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동물적 직감
“강력한 거라 하루 종일도 잘 수 있습니다. 잠든 동안에는 웬만한 소음이나 자극에도 잘 깨어나지 않을 거고요. 그만큼 부작용도 있을 수 있어서 잘 지어드리는 약은 아닌데 각하처럼 과로가 필요한 특수 상황에는 간혹 처방해드리곤 합니다.”
조나단은 에이젠이 든 약통을 가져가 주의문구를 적은 스티커를 붙였다.
“효과가 아주 강력하니 너무 자주 드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딱 두 알만 드리는 겁니다. 한 번 드셔보시고 추가로 처방이 필요하면 저와 다시 상담하셔야 합니다.”
에이젠은 가장 강력한 효과를 가졌다는 수면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나단이 다른 약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도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뒤에 있던 리예드가 에이젠을 대신해 약 설명을 일일이 받아적었다.
할 일을 마친 조나단은 인사를 전한 후 저택을 빠져나갔다. 조나단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사용인들은 뒤늦은 만찬 준비를 시작했다.
“제인.”
한창 바쁘게 요리를 하고 있을 때 에이젠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에이젠은 그중에서도 로아의 식사를 만들고 있는 제인을 불렀다.
“네, 주인님.”
“요즘도 로아가 식사를 잘 거르나.”
제인은 면목이 없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억거렸다.
“네. 점심과 저녁은 거의 드시지 않습니다. 드셔도 한두 숟갈 정도만 드시고 금방 누워버리십니다.”
에이젠은 제인의 옆을 지나쳐 그녀가 만들고 있는 음식들을 내려다봤다. 양송이 수프, 바게트 빵, 스테이크와 샐러드. 평범한 메뉴들이었다.
그러나 식욕이 없는 로아에겐 이마저도 부담스러울 듯했다. 원체 움직이질 않고 에너지도 쓰지 않으니 그에 걸맞은 적당량의 식사가 제공되어야 했다.
“그래도 아침 식사는 곧잘 드십니다. 샐러드나 요거트 류 같은 간편식이 나가거든요. 그리고 오후엔 홍차도…….”
제인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로아가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게 다 저의 탓 같아 어떻게든 그녀가 음식을 먹긴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야 제 주인의 화가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럼 이건 다 치우고 샐러드랑 요거트만 준비해.”
에이젠은 로아의 식단을 바꾸었다. 제인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왜냐고 물어봤자 심기만 거스를 뿐이었으니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이거 받아.”
에이젠은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제인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손을 뻗었다. 수면제 한 알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곱게 빻아서 요거트에 섞어 넣어.”
제인은 손에 놓은 약을 보면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주치의에게 처방받은 약 중에 로아의 몫이라면 그냥 먹였어도 됐을 텐데 왜 식사에 몰래 섞으라는 것일까. 아마도 이건 로아의 몫인 약이 아닐 것이다. 제인은 정체 모를 약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제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준비 중이던 스테이크와 수프를 치우고 냉장고에서 요거트와 샐러드 재료를 찾았다. 새로운 음식을 꺼내오는 사이에도 에이젠은 주방을 나가지 않고 있었다.
“지금 넣어.”
에이젠은 제인을 믿지 못했다. 로아를 전담하면서 두 사람은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제인을 자르겠다고 했을 때 로아가 그녀를 감싸준 것만 봐도 그랬다. 아마 제인 역시 매섭기 그지없는 저보다는 로아를 더 위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제 눈으로 직접 볼 때까진 믿을 수 없었다.
제인은 하는 수없이 에이젠의 눈앞에서 약을 빻고 요거트에 섞어 넣었다. 에이젠은 그래도 믿지 못해 찬장에서 하나뿐인 사기를 꺼내왔다.
“이 그릇으로 가져가.”
이 그릇에 넣어 나올 때 다시 확인하겠다는 뜻이었다. 제인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젠은 주방을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리예드는 조나단이 가져온 약들을 알아보기 쉽게 정리해 약통에 넣어두었다. 에이젠은 그 설명을 뒤늦게라도 듣기 위해 리예드를 불렀다.
약을 쭉 둘러보던 에이젠은 이름이 쓰이지 않은 약통을 발견했다.
“이건 뭐라 그랬지.”
리예드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약을 바라봤다. 오늘 내내 약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약이 있었다.
“아마 레이디 클라리온께 드릴 영양제일 겁니다.”
조나단은 로아에게 먹일 영양제를 총 3종류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중에 두 개는 약 이름이 적혀 있었고, 하나만 비어있었다. 그러니 이것도 로아 몫인 영양제일 거라 생각했다.
“물 좀 가져와.”
“주인님께서 드셔보시려고요?”
그러나 에이젠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약에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내가 직접 검증해봐야지. 무턱대고 로아한테 먹일 순 없으니까.”
예민하게 신경을 세운 그의 촉은 오로지 로아만을 위한 것이었다.
리예드가 가져온 물에 영양제 하나를 꿀꺽 삼켰다. 치료용 약이 아닌 보조제이기에 별다른 증상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에이젠은 약통을 치우곤 다시 주방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식사보다 더 빠르게 준비가 완료된 로아의 간단식이 마침 나오던 참이었다. 제인이 지하실로 내려가는 걸 본 에이젠은 입구에 서서 그녀가 다시 올라오길 기다렸다.
잠시간 뒤, 제인은 빈 그릇과 함께 지하실에서 올라왔다. 식사를 잘 하지 않는 로아였지만 에이젠의 계획대로 간단히 준비된 요거트와 샐러드는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로아는.”
“아마 곧 잠드실 겁니다.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부터 졸려 보이셨어요.”
강력한 수면제라더니 효과가 직방인 모양이었다. 에이젠은 로아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열이 오르고 더워지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덥지.”
홧홧거리는 열에 땀까지 흘렀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리예드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저처럼 더워 보이지는 않았다.
“더우시면 정원에 산책이라도 나가 보시는 게 어떠실까요? 밤공기가 차가워서 금방 시원해지실 겁니다.”
“일단 지하실 좀 다녀와서.”
에이젠은 지하실 문을 열었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가는 몸이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졌다. 굳게 닫힌 문 앞에 섰을 때, 더욱 치솟은 열이 그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묵직해진 신체적 변화로 이 열기의 원인을 희미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동물적인 직감이 들었다. 지금 이 문을 열고 로아를 보면 안 될 것 같은 직감.
끼익.
그러나 에이젠은 문을 열었다. 그녀가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로아는 식사 직후인지 침대가 아닌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벽 쪽으로 고개가 툭 떨어져 있었다. 멀리서 봐도 잠들어 있는 모양새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예상대로 두 눈을 감은 채 고른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훅 풍겨져 오는 로아의 체취에 섞인 비누 냄새가 그의 전신을 자극했다.
쿵, 쿵, 쿵, 쿵.
발작이라도 난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의 로아가 오늘따라 다르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키고 싶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 같았다. 에이젠은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박동이었다.
가까이 다가서 체취를 맡은 것만으로 동물적 본능이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이 이상 로아에게 다가갔다간 그녀를 멋대로 망가뜨릴지도 몰랐다. 위험한 경고음이 들려왔다.
가빠지는 호흡을 집어삼켰다. 로아의 어깨와 다리 밑으로 두 손을 집어넣은 그는 단번에 그녀의 몸을 들어 안았다. 피부에 닿는 그녀의 몸은 그의 신경을 곧추세웠다. 한쪽으로 피가 몰리는 기이한 현상도 경험했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보아도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가까스로 로아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에이젠은 그러고도 한동안 누워있는 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군침이 넘어갔다. 금방이라도 이성의 끈을 찢어발기고 불순한 욕망을 멋대로 채우고 싶었다. 로아를 볼 때마다 기본적으로 생기는 욕구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강력한 거라 하루 종일도 잘 수 있습니다. 잠든 동안에는 웬만한 소음이나 자극에도 잘 깨어나지 않을 거고요.’
어떡할까. 강한 수면제에 취한 로아는 강력한 자극에도 일어나지 않을까.
그의 손끝이 로아의 머리칼로 향했다. 부드러워 보이는 금발에 코를 박고 마음껏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금니를 꽉 깨문 에이젠은 휙 돌아섰다.
아무리 잠든 사람일지라도 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 그것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여자이니까.
빠르게 지하실을 빠져나온 에이젠은 곧바로 계단으로 향했다. 주방에 있던 하녀들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뒤를 쫓았다.
“주인님, 차를 내려놓았는데 집무실로 좀 갖다드릴까요?”
“됐어.”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톤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하녀들은 가차 없이 계단을 오르는 에이젠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2층에서 내려오던 리예드는 올라오는 에이젠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상기된 그의 낯빛은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주인님? 어디 편찮으신 건가요?”
“아니. 방에서 한숨 자야겠어.”
걱정 어린 물음에도 에이젠은 퉁명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