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만질 때마다
“우리 아가씨가 또 무엇이 불만일까.”
로아는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에이젠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로아는 끌려가지 않으려 팔에 힘을 주고 버텨봤다. 그러나 지하실에만 갇혀 지낸 지 오랜 터라, 반항할 체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원하는 건 얼마든지 들어주고 있잖아. 이보다 더 부족한 게 있어?”
그는 가끔 외출을 하고 돌아올 때면, 로아를 위한 선물을 하나씩 가져오곤 했다. 그녀를 위한 드레스나 액세서리 따위였다. 그다음 날이면 로아는 아침에 일어나 그 드레스를 입고 그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했다.
그의 입맛에 따라 옷을 갈아입히는 창고 속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내보내줘.”
에이젠은 로아가 자신의 심기를 일부러 건드리는 것을 알았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워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럴 수 없어.”
그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난 에이젠과 결혼할 수 없으니까.”
로아는 가느다란 팔을 들어 그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그렇다고 단단한 그의 몸이 쉽게 밀려나지는 않았다. 에이젠은 저를 밀어내는 로아의 눈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상했다. 이렇게나 싫어하면서, 그녀의 눈꼬리엔 촉촉한 것이 고여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할 때면 꼭 제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았다.
“그래. 나와 결혼하지 않아도 돼.”
에이젠은 가볍게 로아의 두 팔을 잡아 제 목 뒤로 넘겨버렸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로아가 에이젠의 품 안에 쓰러졌다. 에이젠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두 팔로 로아의 등과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트로네 대공비가 아니더라도, 넌 그냥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주면 돼. 난 그거면 돼.”
두 사람 사이에 조금의 틈도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밀착됐다. 로아는 그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려봤다. 그러나 그녀를 단단하게 붙든 그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로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에이젠은 그제야 꽉 붙들었던 팔에 힘을 풀고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거친 숨을 몰아쉰 로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긴 너무 답답해. 잠깐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
에이젠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식물이 가득한 정원과 숲을 떠올렸다. 푸르고 푹신한 잔디밭 위에 누워 평화롭게 잠들어 있던 그녀, 화단에 직접 물을 주던 그녀, 무릎을 굽혀 풀내음을 맡던 그녀.
쾌적한 공기와 녹음이 우거진 숲에서 자유로이 뛰놀며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가장 보고 싶은 건 에이젠이었다.
“나중에. 네가 나에게 진심을 보인다면 난 반드시 널 지상으로 데려가줄 거야.”
에이젠의 손이 로아의 뺨으로 향했다. 길고 금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밀어냈다.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려 했다. 로아는 저를 만지려는 에이젠의 손길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듯 얼른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웃고 있던 에이젠의 입꼬리가 슬슬 떨리기 시작했다.
“네가 날 이렇게 끊임없이 밀어내는 이상,”
에이젠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로아를 다른 손으로 다시 돌려놓았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 강제로 눈을 맞추었다.
“아직은 널 밖으로 데려가줄 수 없어.”
피할 곳 없는 로아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감긴 눈 끝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린 에이젠은 그 얼굴마저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러곤 단번에 로아의 입술을 집어삼키듯 물었다.
“……으읍!”
말랑한 아랫입술을 물고 제 입안에서 잔뜩 굴렸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을 들이켤수록 더욱 갈증을 일으킬 뿐이었다. 깊고 짙게 맞물렸던 입술이 곧 떨어졌다. 로아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에이젠의 시선은 예쁜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아랫입술이 타액에 젖어 번들거렸다.
“빨리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에이젠은 자신이 남긴 흔적에 만족스럽다는 듯 웃더니 손가락으로 훔쳐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입술이 이번엔 로아의 귓가로 다가갔다.
“어차피 날 사랑하잖아. 그치, 로아?”
세뇌하듯 매일같이 새겨넣는 말이었다. 로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잘 자, 나의 레이디.”
마지막으로 로아의 봉긋한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지하실 밖으로 나갔다. 로아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의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문을 응시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철컥, 하는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실을 빠져나온 에이젠은 늦은 시간에도 침소가 아닌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집무실이 켜져있는 한, 밖에 있던 사용인들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
“황실 무도회…….”
어느덧 시간이 흘러 황실 무도회가 바로 내일이 되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앞으로 왔던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꺼내 들었다.
그녀에게 거절당하기 전. 에이젠은 유다르에게 확실하게 레이디 클라리온은 자신의 정혼자라 일러두었다. 그런데도 유다르는 거리낌 없이 로아의 앞으로 초대장을 보냈다.
과거엔 아리송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유다르가 황실 무도회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게 로아라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었다.
‘태자 저하께서 날 선택하신다면 겸허히 받아들여야겠지.’
‘그러니까 돌려줘, 내 초대장.’
과거의 시간 속, 로아는 이 황실 무도회에 반드시 참석하려 했다.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고도 완곡한 태도였다.
‘그냥, 그냥 아무것도 모른 척해주면 안 될까?’
‘내가 힘들어 보여도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그러나 유다르의 신부가 됐던 로아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그녀가 저를 두고 유다르를 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피의 신부가 될 거란 걸 알고도 그랬던 건 아닐까.
‘제발, 제발 가지 마.’
싸늘한 주검이 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로아가 자신을 향해 힘겹게 뱉어낸 간곡한 목소리가 울렸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제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랐던 그녀의 진심은 뭐였을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에이젠은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
다음 날. 아직까지는 그가 대공으로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기에 주로 귀족들의 성에 방문하거나 황궁을 가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그날은 오랜만에 저택 안에서 집무를 보는 날이었다. 저녁 시간이 되기 전 할 일을 마친 에이젠이 지하실로 내려왔다.
“오늘은 일찍 끝내고 내려왔어.”
그의 뒤를 따라 사용인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두 사람이 식사할 만큼의 요리들을 하나씩 나르고 있었다. 로아는 자신의 지하실에 만찬이 차려지는 것을 어리둥절하게 지켜봤다.
“왜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고…….”
“오랜만에 로아와 함께 식사하고 싶어서.”
그는 늘 늦게 귀가했기 때문에 로아는 지하실에서 홀로 식사하는 것이 익숙해진 터였다. 그런데 그와 함께하는 식사라니. 게다가 조촐한 지하실에서 함께. 로아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의아스러움이 담긴 로아의 눈빛을 읽은 에이젠은 다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라도 먹는 모습을 내 눈으로 봐야겠거든.”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와 얼굴이었다. 로아는 얼른 그의 눈을 피해버렸다. 어색함이 맴도는 사이 두 사람이 사이에 저녁 식사가 모두 준비되었다.
“들지.”
에이젠이 먼저 식기를 들었다. 로아 역시 그가 식사를 시작한 것을 보고 식기를 들었다. 수저를 쥔 그녀의 손목에는 힘이 없었다. 에이젠은 그녀의 손끝부터 손목, 가느다란 팔, 음식물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눈으로 훑었다. 로아는 몇 번 음식을 먹지 못하고 식기를 금방 내려놓았다.
“왜? 다 먹었어?”
로아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 묻어있었다.
“먹는데 그렇게 쳐다보니까……, 음식이 잘 안 넘어가.”
에이젠은 피식 웃어버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저에게 닿자 얼른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미안. 식사에 집중이 안 될 정도로 네가 너무 예뻐서.”
에이젠 역시 쥐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맞은편에 앉은 로아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래도 식사는 마저 해야지. 내가 먹여줄까?”
“됐어.”
로아는 팔을 뻗어 다가오려는 에이젠을 밀어냈다. 에이젠은 하얗고 가녀린 그녀의 팔을 억세게 쥐어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무슨……!”
로아가 무어라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덮쳐왔다. 식사를 마치길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지하실 밖으로 나갔다.
“이러지……, 마.”
로아가 고개를 홱 돌려 퍼부으려는 키스를 피했다.
“왜?”
에이젠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돌아간 그녀의 고개를 따라갔다.
“날 사랑하잖아. 내가 이러는 거 싫지 않잖아.”
로아는 고개를 돌려도 쫓아오는 에이젠에 두 눈을 감아버렸다.
“……싫어.”
잠깐의 뜸을 들인 로아가 작게 대답했다. 에이젠은 헛웃음이 나왔다.
“싫다고?”
“……그래, 싫어.”
“거짓말.”
싫다는 로아의 말에도 그는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네 스스로 인지를 못 하는 모양인데, 넌 매번 싫다고 날 밀어낼 때마다 내 눈을 피해. 한참이나 늦게 대답하기도 하고.”
에이젠은 한쪽 손은 로아의 허리를, 다른 손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밀어내기 위해 그의 어깨에 올려두었던 그녀의 손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내가 만져줄 때마다, 네 반항이 점점 줄어들어.”
로아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로아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흐트러진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