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은밀한 합의
로아는 그의 따뜻한 위로에 홀려버린 것 같았다. 여태까지 그를 거절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것들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로아.”
에이젠은 흔들리는 로아의 눈동자만 보아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혼란을 겪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행동들이 맞았는지, 앞으로 변화를 주어도 괜찮은지.
불안해 보이는 로아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우리 이대로 있자.”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잡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손가락 끝부터 손등, 손목까지 입을 촉, 촉, 맞추었다. 팔을 점점 타고 올라온 그의 입술은 어느새 로아의 입술까지 다다랐다.
로아는 고개를 비틀어 다가오는 에이젠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린 채 그를 기다렸다. 서로를 옭아매듯 진한 입맞춤을 나눈 두 사람은 그보다 더 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결혼 안 해도 돼. 난 로아 네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언제든 볼 수 있는 지금이 좋아.”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 톤과 달리 그의 붉은 눈동자 역시 잘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다시 거절당하는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이었다.
아, 내가 이 남자한테 도대체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힌 것인가.
그동안 그에게 모질게 했던 제 말과 행동들이 떠오른 로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불안해서 널 어디로든 내보낼 수 없어.”
간절한 포옹이 이어졌다. 로아는 가녀린 몸을 감싸는 그의 온기가 좋았다. 나른해지는 기분에 눈이 절로 감겼다.
에이젠의 말대로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로아는 다시 한번 포춘텔러가 했던 점사들을 떠올려봤다.
‘본래 부부란, 이 기운이 서로에게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자분의 기운이 너무 강해요. 남편이 펼쳐야 할 기운까지 전부 억누를 정도로 강합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결혼하면 남편 될 사람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이 결혼을 원인으로 죽음에까지 이를 운명으로 보입니다.’
처음 그녀에게 들었던 점사에서 가장 포인트가 되는 전제 조건은 ‘결혼’이었다.
‘당신은 혼자서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운명입니다.’
‘안타깝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없다면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단명할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에 넘치도록 당신을 사랑해줄 그런 남자, 당신과 멀지 않은 곳에 있잖아요?’
그리고 시간을 되돌려 뒤바뀐 점사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해주는 남자가 옆에 있어준다면 자신도 단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까 에이젠의 요구는 꽤 합리적이었다.
부부의 연을 맺지 않은 채 함께 있는다는 것. 그걸로 두 사람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결혼’이 아닌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부정적인 효과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소한 단어 하나에서도 희망을 찾고 싶을 만큼 간절했다.
“……그럴까.”
그렇게 된다면 포기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결혼하지 않고 그의 옆에 있으려면 지금처럼 지하실에 숨어 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녀의 가족들이 행방을 알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질 테니까. 무엇보다도, 유다르를 비롯한 황실 관계자들이 알면 안 됐다.
그의 저택에 숨어 살아야 하는 인생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로아는 괜찮은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건 많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에이젠뿐이었다.
“나도 지금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
두 사람이 첫 동침을 한 이후.
로아는 에이젠의 허락이 있는 날엔 사용인의 동행하에 지하실에서 올라올 수 있게 됐다. 그래봤자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에이젠의 침실뿐이었다.
새벽이 깊어질 때까지 침실에선 야릇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관계를 마치고 나온 로아는 자발적으로 지하실을 향했다. 도중에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에이젠은 굳이 밖으로 나와 로아가 어디로 가는지 감시하지 않았다.
트로네 대공 저엔 믿을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에이젠은 이유 없이 살기를 뿜으며 사용인들을 긴장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두 사람만의 은밀한 합의는 주변인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이 되어 돌아왔다.
“아가씨.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달라진 건 에이젠뿐만 아니라 로아도 마찬가지였다. 식사를 완강하게 거부하기만 하던 로아는 꼬박꼬박 식탁 앞으로 와 앉았다.
“주인님께서 식사를 같이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제인은 주인의 요청을 로아에게 전했다. 그러자 로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 허락이 필요한 건가?”
가끔 그가 직접 지하로 내려와 로아와 겸상할 때가 있었다. 본인이 오고 싶으면 오고 아니면 말았던 그가 이번엔 신사답게 레이디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오라고 해.”
로아의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에이젠이 지하실로 내려왔다.
“로아.”
문을 열자마자 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좋은 저녁이야. 해가 떨어지고 공기가 선선해진 게 밤 산책하기 딱 적당한 날씨더라고.”
“나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네.”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가 벌써 얼마나 지난 건지. 이 저택에 갇힌 후 첫 탈출을 시도했던 그 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외부의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탓에 로아는 그다지 섭섭한 기분도 느끼지 않았다. 외출했을 때 기분이 전환되는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랑 같이 식사하면 밖으로 데려가 줄게.”
예상치 못한 제안에 로아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의욕 따윈 이제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밖에 나가게 해주겠다는 그의 말에 별안간 심장이 다 뛰기 시작했다.
“맛있게 먹을 거지?”
“응.”
준비된 식탁 앞으로 저녁 메뉴들이 하나씩 들어왔다. 오늘따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 식욕을 자극했다.
에이젠의 제안 때문인지, 로아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입맛에 잘 맞아?”
“응. 맛있어.”
에이젠은 그런 로아를 바라볼 뿐, 그의 식기는 그다지 활발히 움직이지 않았다.
“배불러.”
그러나 로아는 금방 식기를 내려놓았다. 어찌나 음식이 많은지 몇 입 먹지 않았는데도 금방 포만감이 차올랐다.
“더 먹어야지.”
“양이 너무 많아.”
“평소 네가 먹는 양을 생각해서 적당히만 준비한 거야.”
로아는 불룩 튀어나온 배를 만지작거릴 뿐 더는 식기를 들지 않았다. 에이젠은 뾰로통해진 로아의 표정에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릇에 있는 거라도 다 먹어. 그렇지 않으면 밖에 안 나갈 거니까.”
고기 몇 점 남지 않은 그릇을 내려다봤다. 그제야 로아는 다시 포크를 집어 들었다. 워낙에 소식을 했던 터라 적당량을 먹는 것도 그녀에겐 포식이나 다름없었다.
남은 고기를 다 먹고서야 로아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에이젠은 싹 비워진 로아의 그릇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젠은 테이블 옆을 지나 로아의 앞으로 갔다. 상체를 기울이더니 로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주변에 서 있던 하녀들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읍, 흣.”
두 사람은 입술이 짓이길 정도로 맞대고 있었다. 곧 입술을 먼저 떼어낸 에이젠은 두 손으로 로아의 뺨을 감싸곤 다정히 말했다.
“올라가 있을 테니까 준비하고 나와. 기다릴게.”
마지막 말과 함께 에이젠은 먼저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하녀들이 상을 치우는 와중에도 로아는 그가 손을 떼었던 그대로 굳었다.
“하아, 하아…….”
아직도 갑자기 들이닥쳐 진하게 남은 그의 향기에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에이젠이 나간 후 그녀의 외출 준비를 돕기 위해 하녀들이 들어왔다. 이 저택에 들어오고 지하실에서 생활하게 된 후로 처음이었다.
성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잠시 밤 산책을 하러 나가는 것뿐인데도, 하녀들은 최선을 다해 로아를 꾸며주었다.
에이젠이 로아와 시간을 보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수록 그의 성격이나 사용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유해지곤 했다.
준비가 길어진 탓에 로아는 거울로 제 모습을 다 확인도 하지 못하고 계단을 올라야 했다. 사용인들의 안내를 따라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감쌌다. 텁텁한 지하의 공기에 익숙해진 줄 알았건만, 신선한 윗공기는 차원이 달랐다. 로아를 기다리고 있던 에이젠은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로아는 뒤늦게 제 옷차림을 둘러봤다. 간단한 산책을 할 뿐인데 너무 오버한 건 아닌가 싶었다.
“로아.”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잡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촉, 부드러운 입맞춤이 맞닿고서야 로아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 정말 아름다워.”
시간이 되돌아온 듯한 착각이 일었다.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가 처음 기사를 서임받고 청혼을 하기 위해 클라리온 가에 들렀던 그 날로 돌아온 것 같았다.
에이젠은 그때처럼 다정한 얼굴로 로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공기가 차진 않지?”
“응. 괜찮아.”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간은 그때인 것 같았는데, 공간은 클라리온 백작 저가 아닌 트로네 대공 저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소소한 이야기로 공감을 쌓고 위로를 해주던 그 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성장해 남녀로서 서로를 대하게 되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여기고 이대로 지내도 괜찮은 걸까.
사라져버린 시간을 없애고 온전히 지금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