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신체의 변화
황실수사단이 대공 저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에이젠은 다시 한번 지하실 입구를 막아놓은 수납장을 확인했다. 바로 옆에 비슷한 디자인의 수납장이 빼곡히 자리한 터라 그다지 수상해 보이지 않았다.
“황실수사단입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젠은 저택을 수사하는 동안은 저택에서 나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들이 어디를 어떻게 수색하는지 직접 눈으로 보면 자신 역시 표정을 숨길 수 없을 듯했다. 에이젠은 저택 밖으로 나와 정원에서 수색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모든 창문과 테라스 문을 열어둔 제 저택을 초조하게 훑었다.
“단장님, 이곳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절대 티가 나지 않았어야 할 수납장은 생각보다 금방 발각됐다. 단원들이 지하실로 내려가고 단장은 테라스에 앉아있는 에이젠에게로 다가왔다.
“어째서 저택 도면에 없는 지하실이 있는 겁니까?”
“…….”
“왜 이 지하실의 존재를 숨긴 것이죠?”
에이젠은 단장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하실 수색을 마친 단원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단장님. 지하실에서 레이디 클라리온을 찾았습니다.”
“뭐?”
단장이 의심을 가득 품은 눈으로 에이젠을 훑었다.
“트로네 공. 이게 대체…….”
그는 해탈한 듯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단장이 곧장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냈다. 에이젠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양쪽 손목에 수갑이 찰칵, 하고 채워졌다.
“당신을 불법 납치 및 감금 그리고 위증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좀 더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황실을 상대로 위증을 한 것은 황실 반역 도모죄까지 성립할 수 있습니다.”
에이젠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장의 뒤를 따라가려는데 저택 안쪽에서 귀를 찌르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금방 알아챈 에이젠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거 놓으세요!”
“진정하십시오. 저희는 황실수사단입니다. 레이디를 구출하러 온…….”
“싫어요! 전 나가기 싫다고요!”
로아가 지하실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구하러 온 황실수사단의 손길에 격렬히 반항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에이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넌 날 사랑하고 있었어.
“에이젠, 에이젠!”
로아가 애타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각자의 수사단원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저택 수사는 끝났습니다. 사용인들은 참고인으로서 목격 진술을 해야 하니 남아주시길 바랍니다.”
에이젠은 연행되기 직전 누군가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물체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서 그녀의 얼굴로 올라갔다.
“……너였구나.”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에이젠의 붉은 눈동자엔 살기가 가득 머금어져 있었다.
가해자인 에이젠은 수사단 본부로 연행되고, 피해자인 로아는 황태자의 명으로 황궁으로 인수되었다.
***
정신을 차린 로아는 눈을 뜨자마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남자와 마주했다.
황태자 유다르. 로아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앞이 다 아찔했다.
“가여운 자네를 황태자인 내가 구제해주고 싶어 이곳으로 불렀네.”
황실 무도회에 유일하게 참석하지 않은 여자. 사랑하는 남자를 전쟁터에 보내고도 그를 2년 가까이 기다린 순정적인 여자. 정혼에 골머리 앓던 황태자 유다르가 가장 궁금해했던 그 여자.
로아는 갑자기 쏟아내는 유다르의 제안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유다르는 로아를 만나보고 싶어 애탔던 만큼 이 순간을 즐기며 입맛을 다셨다.
“황태자비가 되어라.”
로아는 갑작스러운 유다르의 제안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자네는 본성이 잔악한 전쟁광에게 속은 순진한 여자고, 난 가여운 자네를 구원해준 아량 넓은 황태자가 되는 거지.”
에이젠의 사랑과 명예를 빼앗고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거지 같은 의도는 여전했기 때문이다.
“황태자비가 되겠습니다.”
조금도 놀라지 않은 기색의 로아는 단번에 유다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
유다르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를 살려주십시오. 최고형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납치해 가두었던 에이젠을 선처해줄 것을 호소했다.
세간에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되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다르는 더욱 배가 아팠다. 그게 뭐가 됐든 전부 짓밟아버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듯했다. 이토록 애절하고 아련한 두 사람을 완벽하게 찢어놓고 싶었다.
“알겠다. 내 약속을 지키지.”
유다르는 잠시라도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사용인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레이디 클라리온에게 최상의 대접을 해주어라.”
로아 쪽으로 시선을 돌린 유다르는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혀를 쯧, 차는 소리를 내며 사용인들에게 걸어갔다.
“깡마른 걸 보니 아마 사람을 가둬놓고 밥도 제때 챙기지 않은 모양인데 지금 당장 만찬을 준비해 가져와.”
“예, 저하.”
로아는 날카로운 눈매로 유다르의 뒷모습을 흘겼다. 제 의지대로 식사를 거른 적은 있어도 에이젠이 굶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마른 것을 섣불리 에이젠의 탓으로 돌리는 유다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 쪽으로 걸어가던 유다르는 나가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식사 맛있게 하고 맘 편히 쉬고 있어.”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안심시키려는 말을 했다. 로아는 입을 꾹 다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다르가 나간 후, 로아는 홀로 남겨졌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곳을 탈출할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 끼니를 거른 탓에 도망칠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똑똑.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습니다, 레이디.”
고개를 든 로아는 열리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 열린 문틈으로 음식 냄새가 쏟아졌다.
“욱.”
이제 다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또 멀미가 난 것처럼 속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꿀렁거리는 안쪽엔 게워낼 것도 없건만, 쓰디쓴 위액이라도 긁어모아 불쾌하게 역류했다.
“우윽, 웩.”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난 로아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곤 바닥을 향해 구역질을 해댔다.
“어머, 어떡해.”
놀란 하녀가 트롤리를 두고 로아를 향해 뛰어왔다. 로아는 그녀를 향해 다가오지 말라는 손짓을 할 힘도 없었다.
“얼른 사람을 불러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뛰쳐나간 하녀는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의료진과 함께 돌아왔다.
“정신이 드십니까? 잠시 쓰러졌던 건 기억나세요?”
“……네.”
의료진은 로아를 침대에 눕히곤 진찰을 시작했다.
“음식이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헛구역질을 시작하셨어요.”
로아의 상태를 목격한 하녀가 증상을 대신 진술해주었다.
“미열도 좀 있는 것 같네요.”
로아의 몸 상태 곳곳을 체크한 의사는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임신 가능성은 없겠죠?”
“…….”
약이 투여되기 전,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의례적으로 묻는 절차였다. 그러나 로아는 ‘임신’이란 단어에 가슴이 심하게 뛰는 걸 느꼈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었다.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로아에 의사 역시 눈치챌 수 있었다.
“혹시 마지막 월경일은 언제였습니까?”
미약을 먹은 에이젠을 달래기 위해 정신없이 관계를 가졌었다.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때때로 밤을 함께 보내곤 했다.
갑작스럽게 신체에 변화가 찾아온 가장 유력한 원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 때가 지난 것 같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로아의 곁에 있던 의사도 하녀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황태자 유다르가 신붓감으로 정해놓은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고 있다니. 유다르가 알면 격노할 일이었다.
에이젠은 물론 로아의 목숨까지 부지하기 힘들게 될지도 모른다.
“어, 어떡하죠?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녀는 로아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중얼거렸다.
보고를 안 하면 사용인들이 방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지도 모른다. 로아는 그들의 입장도 이해했다.
“일단 우린 잠깐 나가서 이야기하죠.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려주시겠어요?”
양해를 구하는 의사에 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가고 홀로 남겨진 로아는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봤다.
혼란스럽긴 했지만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 상황이 이래서 그렇지 기뻤다.
사랑하는 남자 에이젠의 아이를 가졌다.
로아는 일전에 방문했던 루베른 영지에서 친구 벨라니스가 임신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벨라니스는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매우 행복해했다. 아기를 갖게 되니 남편인 루베른 백작이 더 잘해주는 것도 좋다고 했다.
로아 역시 부러워했던 벨라니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로아는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곧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도 지금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로지 배 속에 든 아이에 대한 호기심뿐이었다.
“안녕.”
처음 인지하게 된 아기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안녕, 반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