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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78)화 (78/107)

78. 그만, 제발 그만

“하윽, 으으…….”

긴 머리칼이 힘없이 흔들리고 전신에 힘이 빠진 지는 오래였다. 그의 욕망이 드나드는 곳부터 시작한 전율은 혈관을 타고 흘러 손끝 발끝까지 짜릿하게 전해졌다.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시트에 고개를 박고 있던 로아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지하실과 같은 구조의 침실에 다른 게 있다면 창문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 짙은 어둠만이 가득한 새벽이었는데 벌써 어슴푸레한 빛이 슬슬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밤새도록 끝없이 분출하는 그의 욕망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격이었다.

“그만, 에이젠. 제발 그만해.”

원하는 대로 다 하라고 그를 도발했던 로아였다. 그러나 약의 부작용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허리는 부숴질 것 같고 온몸을 지탱하고 있는 두 팔에선 근육통이 지끈지끈 올라왔다.

여전히 자비 없는 몰아붙임에 몸이 다 망가져버릴 것 같았다.

“똑바로 잡아.”

자꾸만 상체를 쓰러뜨리는 로아에 냉철한 명령이 돌아왔다.

“못 해. 더는 못 한다고!”

로아는 어리광을 섞어 반항했다. 그러나 눈물 섞인 애원도 통하지 않았다. 에이젠은 오히려 엎드려 누워있던 로아의 어깨를 잡아 휙 돌렸다. 몇 시간이나 흘렀음에도 그는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는 뜨거운 눈을 하고 있었다.

“흐, 아흣.”

로아는 그의 눈을 마주 보지 않으려 했다. 시선이 맞물릴 때마다 그를 더욱 흥분시킬 뿐이었다.

그래서 두 팔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더욱 몸을 기울인 에이젠은 눈을 가린 로아의 팔 위로 촉, 촉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었다.

팔을 들고 있을 힘마저도 빠진 로아는 결국 두 팔까지 시트 위로 떨어뜨렸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에이젠과 눈을 맞추었다. 울먹거리는 푸른 눈동자와 아직도 열의에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에이젠은 괴로워하는 로아의 얼굴 위로 마구 입을 맞추었다. 이마, 눈가, 콧대, 뺨, 입술, 그리고 목덜미까지.

“예뻐.”

마지막으론 귓가로 입술을 가져가 애정 어린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예쁜 로아, 착한 로아.”

거친 몸짓에 비해 목소리는 녹아버릴 것처럼 한없이 살가웠다. 가끔씩은 귓가를 혀로 툭툭 건들거나 핥기도 하며 이미 늘어진 로아를 더욱이 자극시켰다.

“더 할 수 있잖아.”

“아냐, 못 해.”

이 행위가 더 이상 인간의 행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짐승이었다. 아니, 짐승도 이렇게 미쳐있진 않을 것이다.

어르고 달래는 에이젠에도 로아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더 이상 안 돼. 에이젠, 응?”

“로아.”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려앉을수록 몸짓은 거세졌다. 그 와중에도 로아는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아 시트를 다 찢을 듯이 꽉 쥐어뜯었다.

“사랑해.”

“으으으, 흐아아앙.”

“사랑해, 로아. 사랑해.”

울음이 터져도 소용없었다. 에이젠은 말 그대로 미쳐 있었다.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는 경주마처럼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까지도 전부 놓치지 않고 핥아 먹었다. 로아의 머리를 꽉 끌어안은 에이젠은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 숨 쉬어줘서 고마워. 내 옆에 있어 줘서.”

간절한 울림이 닿았다. 울음을 터뜨렸던 로아도 진심을 담은 이야기에 곧 격하게 차오른 감정이 추슬러졌다.

“다시는 잃지 않을 거야. 다시는.”

그렇게 만지고 싶었던 머릿결. 새하얀 피부에서 올라오는 특유의 다디단 내음. 작은 입술에서 내뱉는 옅은 숨결.

한 번 잃었던 것을 기적적으로 되찾았다는 건 더 이상 놓치지 말라는 신의 계시였다.

“내 예쁜 아가씨. 다시는 널 놓지 않을 거야.”

과거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온 만큼 소유욕은 배로 커져 갔다.

어쩐지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그의 욕망이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더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아흣, 아.”

“사랑스러운 로아. 사랑해.”

모든 걸 내려놓았다. 로아는 더 이상 에이젠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돌아온 이 시간이 귀하고 기적 같다는 건 그와 똑같이 느끼는 바였다.

“나도…….”

격렬해진 신음 사이로 겨우 말소리를 끼워 넣었다.

“나도 사랑해, 에이젠…….”

미쳐버린 건 로아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거절했으면서 결국은 취해버리고만 로아는 에이젠에게 모든 걸 빼앗겼다. 육신도, 정신도.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예쁜 인형이 되더라도 좋았다.

이제 더는 아무것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

반나절이 지나고서야 두 사람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잠이 들었다. 수면제로 24시간을 꼬박 자고 일어난 로아도, 약 때문에 24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던 에이젠도. 너 나 할 것 없이 시체 같은 잠을 청했다.

해가 뜬 것을 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덧 기울어진 해는 어둠을 몰고 왔다. 먼저 눈을 뜬 건 에이젠이었다.

“……로아.”

그는 눈을 채 다 뜨기도 전에 로아부터 찾았다. 옆에 그녀가 아직 있는 건지. 확인하려 손을 더듬었을 때 손끝에 걸리는 누군가의 몸에 기어이 눈을 떴다.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로아가 그의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으음…….”

에이젠의 뒤척거림에 받은 자극 때문인지 로아 역시 슬슬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미간을 찌푸린 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렸다.

“에이젠?”

눈을 뜨자마자 에이젠이 저를 보고 있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진정이 된 건지. 이제는 짐승처럼 달려들지 않았다.

“로아, 몸은…….”

“에이젠. 이제 좀 괜찮아졌어?”

두 사람은 자신의 안위보단 서로를 걱정했다. 아직 잠결에서 다 벗어나지도 못했으면서 로아는 손을 뻗어 에이젠의 얼굴을 만졌다.

“아직 조금 뜨거워. 미열이 남아 있나 봐.”

얼굴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간 로아는 이마를 맞대고 그의 열을 재보았다. 잠들기 전에는 워낙 고열이었던 지라 지금은 많이 나아진 형세였다.

“그래도 진정됐으니까 많이 괜찮아진 거겠지?”

몸을 다 가누기 힘든 와중에도 로아는 설핏 웃어 보였다.

아,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에이젠은 로아의 마음을 한 시도 의심한 적 없었다. 그런데도 제 진심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로아에 심장이 터지다 못해 찢어발겨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얼마나 행복하면서 괴로운 일일까. 내가, 그리고 내 사랑을 받을 그녀가. 이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까.

“아프지 마. 아프면 안 돼, 에이젠.”

이제야 안도한 로아가 두 팔로 에이젠을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을 스스로 파고들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있어 줘.”

에이젠 역시 로아의 표현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녀와 같은 표현을 하면 느낌이 조금 다를 듯했다.

오래오래, 죽지 말고, 내 곁에서, 영원히.

팔을 뻗은 에이젠이 로아의 허리를 휘감았다. 제 품으로 당기려 하자 로아는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아.”

고통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민망한 소리에 로아의 양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로아는 얼른 두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아봤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끈적한 관계를 나눈 사이인데 뭐가 부끄럽다고.

피식, 웃음을 흘린 에이젠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로아의 앞으로 다가섰다.

“아파?”

“으응, 조금.”

나지막한 물음에 로아는 에이젠의 가슴팍에 얼굴을 숨겼다. 삐져나온 귓가가 붉어진 것까진 채 감추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에이젠은 열이 화끈거리는 로아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흐응…….”

가벼운 스킨십에도 로아는 전신을 딱딱하게 굳혔다. 흐느적거리던 몸이 수면을 통해 체력을 회복했다. 짐승처럼 매섭게 몰아붙이던 관계를 몸이 기억하는 건지 온몸에 긴장이 올랐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의 머릿결과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약효도 내려앉았고, 이 이상 그녀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앓았던 건 약을 잘못 먹은 부주의 때문이지, 로아 너 때문이 아니야.”

자신의 곁에 있으면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를 것이다.

로아는 루베른 영지에서 들었던 이 점사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결혼 후 그의 죽음을 겪고 말았다.

짙은 죄책감은 스스로를 갉아 먹었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자신이 단명할지도 모른다는 바뀐 점사에도 확고한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이젠이 갑자기 앓는 것 또한 저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보란 듯이 건강하게 회복했다. 자신이 옆에 있었던 것과 그가 고열에 시달렸던 것에는 인과관계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의 실수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무거운 짐을 좀 내려놔.”

에이젠은 로아가 가장 걱정하는 것을 마음속에서 끄집어냈다. 그녀가 그를 밀어내는 가장 큰 이유. 그게 별거 아니었다고 증명되는 순간, 로아의 세계관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네 진짜 마음을 알게 된 건 기쁘지만.”

삐뚤어진 소유욕에 휩싸였던 에이젠은 다시 달콤한 미소로 로아를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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