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싫으면 밀어내
“네 옆에 내가 없으면 네가 위험해져.”
에이젠은 로아의 머리칼을 밀어내고 드러난 그녀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나 또한 네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 그것도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라면 더욱.”
에이젠 역시 로아가 했던 말처럼 명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형태였다. 로아는 어리둥절한 두 눈을 깜빡거리다 에이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위험해지는 건 상관없어. 난 내 목숨 다 바쳐서라도 널 지킬 거니까.”
농밀한 손길은 머리칼 속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로아의 뒷목을 감싸 쥔 채 저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코끝을 찌르는 향기로운 비누향이 그의 긴장을 풀리게 했다.
“난 그러려고 살아가는 자거든.”
반항적으로 굴던 로아는 막상 에이젠의 품에 안기자 얌전해졌다. 그의 목 부근에서 확실하게 뛰는 맥박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의 숨결이 제 살결에 닿기도 했다.
아무리 모진 말과 반항적인 태도를 취해야 했어도 지금 이 순간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던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포옹할 수 있는 건, 어찌 됐든 기적이 일어난 셈이었으니까.
이성을 잃을 뻔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에이젠의 품에 안겨 지난날의 설움을 다 풀고 싶을 정도로 나약해졌다. 그러나 로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를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더욱 단단해져야 했다. 에이젠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린 로아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싫어.”
나지막이 거절의 말도 해보았다.
“내가 싫다니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에이젠은 저를 밀어내는 로아를 빤히 바라봤다. 시선이 맞물리자 로아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네가 나한테 목숨 바쳐 살든 말든 그런 거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눈은 제대로 마주 보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는 상대방을 상처 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싫어?”
에이젠은 로아의 눈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로아는 그의 움직임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날 똑바로 봐.”
에이젠은 자꾸만 도망가려는 로아의 턱을 손으로 움켜쥐듯 붙잡았다.
“피하지 말고 내 눈 똑바로 보라고.”
다급해진 로아의 두 손이 제 얼굴을 고정시킨 그의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피할 수 없어 마주친 두 눈에 로아는 떨리는 눈동자를 다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날 보면서 싫다고 지껄여봐.”
“싫…….”
참 이상했다.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사랑하는 남자 에이젠.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자신이 옆에 없어도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 기적처럼 다시 만난 에이젠에게 상처 주기 위해 시간이 되돌아온 건 아닐 것이다.
“왜 말 못 해.”
에이젠은 망설이는 로아의 허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로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이었다. 이 이상 몰아붙였다간 나약하게 으스러지고 말 것 같았다.
에이젠의 눈을 더는 마주 볼 수 없었던 로아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레이디에게 대답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 같네.”
툭, 이마에 묵직한 것이 닿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긴장한 로아는 서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제 이마에 에이젠의 이마가 닿고, 서로의 코끝도 스치고 있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로아의 입술을 스치기도 했다. 에이젠은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물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와 있었다.
“그럼 내가 싫다면 피해.”
떨리던 두 눈이 퍼뜩 뜨였다.
“키스할 거니까.”
“……뭐?”
미처 다 되묻기도 전이었다. 흡, 하고 숨을 들이쉬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맞물렸다. 방심하고 있던 로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고, 그 안으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혀가 제 안을 마음껏 휘저었다.
너무 놀란 로아는 목석처럼 굳어버릴 뿐 그를 밀어내는 둥 반항의 몸짓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신없이 자신을 옭아매는 그의 거침없는 유혹에 잠시 자신의 본분을 새하얗게 잊어갔다.
피로에 지친 육신은 어느새 본능적 욕구를 일깨워갔다. 에이젠의 어깨 위를 맴돌던 두 팔이 어느새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로아의 움직임을 느낀 에이젠은 실눈을 뜨고 로아를 바라봤다. 그녀 역시 욕망에 몸을 맡긴 듯 점점 적극적으로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뒤쪽으로 기울어지던 로아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넘어갔다. 에이젠의 몸뚱이 역시 그녀의 위로 겹쳐진 채였다.
“로아.”
짙은 키스를 먼저 멈춘 건 에이젠이었다. 그는 제 아래 지배된 듯한 로아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날, 피하지 않았어.”
로아는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동안 지켜왔던 금욕의 선이 저도 모르게 터져버린 듯 잠시 이성을 잃고 그를 탐닉했다.
“아, 아니야. 너무 놀라서 읍…….”
무어라 변명을 둘러대기도 전에 에이젠은 다시 한번 로아의 입술을 집어삼키듯 물었다. 그와 스킨십을 나눌 때면 이상하게 정신이 몽롱해지고 몸이 흐물거렸다. 로아는 이번에도 에이젠의 옷깃을 꽉 쥘 뿐 밀어내지 않았다.
에이젠은 허덕이는 로아에게 숨 쉴 틈을 주었다.
“아, 하아, 그만. 에이젠…….”
로아는 그와 스킨십을 끝내고서야 이성을 겨우 붙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몽롱해진 눈빛은 제정신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싫으면 밀어내.”
밀어내라는 에이젠의 말에도 로아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는 그를 밀어야 한다고 시켰지만 힘이 빠져버린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어쩌다 입술을 달싹거릴 때면 저도 모르게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에이젠은 로아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로아의 턱을 쥐고 억지로 눈을 맞추었다.
“내 눈 보면서.”
겨우 용기를 냈던 말도 눈을 보면 목구멍 뒤로 쏙 숨어버렸다. 결국 목소리를 내지 못한 로아는 에이젠에게 다시 한번 집어삼켜졌다.
“싫다는 사람 맞아? 날 끌어안지 말고 밀어내라고.”
그의 숨결을 더욱 느끼고 싶었다. 그가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무어라 자극하든 지금 이 순간만은 그의 존재를 제 안으로 되새김질했다.
에이젠의 손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로아의 몸을 어루만졌다.
“하아, 흐읏…….”
고개를 젖힌 로아는 뜨거운 숨결을 허공으로 뱉어냈다. 야릇한 신음에 에이젠은 하던 것을 멈추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멈춰버린 에이젠에 로아는 오히려 아쉬운 눈길로 그를 좇았다.
“로아.”
한결 가벼워진 그가 싱긋 웃어 보였다.
“대답 잘 들었어.”
로아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잠시 넋을 놓고 그에게 몸을 맡겼던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그제야 알아차렸다.
“역시 날 싫어하지 않는구나.”
로아의 하얀 손을 잡은 에이젠은 제 입술 쪽으로 가져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로아의 손등에 짧게 닿았다. 잡았던 손을 놓기 직전까지 그는 로아의 손끝을 어루만졌다.
안 그래도 에이젠은 로아가 무어라 말하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여지를 남겨버린 셈이었다.
“식사는 여기로 준비해달라고 했어. 거르지 말고 맛있게 먹어.”
로아의 마음을 확인한 에이젠은 만족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가 지하실을 나간 후에도 로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
도망갈 방법을 궁리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한 번 탈출을 시도했던 이후로 외출도 금지되는 바람에 그야말로 감옥 신세가 따로 없었다.
작게나마 시위를 하고 싶어진 로아는 식사를 거절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그녀의 시위는 에이젠이 아닌 사용인들만 애태우는 꼴이었다.
지하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화려해졌다. 그 다채로운 방 한가운데에서 로아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피부에 닿는 이불은 온몸을 노곤하게 만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녀의 눈앞에는 각종 보석이 쓸어 담긴 상자가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려다보는 로아의 눈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끼익, 쿵-
매번 비슷한 시간쯤에 들려오는 소음에 로아의 눈꺼풀이 밀려 올라갔다.
지하실 생활도 길어지다 보니, 발소리만 들어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 지하실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소리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몸을 일으켜 앉은 로아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아직 그가 들어오기도 전인데, 도망치듯 미리 침대 끄트머리로 바짝 붙었다.
곧 굳게 잠겨진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예상대로 에이젠이었다.
“나의 레이디, 로아.”
지루함에 지쳐버린 로아와 달리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도 잘 있었나.”
밀폐된 공간에 갇혀있는 사람에게 잘 있었냐는 물음의 의도는 무엇일까. 로아의 눈이 앙칼지게 변했다. 차마 그 시선의 끝에 에이젠을 둘 수는 없어 고개를 숙였다.
“식사를 거절했다고 들었어.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어?”
침대로 가까이 다가온 그는 모서리에 앉았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느냐고 묻는 그의 목소리는 퍽이나 다정했다. 그런데도 로아는 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랫입술을 말아 넣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