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탈출구
밖으로 나온 의사와 하녀는 귀퉁이를 돌아 몸을 숨겼다. 혹시라도 누가 엿듣진 않을지 두 사람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안타깝긴 하지만 역시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겠지?”
로아의 임신 사실이 알려진다면 레이디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안타깝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임신 사실을 숨기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니 손쓸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은밀하게 말을 맞춘 두 사람이 로아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고리를 잡은 하녀는 가벼운 느낌에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
“엇, 뭐야.”
문이 잠기지 않고 열려 있었다. 두 사람이 황급히 나가며 잠금을 신경 쓰지 못한 모양이었다. 유다르는 로아가 도망칠 가능성을 고려해 출입 시에는 반드시 잠금에 유의하라 신신당부를 했었다.
놀란 하녀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로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레이디 클라리온이 사라졌어요!”
의사는 다급하게 소리치는 하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주위를 다시 한번 살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하녀가 진정하고서야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내 주었다.
“문이 열려 있었나 봐요.”
“몸이 허약해져 있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어서 찾으러 가자.”
서로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양쪽으로 흩어졌다.
***
“허억, 하…….”
방을 빠져 나온 로아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뛰고 또 뛰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때면 몸을 숨기는 순발력도 잊지 않았다. 한 번 갇혀본 적 있는 황궁인지라 건물의 구조를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로아는 카일론을 찾아야 했다. 그의 거처가 어느 쪽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 황원의 중정이나 후원 쪽을 내려다보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넓은 황궁에서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높은 층으로 올라온 로아는 단번에 카일론을 찾았다. 후원을 점검하듯 거닐고 있던 카일론을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다.
카일론은 키가 큰 교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로아와 눈이 마주쳤다.
“……로아?”
카일론이 저를 인지한 것을 느낀 로아는 얼른 창문 밑으로 몸을 숨겼다. 카일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발각될지도 모르니 몸을 사렸다. 이제 카일론이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근데 그 소식 들었어?”
반대쪽 복도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로아는 주변을 살피다 비어있어 보이는 방으로 일단 몸을 숨겼다. 불이 꺼져있어 무슨 용도의 방인지도 몰랐다. 살짝 벌어진 문틈으로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붙잡혀온 트로네 공 말이야. 백작 영애를 납치 감금했다면서?”
숨을 죽이고 있던 로아는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흠칫거렸다.
“태자 저하께서 신붓감으로 봐둔 상대였는데 트로네 공이 낚아챘다지. 엄연한 황실 반역에 해당한다고 최고형이 내려질 거래.”
로아는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손끝이 떨려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
저를 낚아챈 건 에이젠이 아니라 유다르였다.
유다르는 저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해석해 에이젠의 죄를 중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황태자비가 되어주는 대신 그의 최고형만은 면하게 해달라 부탁했건만, 오히려 그 약속이 에이젠을 처형대로 몰아넣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거 확실해? 조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재판 과정이랄 것도 없이 그렇게 빨리 형이 나온단 말이야?”
로아처럼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었다. 에이젠 트로네는 제국에 없어선 안 될 최고급 전력이었다. 그런 사람을 이리도 쉽게 처형시킨다는 건 일반 제국민들도 납득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황제 특별령인데 별수 있나. 태자 저하가 봐둔 여자만 아니었어도 면죄부가 적용됐을 텐데.”
수사와 조사가 종결되고 황실은 그에게 법정 최고형을 선고했다.
유다르는 로아를 황태자비로 점찍어둔 상태라 진술했다. 이 사실을 에이젠에게도 전했으며 이에 앙심을 품은 에이젠이 로아를 납치 감금한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내려왔다.
황태자비가 될 여자를 납치 감금한 혐의는 명백한 반역으로 인정됐다.
“인생 참 별거 없어. 제국을 위해 육신과 정신을 바쳐봤자 뭐하냐고.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데.”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은 로아가 숨어 있던 방을 지나쳐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갔다.
로아는 입을 막고 있던 두 손을 툭 떨어뜨렸다. 공허해진 두 눈이 새카만 방 어딘가를 목적도 없이 헤맸다.
유다르는 자신을 속였다. 그리고 저는 금방 들통날 그의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로지 에이젠을 위해. 그를 살리기 위해.
극악무도한 유다르는 간절한 로아의 마음을 이용한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
로아는 믿을 수가 없어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홑몸도 아니었기에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로아는 그 기척만 듣고도 카일론이라 확신했다. 두리번거리는 카일론을 발견한 로아는 문을 살짝 열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카일론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된 거야, 로아.”
그는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정말 에이젠의 저택에 감금되어 있었던 게 맞는지. 절절히 에이젠을 기다렸던 로아를 잘 알았기에 이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로아가 무작정 에이젠만 믿고 가족들에게 서신 한 통 보내지 않고 황실의 초대장도 무시할 아이는 아니었다.
“카일론, 나 도와줘.”
“뭐?”
그러나 로아는 카일론의 궁금증을 다 해결해줄 여유가 없었다.
“에이젠이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 없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워했던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고, 납치당한 후에도 살리고 싶어 하다니.
“너 도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 일단 내 부탁부터 들어줘.”
카일론은 로아의 간절한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지만 트로네 공은 이미…….”
카일론의 입에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 로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무조건 막을 거야.”
오늘 당장 이 황궁을 빠져나가야 했다. 황제 특별령으로 떨어진 최고형이라면 긴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탈출해서 처형대가 있는 곳으로 간다 해도 늦을 수도 있다.
“오늘 안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제발 도망갈 수 있는 길 좀 알려줘.”
그러니 당장 여기서 도망갈 수 있는 도주로가 필요했다. 카일론이라면 황궁 전체의 도면을 매일 볼 테니, 분명 아는 길이 있을 터였다.
카일론은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다급해 보이는 로아에게서 모든 걸 물을 순 없었지만,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에이젠을 구하러 가려는 게 선히 보였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로아는 에이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거였다. 에이젠 역시 억울한 누명과 과장된 죄목으로 부당대우를 받고 있다.
“후원을 통해 빠져나가면, 광장으로 나가는 지름길이 있긴 한데…….”
카일론은 대답을 하면서도 망설였다.
동생을 위험한 일에 노출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정당하지 못한 흐름에 격렬히 저항해야 하는가.
“멋대로 출입했다가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그래.”
로아가 맨몸으로 뛰어든다 한들 황실의 결과를 뒤엎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같은 죄목을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
“난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니까, 아마 내가 끼어들면 전부 멈출 거야.”
로아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신뢰를 주려 애썼다.
“나 좀 제발 도와줘. 살려줘, 카일론. 제발…….”
그러나 눈꼬리 끝에 고여오는 액체에 약해져버린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결국은 감정으로 호소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단 말이야.”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이자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었다. 카일론은 두 눈 딱 감고 로아를 돕기로 했다. 여동생을 납치한 에이젠은 괘씸했지만, 로아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따라와.”
***
유다르는 정무를 마치고 나왔다. 휴식을 취하기 전 로아를 보기 위해 그녀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다급해서 그를 향해 뛰어오는 사용인들을 발견했다.
“저하,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급한 보고 사항인 걸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뭐가 그렇게 성급한가. 천천히 말해보거라.”
그러나 유다르는 제 뜻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여유만만이었다.
“레이디 클라리온이 방에서 탈출했습니다.”
“……뭐?!”
방금까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유다르의 감정은 비정상적으로 치솟았다. 격노한 감정이 갑자기 치오르면서 유다르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누구야. 어떤 머저리 같은 자식이 감시를 그따위로 허술하게 해!”
언성을 높이는 유다르에 사용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클라리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의료진을 불러왔고 여러 사람이 방을 출입하는 과정에서 그만…….”
유다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분명 궁 안에 숨어 있을 것이다. 도망친 로아를 찾아내면 이번엔 족쇄를 걸어서라도 가두리라 생각하며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