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불시 검문
심란한 마음 때문인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지하실로 내려온 제인은 저녁을 차려오기 전 식탁을 펼치고 식기류를 깔아놓았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던 로아는 제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인.”
“네?”
“나 오늘 별로 입맛이 없는데 안 먹으면 안 돼?”
오늘따라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파악하지 못했는데 식사를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입맛이 없었고, 음식을 떠올리기만 해도 거부감이 들었다.
“주인님이 아시면 싫어하실 텐데요.”
제인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로아를 바라봤다.
“뭔지 모르겠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불편해. 지금 억지로 먹으면 탈이 날 것 같아.”
로아는 공허한 배를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배고프지 않았다.
“주치의를 부를까요?”
“아니. 진료받을 정도로 아픈 건 또 아닌데…….”
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료가 필요할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다. 컨디션이 조금 나쁜 것 같은데 겨우 이 정도로 소란피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안 먹고 쉬고 싶어.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거 같아.”
로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제인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제인은 아리송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으음…….”
로아의 상태를 살피던 제인은 시선을 거두었다. 아픈 것도 알리지 않고 식사도 안 했다고 보고하면 에이젠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가장 두려웠다.
“내가 식사 거르면 제인이 곤란해지나? 혼나고 그래?”
로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섣부른 행동 때문에 제인에게 피해를 입힐 뻔한 적이 있던지라 이번에도 그렇게 추측했다.
“드시든 안 드시든 차려놓기는 해야 할 거예요. 조금만이라도 가져와볼 테니 식사해보시고 못 드시겠으면 남기시는 게 어떠세요?”
제인의 제안에 로아는 아랫입술을 말아 넣었다. 음식을 마주한다는 생각만으로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곤란해 보이는 제인을 위해서라도 먹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알겠어.”
로아의 허가가 떨어지자 제인은 식사를 가지러 올라갔다. 로아는 제인이 내려올 계단 쪽을 보며 초조하게 발끝을 떨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 내려오는 기척이 들렸다.
신경이 예민해진 로아는 서서히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제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든 트레이 위에는 각종 음식이 있었다. 로아는 그 음식의 정체를 확인할 새도 없었다.
“……아, 윽!”
그게 무엇이든 이 순간만은 혐오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정체 모를 불쾌감이 목구멍을 탁 때리는 것 같았다.
“싫어. 저리 치워!”
로아는 제인을 향해 소리치곤 화장실로 달려갔다.
“윽, 우욱…….”
먹은 것도 없는 속을 게워내려는 듯 헛구역질해댔다. 화들짝 놀란 제인이 음식을 내려놓고 로아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제인의 몸에 배어버린 음식 냄새 때문에 로아는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냄새나는 것부터 치워줘, 제발.”
그 와중에도 최대한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러곤 로아는 다시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제인은 로아의 말대로 얼른 나와 음식을 가지고 올라갔다.
“하아, 하아…….”
로아는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진정이 됐으나 다시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지하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에 들어와버린 냄새는 쉬이 빠지지 않았다.
제인은 음식을 치우고 냄새가 밴 옷까지 갈아입고 돌아왔다.
“속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역시 주치의를 불러야겠어요.”
“아니, 아니야.”
로아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제인은 이렇게까지 제 몸을 방치하는 로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아가씨께서 식사를 거르신 걸 알면 주인님이 확인하러 내려오실 거예요.”
로아 역시 제인의 말에 동의해 별다른 할 말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인은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셨다. 수건의 물기를 꽉 짜낸 그녀는 로아의 앞에 앉았다. 로아의 머리칼을 밀어내고 말라버린 땀 자국을 닦아냈다.
“왜 고집부리시는 거예요?”
어르고 달래는 제인에 로아는 드디어 입술을 달싹거렸다.
“에이젠한테 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은 같은 경험을 했고, 아마도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로아는 그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자신이 죽어갔던 그때의 시간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이젠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게 됐다. 서로를 향해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내가 에이젠이 아프면 싫은 것처럼, 에이젠도 똑같을 거야.”
로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제인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일도 아프면 제인한테 꼭 말할게. 금방 괜찮아질 거야.”
“꼭이에요.”
당부를 받아내고서야 제인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로아는 한동안 음식 냄새가 빠질 때까지 화장실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
깊은 밤, 성의 주인 에이젠이 정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평소보다 늦은 귀가였다. 사용인들이 한데 모여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로아는.”
에이젠은 여전히 귀가하자마자 로아의 안부부터 물었다. 제인은 사용인들의 틈을 비집고 에이젠의 앞에 섰다.
“이제 막 잠드신 참입니다.”
제인은 오늘 로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식사를 걸렀다는 사실을 굳이 보고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먼저 물을 거라 생각했다.
“주인님.”
그러나 갑자기 끼어든 리예드에 에이젠의 시선은 그쪽으로 돌아갔다.
“황실수사단에서 오늘 저녁에 급히 출발해 내일 아침엔 저택에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뭐?”
리예드는 낮에 도착했던 서신을 에이젠에게 내밀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황실은 일부러 일정을 미리 공개하지 않고 오늘 도착하게끔 계산해 서신을 보냈다.
“통보했던 일정보다 훨씬 빠르잖아.”
에이젠은 서신을 보며 미간을 확 구겼다.
리예드는 그런 에이젠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용의자 신분이니 불시 검문하려는 모양입니다.”
‘협조’라는 말로 좋게 포장했지만 사실은 의심을 받은 셈이었다. 정황이 그랬고,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에이젠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리예드. 얘기 좀 하게 잠시 따라와.”
“네.”
에이젠은 리예드를 데리고 집무실 쪽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대비해 계획을 세울 모양이었다. 사용인들의 입단속부터 로아를 철저히 숨기는 것까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에이젠이 들어가자 사용인들은 다시 제 할 일을 하기 위해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인을 비롯한 하녀들은 주방으로 돌아와 식기 정리를 마저 했다.
“아가씨 식사 안 한 거 말씀드렸어?”
하녀 한 명이 제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아뇨. 황실수사단 방문 건 때문에 주인님이 정신없어 보이셔서 생략했어요.”
제인의 대답에 하녀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잘했어. 이럴 때라도 넘어가야지.”
설거지를 마친 하녀들은 식기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그중에 제인은 근심 어린 얼굴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내일 바로 들이닥친다니……. 그럼 수색하는 동안 아가씨는 저기 계시는 거 아니에요? 밥도 못 먹고?”
“그렇게 오래 걸리겠어? 금방 끝나겠지.”
제인은 로아를 걱정했으나 다른 사용인들은 안일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동조해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인지 뾰로통해진 제인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가씨가 불쌍해요.”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하녀들은 제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저 아가씨가 있으니까 주인님도 예전보다 얌전해지셨잖아.”
지극히 사용인들의 입장으로만 생각해본다면 로아는 꽤나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였다. 물론 갇혀 있는 여자는 불쌍하지만, 그녀가 있음으로써 에이젠이 폭주하는 횟수도, 날카롭게 굴던 것도 많이 줄었다.
갑자기 로아가 사라지고 남을 에이젠을 떠올리면 전보다 더하면 더했을 살얼음이 될 게 뻔했다.
“아가씨가 황실수사단에 발각되면 주인님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으음…….”
제인의 물음에 하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그 뒤 상황까지 그려본 적 없었다.
“그래도 요즘은 아가씨도 주인님께 마음을 많이 연 것 같던데 강제 감금이 아니었다고 진술하면 풀려나지 않을까요?”
“아가씨가 과연 그럴까요? 벗어나고 싶어서 주인님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연기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그 말도 일리는 있어.”
사용인들은 자유롭게 상상해보았다.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혹은 생각보다 그리 최악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일 붙잡힌다 하더라도 주인님께서 제국에 세운 공이 있으니 면죄부가 적용될지도 몰라.”
로아는 몰라도 에이젠은 저택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길게 봤을 땐 그가 애지중지하는 여자 로아를 빼앗기는 건 사용인들에게도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대화가 끊기고 주방에는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고개를 푹 숙인 제인은 혼잣말을 하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언제까지 주인님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릇이 부딪치는 소음 속, 제인의 중얼거림이 희미하게 들렸다.
“응? 뭐라고?”
“아니에요.”
되물음에도 제인은 웃음을 지어 보일 뿐,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