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80)화 (80/107)

80. 신이 내린 기회

이른 아침. 서신 한 통을 받은 집사 리예드가 에이젠의 서재로 들어섰다.

“주인님, 황궁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자신의 집무에만 집중하던 에이젠은 황실로부터 온 서신 내용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마저 하던 것을 내려놓은 후에야 그의 시선이 리예드에게 닿았다. 잠자코 에이젠을 기다린 리예드는 그제야 서신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클라리온 백작 영애가 실종된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협조를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느른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고개를 젖혔다.

“협조? 무슨 협조.”

허공을 향한 한숨에는 헛웃음도 섞여 있었다.

“아가씨가 집을 나서기 전, 트로네 대공 가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외출한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클라리온 백작 가 사용인들이 진술했다고 합니다.”

황태자 유다르가 자신의 정혼자를 찾기 위해 개최한 황실 무도회가 바로 며칠 전이었다. 백작 계급 이상의 미혼 영애라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에이젠은 로아를 자신의 저택 지하실에 가둬두어, 로아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황실의 명을 거부한 클라리온 백작 가는 법을 어긴 것이니 당연히 조사가 들어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게 되었으니, 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래서 저택을 조사하러 오겠다는 통보 서신이었습니다.”

에이젠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아직 그의 입가에는 여유가 남아 있었다.

“지금 제인 어디 있지? 바쁜가.”

“불러드릴까요?”

에이젠이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예드가 잠시 서재 밖으로 나가고, 곧 하녀 제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님, 실례하겠습니다.”

의자를 정면으로 돌려 당겨 앉은 에이젠은 제인을 똑바로 마주 봤다.

“얘기는 들었나.”

“네. 리예드 집사님께 들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셔야 할까.”

에이젠은 제인에게 해결책을 강구했다. 제인은 멀뚱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입구에 공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바닥에 바퀴가 달려 있으니 수색이 들어온다면 금방 들통날지도 모릅니다.”

제인의 제안에 에이젠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려고.”

“지금 수납장을 치우고 새로 개조한 수납장을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감쪽같이…….”

급작스러운 질문인지라 당장 번뜩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찬장 뒤쪽에 문을 만든다든지……, 그런 식으로 개조된 찬장으로 바꾸어 절대 찾아내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그녀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에이젠의 건조한 시선은 제인에게서 탁상달력으로 옮겨졌다.

“언제 방문할지는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는데 언제까지 할 수 있나.”

제인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았다. 황실수사단이 불시에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이니 개조를 할 거면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해결하라는 압박이었다.

“설계도는 대략적으로 오늘 안에 마무리하고 내일쯤 성내에 나가서 의뢰서를 넣고 오겠습니다.”

제인의 대답에 에이젠은 흡족한 듯 양쪽 입꼬리를 모두 말아 올렸다.

“그래. 책임지고 잘 감춰봐.”

다시 의자를 돌려 창밖을 향해 앉은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인은 에이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서재 밖으로 나가자 서재에는 고요함만이 가득 찼다. 에이젠은 창밖에서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녹음이 우거진 자연풍경식 정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예쁜 정원을 또 함께 거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날이 올까. 그녀가 떳떳하게 제 옆에 있어 줄 여자라고 세상에 알리게 될 일이.

아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집요하게 로아를 쫓는 황태자 유다르가 살아 숨 쉬는 동안은.

***

단잠에 빠져있던 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침을 맞이했다. 위쪽에서 들려오는 쿵쿵거리는 원인 모를 소음 때문이었다.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켜 앉은 로아는 기지개를 쭉 켰다.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햇빛이 들 틈도 없이 꽉 막힌 지하실에서 낮과 밤을 구별하기는 어려웠다. 하녀인 제인이 매 끼니를 챙겨야 할 시간마다 지하실로 내려왔는데, 그것이 유일하게 바깥의 시간을 짐작하는 방법이었다.

아침 식사를 가지고 온 제인은 간이 식탁을 펼쳤다.

“제인.”

테이블을 세팅하던 그녀의 손길이 멈칫했다.

“요즘 들어 밖이 더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 있어?”

제인은 로아에게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일 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자신이 알면 안 되는 기밀 사항인 모양이었다. 로아는 제인을 보채지 않았다. 음식으로 고개를 돌린 로아가 깨작거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제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욕이 없어 보이는 로아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그녀의 팔다리가 점점 가느다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그녀는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저, 아가씨.”

제인의 부름에 로아는 들고 있던 식기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제인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켜냈다. 로아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온 그녀는 비장한 얼굴이었다.

“제가 정말 목숨 걸고 아가씨께 알려드리는 거예요.”

문을 닫아놓으면 아주 작은 소리도 지상까지 잘 닿지 않는 지하실이었다. 그럼에도 제인은 목소리를 아주 작게 줄였다.

“황실에서 아가씨가 실종된 걸 조사하는 중이래요. 클라리온 백작 가 고용인들이 아가씨가 트로네 대공 가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는 진술을 했고, 황실에서 직접 조사단을 파견할 예정이라고 해요.”

제인의 이야기를 가만 듣던 로아의 두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인 클라리온 백작은 자신만의 힘으로 이곳에 갇힌 로아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황실에서 조사에 무게를 싣는다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주인님께서 이 비밀 지하실의 입구를 감출 특수 수납장을 만들라고 시키셨어요. 황실조사단이 저택을 수사하러 와도, 아가씨가 있다는 것을 결코 들키지 않기 위해서요.”

제인은 이 소식을 로아가 알게 되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러나 로아는 오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앙다문 채 초조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제인이 로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상체를 숙인 제인이 아예 로아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아가씨, 제가 그날 수납장을 옆으로 살짝 비틀어둘까요?”

“뭐?”

로아는 위험천만한 제인의 발상에 어깨를 들썩거릴 정도로 놀랐다. 몸을 뒤로 빼낸 로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인을 나무랐다.

“그랬다간 제인이 더 위험해질지도 몰라.”

“제가 열어둔 게 아니라 조사단이 꼼꼼히 조사하던 중에 발견한 정도로 아실 거예요.”

조사단 사람들이 마구 저택에 들이닥쳐 이곳저곳을 뒤지다 보면, 사소한 변화는 누가 그랬는지 찾아내기 힘들 테니까.

로아는 그래도 불안한 동공을 거둘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분들에게 생사 정도는 알려야지요.”

누구보다 로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온 제인이었다. 그녀가 이 갑갑한 지하실에서 얼마나 괴로워했고, 숨 막혀 했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인은 로아를 반드시 돕고 싶었다.

물론 사용인의 입장에서 로아가 이곳에 남아 에이젠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로아의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었다.

제인은 가까이 지냈던 로아에게 자유를 찾아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여겼다.

“신께서 내려준 기회예요. 그날, 꼭 성공하세요.”

로아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제인을 내려다봤다.

“제인.”

묘하게 씁쓸한 미소가 로아의 입꼬리에 들어앉았다. 제인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역시 됐어. 그런 짓 하지 마.”

로아의 만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제인은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아가씨…….”

제인은 어버버거리다가 겨우 뒷말을 꺼내려 했다. 로아는 그런 제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켜줬다.

“난 괜찮아. 여기가 좋아.”

심지어 이곳이 좋다고까지 말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건 에이젠을 회유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진심이었단 말인가?

제인은 로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지하실이지만 에이젠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소중해.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게 될 거야.”

에이젠과 로아의 관계를 지켜본 제인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누가 봐도 그릇된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에이젠은 늘 로아에게 사랑을 갈구했고, 로아는 그런 에이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피하기 급급했다. 그랬던 로아가 이곳에 있는 게 좋다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주인님을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면, 정식으로 결혼을 올리고 트로네 대공 가의 부인이 되시면 되잖아요. 주인님도 그걸 원해서 아가씨를 이곳에 데려오셨을 텐데…….”

제인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질까 뒷말을 생략해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참견을 해버렸네요.”

“아니야.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제인.”

오히려 로아가 제인을 위로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체념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이 모든 건, 다 에이젠을 위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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