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에이젠이 죽으면
침실 앞에선 그는 문을 열기 전 리예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방에서 나오기 전까지 누구도 들여보내지 마.”
쾅. 리예드에게 지시만 남긴 에이젠은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알겠습니다.”
리예드는 모습을 감춘 주인에게도 깍듯이 대답했다. 그는 어딘지 여유가 없어 보이는 주인이 걱정스러워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침실 문을 닫자마자 에이젠은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문에 기대어 몸을 지탱해보려 했으나 쭉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도 펄떡거리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그 강도가 너무 세서 아파 오기까지 했다.
“으윽, 하…….”
심장을 꽉 눌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전신에 퍼진 고열로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크흑, 하아…….”
고통이 섞인 거친 숨결은 문밖까지 흘러나갔다.
“주인님?”
문밖에서 리예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에이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
“으음…….”
찌뿌둥한 몸을 뒤척거렸다. 깊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러나 평소보다 더 오랜 잠을 자서인지 눈을 뜨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로아는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잠을 깨고서 주변을 둘러봤으나 지하실엔 혼자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은 있었으나 그제 얼마나 지났는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지금 몇 시지?”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났을 때, 마침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제인이었다.
“일어나셨어요?”
로아는 여전히 비몽사몽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응. 나 얼마나 잔 거야?”
“하루를 꼬박 주무셨어요.”
“……뭐?”
이렇게까지 긴 시간 잠든 적이 있었던가. 로아는 잠들기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위화감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잠들기 전에 저녁을 먹었던 것까지 기억나는데 그럼 지금 하루가 지난 저녁 시간이라고?”
“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 메뉴가 이상했다. 평소 저녁엔 고기류가 많이 나왔는데 어제는 아침에나 나올 법한 간단식이 나왔다. 로아는 식사를 잘 하지 않는 자신을 위해 메뉴를 바꾼 줄 알았다.
“왜 안 깨웠어?”
“주인님께서 깨우지 말라고 하셔서요.”
이렇게 깊은 잠을 잘 동안 깨우지 않았다는 건, 마치 에이젠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깊게 자게 된단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화가 난 로아는 이불 시트를 꽉 쥐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셈인지.
“에이젠을 불러줘.”
그와 좀 더 대화를 해봐야 했다. 그러나 에이젠을 불러 달라는 로아의 말에 제인은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주인님께서는 지금…….”
제인은 뒷말을 다 잇지 못했다. 기어들어 가는 그녀의 목소리에 로아는 척추 끝에서부터 불안한 기운이 타고 오르는 걸 느꼈다.
“어디 나갔어?”
“아뇨, 그게 아니라…….”
제인은 여전히 꾸물거렸다. 로아는 초조해진 얼굴로 제인을 재촉하듯 바라봤다.
“조금 편찮으십니다.”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로아의 얼굴은 금세 하얗게 질려갔다.
“어디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다급한 로아와 달리 제인은 여전히 대답하기 곤란한 듯 쭈뼛거렸다.
“의사는 불렀어? 어제 검진할 때까지만 해도 주치의가 아무 이상 없다고 그랬잖아.”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닐 거예요.”
제인은 자꾸만 로아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듯 말을 아꼈다. 그런 태도 때문인지 로아는 답답해 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로아는 어쩔 줄 몰라 제인의 발밑에 꿇어앉았다.
“어머, 아가씨!”
제인이 화들짝 놀라며 로아를 따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인, 제발 나한테도 말해줘.”
로아는 치밀어오르는 답답함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애타는 목소리와 덜덜거리는 두 손이 그녀의 초조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에이젠이 어떻게 되면 나 정말 돌아버릴지도 몰라.”
제인은 한없이 낮아진 로아의 태도에 의아함을 품었다. 뒤에서 지켜본 에이젠을 대하는 로아의 태도와 180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늘 에이젠에게 싫다는 말만 반복하며 이 집에서 도망치려 발버둥을 쳤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는 걸까. 어떻게 보면 지금이 가장 도망칠 타이밍을 노릴 때가 아닌가.
로아가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으리란 건 하녀인 제인도 알아챌 정도였다.
“어제 주치의 선생님이 가져다준 약 중에 잘못 가져온 게 있다고 해요.”
결국 제인은 간절해 보이는 로아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주인님께서 영양제인 줄 알고 드셨는데 그게 아니었대요. 그래서 부작용이 좀 있으신가 봐요.”
부작용이라니, 잘못되면 큰일 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놀란 로아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증상이 어떤데?”
“열이 많이 나는 거 같은데 예민해지셔서인지 사용인들을 전혀 들이지 않고 계세요. 다들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 정확한 증상까지는 파악되지 않았다고 해요.”
아무도 에이젠의 정확한 증상을 확인하지 못했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필이면 주치의 선생님이 다른 영지로 출장을 가셨다 해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리시나 봐요.”
거기다 주치의까지 자리를 비웠다. 에이젠은 도대체 뭐 때문에 아픈데도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걸까. 로아는 자신이 직접 그를 확인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다른 사용인들은 몰라도 자신이 직접 찾아간다면 그는 문을 열어주고 말 것이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로아는 휘청거렸다. 넘어질 뻔한 그녀를 제인이 겨우 붙잡아 부축했다.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서인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분의 기운이 너무 강해요. 남편이 펼쳐야 할 기운까지 전부 억누를 정도로 강합니다.’
그리고 귓가엔 또다시 잊고 지냈던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때문이야.”
울상이 된 로아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폭 가렸다.
“내가 에이젠의 곁에 있어서, 에이젠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로아는 어느새 그렁그렁해진 눈가를 닦아냈다.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에이젠을 만나게 해줘. 내가 직접 봐야겠어.”
로아의 당찬 요구에 제인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곤 마구 손사래를 쳤다.
“주인님께서 절대 안 된다고 하실 거예요.”
로아를 또 멋대로 풀어주었다간 이번에야말로 해고당할 것이다. 아니, 이번엔 해고가 아닌 그의 잔악한 손에 목이 썰릴지도 모른다. 로아의 일이라면 평소보다 더 미쳐 돌아가는 주인이었기에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렸다.
“제인, 제발…….”
그러나 울먹거리는 로아는 포기하지 않게 제인에게 매달렸다.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한 번만 내 편 들어줘.”
완강하게 손을 내젓는 제인의 두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에이젠이 죽으면, 그렇게 되면…….”
로아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떨려왔다. 제인은 갑자기 뒤바뀐 로아의 태도에 혼란스러워졌다.
에이젠의 앞에서 그렇게 차갑게 굴기만 했던 레이디. 그 곁을 벗어나고 싶어 탈출까지 시도했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로아는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나 더 이상 그때처럼 괴로워지고 싶지 않아.”
제인은 그녀가 말하는 ‘그때’가 과거의 언제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에이젠이 늘 로아에게 세뇌하듯 밀어 넣었던 말이 사실이었다는 거였다.
‘어차피 날 사랑하잖아. 그치, 로아?’
제인은 로아에게 잡혔던 두 손을 빼냈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아가씨께서도 주인님께 마음이 있으셨군요.”
로아의 등을 토닥거려주는 손이 자상했다. 제인의 위로에 로아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에이젠을 위해서,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로아는 어차피 말해봤자 제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답답했던 속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에이젠이 저렇게 이유 없이 앓는 건 다 나 때문이란 말이야.”
로아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툭툭, 투명한 액체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끅끅대는 그녀의 목소리엔 물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다 알 순 없었지만, 분명한 건 로아는 이곳에서 심적 고통을 깊게 느끼고 있었다. 그를 위해 그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꽤 모순적으로 들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불가능한 말도 아니었다.
“으음…….”
제인은 잠시 고민하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굳게 결심한 얼굴로 로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도와드리긴 할 건데 이번엔 절대 절대 도망가시면 안 돼요.”
도와준다는 말에 힘없이 눈물만 떨어뜨리던 로아가 휙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엉망이었으나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말? 정말이야?”
“네. 대신 꼭 여기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저랑 약속해요.”
제인이 로아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뻗었다. 로아는 놓칠세라 얼른 제인의 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응. 꼭 그럴게.”
방금까지 눈물을 툭툭 떨어뜨려 눈가가 아직 촉촉한데도 로아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고 있었다. 이렇게나 감정이 휙휙 바뀔 정도로 그녀에게 에이젠은 아주 커다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