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73)화 (73/107)

73. 옳지, 착하다

“평소엔 날카롭게 굴면서 이럴 땐 본능에 몸을 맡겨 버리더라.”

자신의 몸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에이젠을 밀어낼 수 없었다. 로아는 온몸에 힘을 풀었다.

“옳지, 착하다.”

에이젠은 반항이 줄어든 로아의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로아가 깜짝 놀라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발버둥 쳤다. 하지만 빛도 보지 못하고 운동도 하지 못한 하찮은 몸뚱어리가 기사 출신인 그의 힘이 이겨낼 방법은 없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몸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로아는 얼른 몸을 구석으로 가져갔다. 다가오려는 그를 향해 양팔을 휘저었다.

“그만, 그만해. 싫다니…….”

“내 눈 똑바로 봐.”

에이젠은 그녀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단단히 잡았다. 자신의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바로 정면을 보게 했다.

“어디 다시 한번 말해봐.”

“…….”

“싫다고 말해보라고.”

로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봤다. 그는 분에 겨워하고 있었지만 분명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아 숨 쉬는 에이젠 트로네. 내 남자.

로아는 그를 완전하게 밀어내기 위해 ‘싫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술이 열리면 다른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랑해.

그가 죽어가는 순간, 원 없이 하지 못해 후회했던 말. 로아는 입술을 꾹 다물어버렸다.

“흐윽, 나한테 왜 이래.”

눈물이 터졌다. 에이젠은 자신을 진심으로 밀어내지 못하는 로아를 보며 확신했다. 그녀에게도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넌 왜 이렇게까지 날 밀어내지.”

하지만 그 사정이 뭐가 됐든 결코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난 전부 당신을 위해서야.”

로아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에이젠은 파들거리는 로아의 손을 잡아 떨고 있는 손가락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나 또한 전부 당신을 위해서야.”

아무리 시간을 되돌렸어도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은 장면이 있었다. 참혹하게 죽어가던 당신의 모습. 온몸이 새빨간 피에 물들여 차디찬 바닥에 쓰러진 당신의 눈은 마지막까지 나를 좇았고, 당신의 입술은 마지막까지 내 이름을 불렀어.

식어가는 당신을 안아주지 못했고, 당신이 그렇게 된 건 전부 나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이번엔 살릴 거야.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전부 당신을 위한 거야.

***

에이젠은 일정이 없는 날도 마찬가지로 항상 같은 시간에 기상했다. 여유시간엔 개인적으로 체력단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리 늦은 시간 눈을 떴다.

황실 무도회 당일이 다가오자 긴장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로아가 허튼 생각으로 저에게서 도망치려 할까 봐. 일종의 감시였다. 사용인들을 주변에 잔뜩 세워놓고도 믿지 못해 이 사달이었다.

“주인님.”

침소 바깥에서 기다리던 리예드는 에이젠이 나오자마자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주치의 조나단이 주인님의 정기 검진을 위해 방문하는 날입니다.”

에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요즘 그의 신경은 온통 로아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자잘한 일정까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지하실에 계시는 레이디 클라리온도 함께 검진해보는 건 어떠실지요.”

리예드의 제안에 에이젠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지하실에 누군가 출입하는 것도, 로아를 바깥으로 올라올 기회를 주는 것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 식사를 잘 들지도 않으시고 한곳에 오래 머물고 계시니 별다른 증상은 없는지 검진을 받아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날카로워진 에이젠의 표정에도 리예드는 꿋꿋이 할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뜸을 들인 에이젠은 다시 발걸음을 뗐다.

“일단 나부터 검진받고 생각해보지.”

가볍게 샤워를 마친 그가 1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엔 이미 조나단이 검진 준비를 마쳐둔 상태였다.

평소에 워낙 체력단련을 잘 해두는 터라 검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질병의 증상도 없었고, 외적으로도 크게 이상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요즘 컨디션은 좀 괜찮으십니까?”

마지막으로 정신 건강 항목만 남겨둔 채였다.

“나쁘지는 않아.”

에이젠은 심드렁한 반응으로 임했다.

“특별히 달라진 증상이 있는 건 아니시고요?”

에이젠은 자신의 패턴을 떠올려보듯 잠시 사색에 잠겼다. 그러던 중에도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로아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젯밤에도 황실 무도회 당일 날 그녀가 도망가버릴까 두려워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런 상사병도 의학적으로 치료가 가능한 건가…….

잠시 샛길로 흘러간 의식의 흐름 중에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

“잠이 잘 안 와.”

“잠이요?”

생각지도 못한 증상이었다. 체력관리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불면증과는 거리가 먼 게 일반적이었다. 조나단은 알아볼 수 없는 의학용어를 써내려가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엔 피로한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 누우면 곧바로 잠이 들었단 말이지. 요즘은 이상하게 잠이 잘 안 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구도 바꿔보고 이 짓 저 짓을 다 해도 말이야.”

“각하께서 잡생각이 많으셔서 그러십니다. 걱정거리라도 있으신 모양이지요.”

조나단은 치료보다는 원인을 찾아내려 했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불면증은 원인을 없애면 금방 나아질 것처럼 보였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불면증이 생각보다 괴로워. 잠을 못 자면 다음 날 정무를 볼 때도 지장이 가니까.”

그러나 에이젠은 명확하게 원하는 게 있다는 눈으로 그를 설득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죠. 수면제를 조금 지어드려 볼까요?”

원했던 대답을 이끌어내고 나서야 그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언제까지 해줄 수 있나.”

***

에이젠의 검진을 마친 조나단은 지하실로 향했다. 사용인들이 왜 눅눅한 지하실로 안내하는지 어리둥절했던 그는 문이 열리고서야 경악했다.

일전에 에이젠의 침소에 고이 누워있던 로아가 마치 사육당하듯 저택 지하에 갇혀 있었다. 들어오는 입구와는 달리 매우 화려하게 꾸며진 방, 그리고 로아 역시 아름다운 자태였다.

“탈 나고 싶지 않으면 오늘 본 것은 함구하는 게 자네에게도 좋을 거야.”

조나단의 뒤를 따라 들어온 리예드가 그에게 속닥거렸다.

한편, 에이젠은 지하실 바로 입구에 감시하듯 떡하니 서 있었다. 로아가 조금이라도 큰 소리를 내면 곧장 달려갈 심산이었다. 열어놓은 문이 무색하게도 아래쪽에선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검진은 빠르게 지나갔던 반면 로아의 검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불안하게 그 앞을 돌아다니던 에이젠은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한 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로아 상태는 어때.”

지하실을 빠져나온 조나단이 문을 닫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에이젠은 그의 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기력이 많이 부족해서 영양제를 맞혀드렸습니다.”

조나단은 로아에게 맞혔던 약물과 처방한 약이 쓰인 기록물을 에이젠에게 건넸다. 에이젠은 자신의 진단서보다 로아의 것을 더 꼼꼼히 읽어보았다.

“레이디께서 지하실에만 계시다 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지셨습니다. 사람이 바깥 공기도 마시고 햇볕도 보고 그래야지요.”

조나단이 조심스레 충고했다. 에이젠은 로아가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는 조나단의 말이 거슬려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영악한 로아가 은밀하게 조나단에게 이런 말을 하라고 조종한 건 아닌지. 사실만을 얘기하고 있더라도 의심이 거둬지지 않았다.

“그런 건 약으로 해결이 안 되나.”

어떻게든 로아를 바깥으로 데려오지 않겠다는 의지가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에 투영됐다.

“뭐, 비타민 따위는 영양제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그럼 로아가 먹을 영양제도 좀 가져와.”

에이젠은 조나단이 슬며시 흘린 말도 놓치지 않았다.

“활기가 없어 보이니까 활력을 되찾을 만한 것도 있으면 가져오고.”

조나단은 진땀을 빼면서도 일단 에이젠이 하는 말을 받아적었다.

“일단 약방에 들러봐야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다시 방문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

조나단이 나간 후에도 에이젠은 하루 종일 지하실 문 앞을 지켰다. 마치 원래부터 그 앞에 있던 바위라도 된 것처럼 우직하게 한 자리를 지켰다.

해가 떨어지기 직전, 조나단이 다시 트로네 대공 저를 방문했다. 그가 올 것을 대비해 에이젠은 저녁 식사조차 미뤄둔 참이었다.

조나단을 주방으로 부른 에이젠은 그곳에서 약을 설명하라 시켰다. 조나단은 가져온 약들과 펜을 꺼냈다. 헷갈리지 않도록 약통에 이름과 주의사항을 새겨넣었다.

에이젠은 그중에서 ‘수면제’라 쓰인 통을 가장 먼저 집어 들었다.

“알약이네.”

내용물을 흔들어봤다. 안에 들어있는 약은 아주 소량이었다.

“네. 종류가 다 다릅니다. 크기가 제일 큰 놈이 효과가 오래가는 놈입니다. 오늘 밤에 잠드실 때는 작은 걸 드시고, 특별히 볼일이 없고 잠을 몰아서 자고 싶을 땐 알이 큰 걸 드시면 됩니다.”

에이젠이 들고 있는 건 크기가 가장 큰 약이었다. 그 옆에는 이보다 좀 더 작은 수면제가 든 약통도 있었다.

“이건 몇 시간이나 잠들 수 있지?”

에이젠은 제 손에 들린 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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