶으면 나한테 말을 하지. 함께 산책 정돈 가줄 수 있었는데.”

로아는 에이젠이 손안에 감싸 쥔 제 발목을 꺼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버둥거렸다간 그가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다.

“내가 없을 때 이러면 너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잖아, 로아.”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매서워진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이상 날뛰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고. 아랫입술을 꾹 깨문 로아는 파르르 떨었다.

“널 담당하던 사용인은 해고할 거야.”

에이젠은 덤덤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뭐?”

로아는 휘둥그렇게 커진 눈으로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관리를 소홀히 했으니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지.”

자신 때문에 사용인 한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로아는 박하게 구는 에이젠을 원망스럽게 바라봤지만 딱히 따질 말은 없었다.

“그러게 왜 도망가고 그래. 애꿎은 하녀만 직무유기한 셈이 돼버렸잖아.”

그녀에게 백날 으르렁거려봤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작자였다. 그보다는 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다.

“그러지 마, 에이젠.”

에이젠은 사람들에게 정이 많은 로아의 마음을 이용했다.

“도망……, 안 갈게.”

탈출을 시도해보고 느낀 점이 있었다. 조력자가 있지 않은 이상 이곳을 제힘으로 벗어나기엔 무리가 있었다. 거기다 자신의 허튼수작 때문에 다른 사용인들만 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보다 좀 더 고차원적이고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이성을 붙잡고 있을 때 대화로 해결해보고자 했다.

“난 너랑 있으면 안 돼, 에이젠.”

나지막이 뱉은 로아의 간절한 목소리가 지하실에 낮게 깔렸다.

“내가 너한테…….”

로아는 뒤를 다 잇지 못했다.

자신이 그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에게 좋지 않은 기운이 되어 그를 단명하게 만들 거라는 것. 이런 미신적인 말을 에이젠이 믿어줄 리 없었다.

“나한테 뭐.”

에이젠은 뒷말을 흐리는 로아를 재촉했다.

“말해봤자 믿기 힘들 거야.”

로아는 대화를 거부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얘기 좀 해줘봐.”

사근사근 구슬리는 에이젠에도 로아는 기어이 함구했다.

“쉽게 입 열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과거의 경험이었다. 어차피 로아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에이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로아는 지하실을 나갈 채비를 하는 에이젠에 다급한 마음이 생겼다. 이대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말이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로아는 에이젠의 소매 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내가 네 옆에 있으면 위험하단 말이야.”

다소 두루뭉술한 말이었다. 로아를 돌아본 에이젠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로아는 에이젠의 눈치를 살피다 뒤를 이어갔다.

“난 에이젠 네가 위험에 처해지는 게 싫어. 그걸 내 눈으로 봐야 하는 건 더 싫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때를 떠올리듯 괴로운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이만 날 놔줘.”

자기 딴엔 무언가 일리 있는 이유를 내놓은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상대방에게 설득력 있는 충분한 논리는 아니었다. 에이젠은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에 앉혔다.

“로아.”

화가 난 것처럼 거칠었던 그의 인상이 풀어졌다. 커다란 손은 로아의 머리칼 속을 파고들더니 그녀의 뺨을 감쌌다. 찡그렸던 로아의 미간도 서서히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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