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더러운 욕망, 투명한 영혼
“꿈, 꿈에서.”
로아는 얼렁뚱땅 변명을 둘러댔다.
“에이젠이 나와서…….”
에이젠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이었다. 로아는 그런 에이젠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녀가 처음이 아니라는 건, 여태까지 잘 지켜오던 그의 이성의 끈을 툭 잘라버린 셈이었다.
순간 몸이 붕 떴다. 그러더니 온 세상이 빙글 돌았다. 에이젠의 몸 위에 앉아있던 로아는 어느새 침대 위에 풀썩 눕혀졌다.
전세가 역전됐다. 이번엔 에이젠이 로아의 위로 올라왔다.
“진심이야?”
그녀가 위에 있을 때보다 제 몸뚱이 아래에 있으니 더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욕망이 부풀어갔다.
“후회 안 할 거냐고.”
에이젠은 매서운 눈으로 물었다. 나도 날 통제할 수 없으니 도망가고 싶다면 지금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눈이었다. 그러나 로아는 흥분한 에이젠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응. 나 후회 안 해.”
손을 뻗어 후끈거리는 그의 뺨을 감쌌다.
“네가 이렇게 앓는 게 더 싫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었던 미소는 어느덧 씁쓸하게 변했다.
“빨리 널 편하게 해주고 싶어.”
로아의 두 눈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촉촉해진 눈가와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는 오히려 그에게 저를 안아달라 애원하는 것 같았다.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눈물 한 줄기가 툭 떨어졌다. 로아를 바라보던 에이젠은 제 뺨을 감싼 로아의 손목을 잡아 입가로 가져갔다.
“날 사랑해?”
가장 묻고 싶었던 말. 그리고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는 질문.
촉.
에이젠은 로아의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집요하게 로아의 푸른 눈을 좇고 있었다.
“시작하면 못 멈춰. 그러니까 지금 묻는 거야.”
로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에도 에이젠은 갑자기 변한 로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넌 착한 사람이니까. 날 사랑하지 않아도 옛정 때문에, 지금의 날 동정해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
팔꿈치를 시트에 댄 로아가 상체를 일으켰다. 로아를 내려다보던 에이젠과 얼굴 사이가 가까워졌다.
두근.
고통스럽게 지끈거리기만 하던 심장의 박동 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어떻게 동정심만 가지고 내 몸을 기꺼이 바칠 수 있겠어. 그렇게 가벼운 사람 아니야.”
어딘지 뾰로통해진 표정이었다. 약에 취해 통제가 어려워진 더러운 욕망이 무색하리만치 투명하고 깨끗한 영혼이었다.
얄궂게 입꼬리를 올린 에이젠은 로아의 이마에 제 이마를 툭 부딪쳤다.
“날 사랑한다는 뜻이야?”
직접적인 물음에 로아는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에이젠은 그녀의 턱을 잡아 다시 시선을 맞추었다.
“네 입으로 말해.”
과거의 시간 속에도 로아는 저를 사랑했다. 시간을 되돌아왔을 때도 그녀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유로 저를 밀어내고 있을 뿐, 그녀의 진짜 마음은 저를 사랑했다.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미치광이처럼 구는 자신처럼, 그녀도 아마 비슷한 깊이로 저를 사랑했을 것이다. 지독하게 구는 건 저와 똑같았으니까.
좀 비겁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저를 위해서 이 짐승의 소굴로 스스로 들어온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의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응.”
그리고 예상대로 로아는 제 마음을 인정했다.
“사랑해.”
다 알고 있었다. 분명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녀의 입으로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이 이리도 이질적으로 느껴진단 말인가.
여태까지 저를 밀어내던 로아에게선 그녀의 마음을 확신했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제 진심을 인정하는 로아에게는 의심이 들었다.
“사랑해, 에이젠.”
로아는 그런 에이젠을 안심시키려 몇 번이고 고백을 반복했다. 이번엔 로아가 에이젠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가져갔다.
쿵쿵거리는 그녀의 심장 위로 그의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박동이 그의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제발 날 이용해줘. 난 괜찮으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그의 허벅다리에 짓눌린 로아의 슈미즈 자락은 위로 말려 올라간 지 오래였다. 다 드러난 새하얀 허벅지가 외설스러웠다.
“흐읍.”
전조 같은 건 없었다. 에이젠은 단번에 로아의 입술을 집어삼키듯 물었다. 그의 손은 슈미즈 자락을 걷어내고 로아의 허벅지를 감싸 안았다. 틈 사이로 그 앞으로 바짝 자리를 잡았다.
“……파하.”
짧지만 짙은 키스가 끝나자 로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사이에도 에이젠의 손과 입술은 바쁘게 움직였다. 여린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가 자비 없이 그 위에 붉은 자국을 새겨넣기도 했다.
튕기며 움찔거리는 로아의 허리 밑으로 그의 팔이 들어갔다. 지퍼를 내리자 옷 속 헐렁해진 공간이 금세 무너져내렸다.
보드라운 살결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더욱 짙은 빛깔을 띠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씹어 삼키겠다는 의지로 가냘픈 몸을 탐닉했다.
전혀 친절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흡.”
로아는 고통 섞인 신음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를 이해했다. 그는 약의 효과 때문에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걸 알았을 것이다. 부드러이 대해주지 못할 걸 알았기에 몇 번이나 저를 밀어냈을 것이다.
그러니 다 괜찮았다. 그가 지금은 제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저를 위하는 그 마음만은 확실히 알게 됐으니.
오히려 좋았다. 그가 살아있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거칠지만 제 육신과 영혼까지 탐하는 그가 싫지 않았다.
“흐, 아…….”
그의 입술이 예민한 곳만 툭툭 건드렸다. 풍만한 굴곡 위를 미끄러지던 촉촉한 감각이 빚어낸 전율이었다. 여유를 잃은 그의 손은 동시에 깊숙한 틈을 유영하듯 파고들었다.
외설스러운 신음이 자꾸만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로아는 두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다. 자신이 내뱉은 높은 음성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로아의 손목을 잡아 끌어내렸다.
“소리 참지 마.”
두 손이 떨어지고도 로아는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었다. 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그러나 에이젠은 로아의 두 손을 꽉 결박한 채, 입술로는 여린 곳을 툭툭 건드렸다.
“하아아…….”
결국 참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살결을 핥던 에이젠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목덜미부터 둥근 어깨, 잘록한 허리, 하얀 허벅지까지. 순차적으로 탐험하듯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로아는 자꾸만 신음을 삼키려는 듯 참는 소리를 냈다. 에이젠은 손가락으로 로아의 턱을 눌러 입술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 안으로 뜨거운 살덩이를 집어넣어 맛보고 탐했다. 욕망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들어가는 사이 로아는 벌어진 입술 새로 신음을 흘렸다.
입안에는 원인 모를 달콤함이 가득했다. 에이젠은 그것을 전부 빨아들이고 핥아 올렸다. 그러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탐해도 탐해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참지 말고 날 더 자극시켜, 로아.”
에이젠은 야수 같은 몸짓 와중에도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만은 다정하게 굴었다.
“그래야 빨리 끝날 수 있어.”
물론 억지로 참으려 버둥거리는 모습도 충분히 자극적이긴 하지만. 혓바닥으로 제 아랫입술을 훑은 에이젠은 뒷말을 삼켰다.
“빨리 안 끝내도 돼.”
로아는 이번에도 예상하지 못한 답을 했다.
“원하는 대로 다 해.”
로아는 두 손바닥으로 에이젠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더니 스스로 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맞추었다. 잠시 사고회로가 정지된 듯 에이젠은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로아는 딱딱해진 그를 풀어주기 위해 고개를 비틀어 더욱 깊숙이 맞물리도록 했다.
그가 저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의 입술을 혀로 핥고 습해진 안쪽으로 달구어진 숨결을 불어넣기도 했다.
“사람을 아주 미쳐 돌게 만들어.”
그녀에게 마음대로 저를 다룰 수 있는 시간을 준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에이젠은 다시 로아를 제 아래로 눕혔다.
“로아.”
로아는 허공을 향해 허덕였다. 그리고 단단해진 감각에 거칠어진 숨을 다시 집어삼켰다. 그 위에 선 에이젠은 땀에 절어버린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사랑해.”
촉. 달콤한 사랑 고백과 함께 그의 입술이 로아의 발목에 내려앉았다.
“다 널 사랑해서 그런 거야.”
촉, 촉, 촉. 발목과 종아리를 지나 무릎까지 연달아 입을 맞추었다. 양손으로 허리를 잡아 꽉 끌어당기자 로아의 몸이 끌려가며 시트까지 딸려 갔다.
“응. 읏, 알아.”
예민함이 절정에 달한 곳까지 에이젠의 입술이 맞닿았다. 로아는 아득해지는 눈앞을 더는 견딜 수 없어 온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에이젠은 로아를 단단히 붙들고 크게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억눌렀다.
듣기 민망한 소리가 침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에이젠과 사랑을 나눈 적이 몇 번이나 있는데도 로아에게 이번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이었다.
곧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로아는 아쉬운 듯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그 기분을 허용하는 것도 길지 않았다.
에이젠은 지체하지 않고 로아와 하나가 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