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76)화 (76/107)

76. 한 번 하면 되는 거야?

시간이 좀 더 지나기를 기다렸다. 바깥에서 저택을 지키는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곤 사용인들도 침소에 들 시간이었다. 저택의 불이 완전히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지하실을 먼저 빠져나온 제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를 돌아 로아에게 올라와도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다.

고양이처럼 아주 살금살금 기척을 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여 걸었다. 계단을 다 오른 로아는 그 앞에 서서 제인을 기다렸다. 앞서 걷던 제인이 먼저 에이젠의 침실 앞에 멈춰 섰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단단해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잠금 장치를 걸어둔 모양이었다.

치마를 걷고 사뿐사뿐 걸어온 제인이 로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문이 잠겨있어요. 비상 열쇠를 가져올 테니 어디 가시면 안 돼요. 꼭 여기 계세요.”

“응.”

로아는 결의에 찬 눈으로 대답했다. 비상 열쇠 꾸러미를 가지러 가기 위해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제인은 불안한 마음에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몇 번이고 로아 쪽을 올려다봤다. 로아는 제인이 저를 잘 확인할 수 있도록 그녀가 시선을 돌릴 때마다 눈을 맞춰주었다.

로아는 제인이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그 앞에서 기다렸다. 돌아온 제인이 가만히 기다린 로아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컥.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열쇠를 넣어 돌렸으나 너무 적막한 복도엔 유난히도 크게 소리가 울렸다. 잠금 장치를 풀어내고도 누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 양옆을 수시로 확인했다. 열쇠를 빼낸 제인은 슬며시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제인, 고마워.”

로아가 문고리를 잡자 제인은 손을 떼어냈다. 로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제인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끼이익, 탁.

로아는 소음을 최소화한 채 방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라도 지나가던 사용인이 문고리를 당겨볼까 다시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흐윽, 하아…….”

로아가 신중하게 문을 닫는 사이 귓가엔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로아가 몸을 휙 돌리다가 둔탁한 발걸음 소리를 내버렸다.

“누구야.”

잠든 줄 알았던 에이젠은 깨어있었다. 다만 그는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에이젠은 문 쪽을 보지 않고 돌아누운 채로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가. 피 보기 싫으면.”

나가라는 에이젠의 단호한 명령에도 로아는 기죽지 않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앓고 있는 걸까. 그의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로아는 에이젠이 누워있던 침대 앞까지 다가섰다. 그녀가 다가오자 드리워진 그림자가 돌아누운 에이젠에게도 보였다. 그럼에도 에이젠은 돌아보지 않았다. 로아는 그런 에이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열이 펄펄 끓고 있는 건 아닌지. 얼굴을 만져보려던 찰나 탁, 하고 손목을 붙잡혔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에이젠은 제 방에 은밀하게 침입한 로아를 발견했다.

“에이젠…….”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에이젠은 더욱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도대체 어떤 자식이 널 풀어놓은 거야. 어떻게……, 으윽.”

말도 다 잇지 못한 에이젠은 상체를 고꾸라뜨렸다. 손목을 감싸 쥔 그의 손은 땀으로 흥건했고 델 것처럼 뜨거웠다. 예상했던 대로 고열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억지로 몸 일으키지 마. 누워 있어.”

로아는 에이젠을 다시 눕히려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쪽 손목도 그에게 붙잡혀버렸다.

“만지지 마.”

에이젠은 아주 예민한 상태였다.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한 건지 두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 있었고 조금만 스쳐도 죽일 듯이 으르렁거렸다.

“빨리 여기서 나가.”

이성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통증을 느끼고 있는 건가. 에이젠의 상태를 확인한 로아는 더욱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아프면서 왜 아무도 안 불러.”

밀어내는 에이젠에도 로아는 고집을 내려놓지 않았다. 아예 침대 위에 풀썩 앉아버린 그녀는 자꾸만 피하려는 에이젠의 눈을 마주하려 했다.

에이젠은 로아의 등장으로 정신이 더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야.”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온몸의 감각이 평소보다 몇십 배는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 울먹거리느라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 손안에 들어온 새하얗고 말랑한 피부까지. 금방이라도 이성이 툭 끊어질 것 같아 아슬아슬했다.

“후회하기 싫으면 당장 여기서 나가.”

고개를 푹 숙인 에이젠은 로아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경고했다.

“후회 안 해.”

짐승의 으르렁거림에도 로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에이젠의 앞으로 더 가까이 바짝 다가섰다.

“널 두고 갔다가 네가 잘못되면 그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후회할 거야.”

에이젠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맞다. 로아는 나를 사랑했지.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니까.

“미약을 먹었어.”

“……뭐?”

로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미약이라면, 갑자기 성욕을 일으킨다는 그 약? 어릴 적 책을 통해 본 적은 있지만 그 약이 실재한단 말인가. 로아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에이젠의 상태를 다시 흘겨봤다.

“온몸이 성욕에 휩싸여서 신경이 전부 마비된 기분이야. 당장 뭐라도 해서 이 욕구를 풀지 않으면 죽어버리기 직전이라고.”

에이젠은 로아의 손목을 잡은 채 제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타오르는 그의 눈은 미쳐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몇 시간째 굶주렸고 이것 때문에 잠도 안 와. 내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눈으로 보면 알 거 아냐.”

로아를 껴안은 에이젠은 그녀의 목덜미에 대고 말했다.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여린 살결 위로 퍼져나갔다.

“지금이라면 누가 들어와도 억지로 잡아 먹어버릴 것 같으니까 문을 걸어둔 거야.”

에이젠은 곧 끌어안았던 로아를 다시 밀어내 거리를 뒀다. 꽉 붙들었던 그녀의 손목도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내 이성이 남아있을 때 가.”

에이젠의 증상을 알게 된 로아는 그의 무시무시한 협박에도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굳게 다짐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거, 어떻게 해야 풀리는데?”

이번엔 로아가 에이젠의 손을 붙잡았다. 에이젠의 시선은 그녀의 손에서 손목으로, 팔목과 가슴,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얼굴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 로아는 다시 한번 해결책을 되물었다.

“한 번 하면 되는 거야?”

“…….”

직설적인 로아의 물음에 에이젠은 할 말을 잃었다. 손끝에 닿는 그녀의 피부에, 확신에 찬 푸른 눈동자에 전신은 점점 달아오르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그거면 다 괜찮아지는 거야?”

로아는 대답 없는 에이젠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당장에라도 새하얀 목덜미를 콱 물어버리고 싶을 만큼, 로아는 에이젠의 아슬아슬한 선을 이미 넘은 채였다.

그러나 에이젠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로아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이 이상 자극하지 말고 당장 나가.”

마음 같아선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이끌고 문밖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로아를 꽉 붙들었다간 저도 모르게 그녀를 침대로 덮쳐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싫어.”

로아는 완강한 눈으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일어나려는 에이젠을 다시 눕힌 로아는 과감하게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에이젠,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단단한 그의 배 위로 앉은 로아는 슈미즈 끝단을 슬쩍 들어 올렸다. 바로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본 에이젠은 불끈거리는 감각과 함께 통증까지 밀려들었다.

“로아, 로아.”

이를 악문 그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로아의 두 손을 저지했다.

“이러지 마. 지금도 참기 힘드니까.”

점점 변하는 그의 신체 부위가 아래에서부터 느껴졌다. 로아는 그에게 모든 걸 다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에이젠은 그럴 수 없었다.

“네 처음을 이런 식으로 갖고 싶지 않아.”

가장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여자니까.

약에 취해 짐승처럼 몰아붙이는 건 처음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약해서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손길로 대해주고 싶었다. 천천히 서로에게 맞추어가는 그런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이 통하기 전에 몸의 대화부터 나누고 싶지 않았다.

“처음 아니야.”

뜻밖의 로아의 말에 에이젠은 머릿속이 와장창 깨지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뭐?”

“아니, 그러니까…….”

“그럼 누가 네 처음인데.”

어떻게든 로아를 밀어내려던 그의 손아귀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아냐, 오해야. 처음이긴 한데 그게…….”

회귀하기 전, 로아는 에이젠과 결혼했었다. 두 사람은 이 저택을 신혼집으로 꾸미고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로아에게 에이젠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저의 모든 걸 내어준 세상에 하나뿐인 남편. 그러니 남편을 위해 제 몸을 내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시간을 보낸 에이젠에겐 그런 기억이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추억이 한 사람에게만 남아 있는 게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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